〈 56화 〉LEVEL 4 (14)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별이 바뀐 것에 대한 감상 한 줄 남길 만도 했지만.
[BAD END] - 주인공 DEAD (46일 생존)
목숨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지는 상황인데 감상은 커녕 성별이 바뀌었다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남들은 TS 됐을때 느긋하게 몸을 이곳저곳 만져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하던데...
나는 왜 그런 이벤트가 없는 것일까.
소설과 현실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 였구나?"
기왕이면, 라일라가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하도 죽다 보니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과거로 회귀할지 감이 잡히긴 했지만, 아직은 미숙한 것인지 미세한 시간 조절은 힘들었다.
"진짜는 어디 있어"
눈앞에 벨라트릭스가 보인다.
흙을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그림과도 같은 미모는 하나도 바래지 않았다.
탐욕이 서려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몇 번씩이고 마주하지만, 아직도 두렵다.
눈만 마주쳐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녀는 강하고 무서웠다.
"벨라. 이제 그만해주면 안 돼?"
"말해주기 싫어도 곧 말하게 될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뱀파이어와 벨라트릭스의 육탄전.
이런 싸움에 감히 나 같은 게 끼어들어도 되나 싶었지만.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누군가 죽는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까 죽기 전 보아두었던 장소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샤를과 그의 종자들.
그리고, 라일라의 존재감이 워낙 크기에 나라는 존재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이 괴물들이 득실득실한 전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는 싸움 같은 건 전혀 할 줄 모른다.
해본적도 없고 하고싶지도 않다.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나보다 엘리엘린 자매가 훨씬 잘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몸에 들어온 것일까.
내가 믿는 것은 단 하나.
지금까지 줄곧 죽어왔던 과거.
회귀로 인한 예측이 아닌 죽음 그 자체를 믿는다.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작가의 대표적인 즐거움 중 하나였다.
내가 만들어낸 소설의 설정이며 소설을 쓸 때 매일같이 상상했다.
검사들은 그리고 마법사들은 어떻게 강한 힘을 가질까.
마나를 다루고 단전 혹은 심장에 서클을 만드는 방식은 너무 식상하다 여겼기에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싶었다.
검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육체 관조.
몸 전체에 마나를 쌓고 그것을 실시간으로 관조하며 근육 섬유부터 뼈 혈액 혈관 피부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로 마나를 덧씌운다.
더욱 촘촘하게 보다 세밀하게.
그것으로 검사는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 된다.
마법사는 그 검사의 관조를 훨씬 초월해 주변을 장악한다.
그저 자신의 육신과 검이 닿는 곳만을 장악해 세세하게 컨트롤하는 검사의 관조와는 다르게 영역의 넓이만큼 강함을 나타내는 마법사.
마법사의 영역과 공방을 설정할 때 못난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내 이것저것 설정한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위의 것들은 전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설정들.
내가 지금 당장 이용하려는 것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의 설정이었다.
뱀파이어는 인간과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흡혈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 혹은 유사 인종의 마나를 빼앗은 뒤 그것을 쌓아가는 종족.
뱀파이어가 되거나 혹은 뱀파이어로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과는 다르게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며, 때에 따라서는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종족이다.
그들은 생명을 연장하는 마나를 숨을 쉬는 것보다 쉽게 사용하며, 검사나 마법사처럼 영역을 만들기 위한 노력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 대한 디메리트로 자연적으로 마나를 쌓는 인간과는 다르게 남의 것을 갈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종족이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의 강함은 인간에게서 빼앗은 마나의 양과 얼마나 여왕의 피를 받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혼의 무게.
죽지도 늙지도 않고 평생을 살아가는 뱀파이어들은 이 영혼의 무게를 불사라는 고유능력으로 시간을 쌓아가며 늘려나가지만.
유달리 특이한 방식으로 그 무게를 늘리는 뱀파이어가 하나 있다.
에아.
여왕의 직속 종자이며, 권능은 재생.
그녀는 머리가 잘리고 심장이 가루가 되어도 압도적인 재생능력으로 죽음과 거의 흡사한 경험을 이용해 성장한다.
그리고, 나는 그녀보다는 그 수가 적지만 회귀를 이용해 진짜 죽음을 스무 번이 넘도록 경험했다.
원래 내 손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손을 꽉 쥐자 묘한 전능감에 휩싸인다.
예전 엘리제가 수작을 부렸을 때보다는 훨씬 미약한 것이지만, 그런데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 자체는 확실히 느껴진다.
"크윽...괴물새끼...저거 인간 맞아?"
벽에 처박혀 욕지기를 내뱉는 사라의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아까처럼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사라는 죽을 것이다.
전 회차와는 다르게 조금 강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무기가 없는 맨손이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이 조그맣고 가냘픈 주먹은 건물도 거뜬히 무너트릴 정도로 강하다.
못한다고 생각하니 안되는 것이다.
벨라가 어디로 올지 어떤 식으로 올지를 알기에 그곳으로 땅을 박찬다.
방금 땅을 박찼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점프와 같은 도약 한 번에 주변 시야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창문 너머를 보는 것보다 더욱더 빠르게 바뀌었고 반대 발이 착지를 했을 때에는 나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있었다.
아직 동체 시력이 적응되지 않아 벨라를 따라잡지 못하지만, 그녀가 날아올 거라 예상되는 곳에 주먹을 내뻗는다.
아까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게.
몸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던 전능감의 일부가 주먹을 통해 나아갔고, 곧이어 손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느낌.
퍽.
제대로 들어갔다.
사라를 마무리하기 위해 날아오던 벨라의 복부에 제대로 꽂힌 조그마한 주먹.
벨라의 육신이 천천히 뒤로 밀려나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그녀의 육체와 내 주먹이 떨어지는 순간 빠른 속도로 그녀가 날아갔다.
그녀가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며 나무들을 전부 무너뜨린 뒤 저 멀리에서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아니지, 부군. 생각했던 것보다 근성 있었네"
사라가 내 등을 치며 말을 했지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다.
오른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분명 이것이 현실이기는 했지만...
"무슨 생각 하길래 그리 자기 손을 보고 있소?"
"아니...갑자기 미안해서"
멍청한 말이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세게 때려본 것이 처음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개 같은 소리. 끝난 거 아니니 긴장하쇼."
"알고있..."
사라의 말에 대답하기 직전 그녀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햇빛을 반사하는 은색 검날의 모습에 나는 말을 끊으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보다 검이 사라의 목을 내리치는 것이 더 빨랐다.
바닥을 뒹구는 사라의 얼굴.
"방금 건 솔직히 아팠어."
아무리 벰파이어도 에아가 아닌 이상에야 목이 베이면 죽는다.
"그래?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세게 때릴게"
"...그만 죽어"
그건 죽어도 싫다.
내 회귀를 막으려는듯 그녀가 날 껴안았지만 이미 사라가 죽은 시점에서 나는 돌아가야했다.
[BAD END] - 주인공 DEAD (46일 생존)
샤를과 그녀의 종속들 그리고 라일라까지.
전부 내가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기심 가득한 내 목적을 위해 그녀들이 희생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녀들이 내 이기심에 휘말려 죽는 것까지는 내가 억지로라도 참아낼 수 있지만, 그것이 고정된 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쾅
"크윽...괴물새끼...저거 인간 맞아?"
내가 그린 결말은 모두가 살아있는 것이었고, 그 결과를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죽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번 사라에게 달려가 주먹을 내뻗었다.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까보다 더 강하게.
퍽.
제발 한 번의 성공으로 이것이 전부 끝맺음을 맺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벨라가 너무 강했다.
"...엘리...아니지, 부군. 생각했던 것보다 근성 있었네"
사라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땅을 박차고 바닥을 뒹구는 벨라에게 달려간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감정을 가질 정도로 약자가 아니다.
아까와 같은 느낌으로 다리에 힘을 줘 균형을 잡으려 하는 벨라를 향해 내질렀지만, 그녀의 손이 내 발을 잡아버렸고 곧이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전신이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습이 아니라면, 아무런 타격도 못 하는 것일까?
...옛날 그의 기억 속에서도 봤지만, 그녀의 무력은 이상하리만치 강했다.
인간 중 제일 강한 히로인은 라일라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라일라가 공방에 있어도 비슷한 수준인 거 아니야?
바닥에 내팽개져친 몸을 일으키던 중 벨라에게 잡혔던 발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뼈가 으스러진 것일까.
쌍둥이 자매의 몸이라면 순식간에 치유될 것이 분명하지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벨라의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친다.
"...때릴꺼야?"
...쌍둥이 자매는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 그녀의 마음이 약해질까 싶었지만, 죽어도 아니었던 것인지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진짜 몸이면 살살 때렸을 텐데. 다행이네. 이 기회에 제대로 교육해줄게."
이런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에게 때릴 곳이 대체 어디 있다고 교육을 해주겠다 하는 것일까.
그녀는 검을 들고 있는 손이 아닌 반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맞으면 존나 아플 텐데...
맞기 전에 회귀할까. 아니면, 조금 더 미인계를 사용해볼까.
심각하게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했지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주먹이 날아왔다.
"...진짜 귀찮네"
얻어맞기 직전 내 등 뒤에서 나타나는 레이피어.
내 그림자를 통해 반쯤 몸을 드러내 레이피어를 찌르고 있는 프리시아와 순식간에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내는 벨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프리시아의 기습을 막아내자마자 사라가 합세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겨우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지 마!"
화가 잔뜩 난 벨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무시하고 도망쳤다.
걸을때 마다 빠르게 으스러진 뼈들이 달라붙는 것을 느낀다.
내가 아픈게 아니라면 존나 신기했을텐데...
개같이 아파서 신기해 할 겨를도 없다.
"부구우우우운!!....에...엘리?"
전장에서 벗어나자 갑작스럽게 나타난 에아가 정면에서 나를 껴안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얇은 헝겊 한 장만을 입고 있는 몸으로 날 껴안은 것에 순간 당황했다.
내 몸이 작아졌다보니 훨씬 키가 큰 에아의 몸에 쏙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기에 에아의 허리를 잡아 떼어냈다.
"가서 싸워야지 뭐하고 있어?"
"시러 가기시러...저 여자 무서워어..."
아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벨라에게 베었던 것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인지 울기 직전의 모습을 하는 에아의 모습.
성인과 다름없는 외관과는 다르게 그녀의 정신연령이 어려 보이는 것은 아무리 베어도 죽지 않는 육체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미안해. 그래도 네가 안 싸워주면, 사라나 프리시아가 죽을거야. 그래도 괜찮아?"
"...힝..."
...쓰레기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미안한 감정에 떠밀려 전장을 이탈시키기에는 그녀의 힘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쾅
등 뒤로 들려오는 폭음과 함께 거대한 얼음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라일라.
벨라의 타겟이 되는 것을 피해야 되니 최대한 힘을 숨기라고 말했는데...
그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일까.
"...부탁해"
"그러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설정을 넣은 적은 없지만, 그녀가 하는 행동이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기에 발꿈치를 최대한 들어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헤헤...착하다 착하다"
"고마워"
해맑은 아이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에아는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할 수 있다.
몇번이고 되뇌인 뒤 눈을 떠 다시금 죽을 장소를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