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LEVEL 4 (15) (57/87)



〈 57화 〉LEVEL 4 (15)

"...선생님..."

전장을 살펴보기 위해 최대한 높은 곳에 왔더니 눈앞에서 라일라가 심장에 칼이 박힌 채 죽어가고 있었다.
잠깐 에아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라일라가 당했다.

"내가 마법 쓰지 말라고 말했잖아."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지만,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나는 그녀가 내 말을 무시하고 마법을 썼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왔네"

라일라의 심장에 박혀있는 검을 왼손으로 뽑아내며 나를 바라보는 벨라트릭스.
그녀의 오른쪽 팔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죄송해요...선생님..."


심장이 꿰뚫려 바닥에 쓰러졌음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며 조그마한 소리를 내던 라일라는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손을 떨어트렸다.

"이제 그만하지?"

"이길 때까지 뒤질 건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알았어. 전부 살려 줄테니 항복해"


 순간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녀를 어떻게 믿고 항복을 할까.
아니, 그리고 그녀가 전부 살려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좇까"

[BAD END] - 주인공 DEAD (46일 생존)


***



옛날 그와 벨라트릭스의 과거를 본 적이 있다.
회귀 시간을 제외하고 실제로 흘러간 시간만 따진다면,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죽음을 경험한 탓인지 무척이나 옛날처럼 느껴진다.

[주인님의 여자들은 모두 망가져 있잖아요. 그러니, 주인님이 지금이라도 바로 서지 않으신다면 무척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 거에요]

그의 기억 속 엘리제가 했던 말이었다.

재미있는 일.
그 당시에는 벨라트릭스를 이해하지 못해 그저 재미있는 일이라 치부하고 넘어갔었다.

그녀가 자신을 놓아버리고, 인격이 돌변해 그의 히로인들과 왕국 그리고 가문을 무너트리는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머릿속에 담아두기만 했었다.


 당시에는 무척이나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대충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냥 섹스...를 하면  거라 생각했다.

멍청했다.

그가 어째서 벨라트릭스를 향해 누나라고 불렀던 것인지.
벨라트릭스가 그의 기사가 되겠다며 무릎을 꿇던  어째서 그가 죽지 말라는 말을 했는지.
어째서 그를 독차지하기 위해 모두를 죽였던 것인지.
어째서 그를 차지하고 제일 먼저 왕국과 자신의 가문을 무너트렸는지.


내가 벨라트릭스를 설정하며 소설 속에서 어떤 식으로 그녀를 그렸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완벽한 기사였다.
나는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에 맞서는 기사라는 것에 환상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를 이상적인 기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완벽해 빈틈이 존재하지 않으면 주인공을 죽도록 사랑하는 히로인이 될  없지 않겠는가.


...나는 완벽했던 그녀에게 슬픈 과거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죽는 것을 방관했다.
유일한 혈육이자 그녀를 쫄래쫄래 따르던 동생이 죽은 것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좋아했다.


여자로 태어나 동생에게 후계 순위가 밀렸던 것에 앙심을 품었던 그녀다.
동생이 없으면 가문의 후계자는 그녀가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동생이 죽는 것을 방관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검을 놓지 않아도 된다.
가문의 기사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어머니가 버림받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만을 갈구하다 버려졌고, 그렇게 그녀의 어머니는 자살했다.

강자였던 아버지와 가문의 기사들.
약자였던 어머니와 동생.

그녀는 동생이 도와달라 부탁함에도 그것을 무시했다.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만 전해달라는 어머니에게 알겠다고 말하며 그녀의 말을 고의로 잊었다.

약자를 버렸던...
어머니와 동생을 버렸던 그녀가 완벽한 기사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를 잊었다.

...라는 설정을 넣었다.
완벽한 기사를 만들어 놓았음에도 중간에 하렘을 만들고싶어 약자를 배신했던 과거를 만든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거를 알고 있음에도 그는 벨라트릭스를 향해 일부러 누나라고 불렀다.
철부지처럼 칭얼대는 모습을 수차례나 보여주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주인공처럼은 할  없으니, 그녀의 과거를 후비며 어떻게 해서든 동생과 겹쳐 보이게 했을 것이다.


그래야 그녀가 내 편이 되어줄 테니까.

...그런 선택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했지만... 천 번이 넘는 죽음을 겪고서 겨우 탈출하려던 그에게 그녀의 과거를 책임지라는 것은...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벨라트릭스는 그가 고통받는 것을 방관했고 마지막까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자살.


그녀는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완벽한 기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자살이었다.


[누나. 그러면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내 명령 없이 절대 죽지 말기. 멋대로 사람 구하겠다고 뛰어들지도 말고, 죽을 것 같을 때는 기사도 같은 건 전부 버리고 도망쳐. 어때 쉽지?]

그는 그것조차 못하게 막았다.
...그도 나처럼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안이 이미 곪아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곪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완벽한 기사가 되기 위해 도려낸 과거.
그리고  과거로 인해 생겨난 후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벨라트릭스는 완벽한 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환상의 똥꼬쑈를 벌였다.
그녀에게 구원받았던 그였기에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이것저것  해 보였다.

그녀를 수도 없이 설득했고, 때로는 그녀를 제압하기도 했다.
그녀는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고, 제압하면 어떻게든 자살했다.

그가 무슨 노력을 하든 간에 그녀는 망가졌고, 결국 그는 그녀는 버렸다.


여기서 끝이 나면 좋았겠지만.
그 개 같은 새끼는 자기가  똥을 나에게 떠넘겼다.




***

눈을 뜨자 에아와 헤어지고 높은 장소를 찾던 때로 돌아온 것을 알  있었다.


아까 벨라에게  방 먹였을 때와 같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느긋하게 생각할 시간 따윈 없다.
빠르게 가자.

땅을 박차자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느꼈고, 순식간에 산꼭대기까지 몸이 떠올랐다.

땅에 발을 살포시 올리며 착지하고서 고개를 천천히 들자 벨라트릭스가 한쪽 팔을 잃고서 나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 팔 어디 갔어?"

"비켜"


"자신만만하게 곧 말하게 될 거라고 하더니. 별거 없네"

그가 싼 똥을 치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이미 그녀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져 버렸다.


[누나. 내가 안 보고 있다고 죽을 생각하지 마]

그녀에게 죽지말라는 말을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너 먼저 죽여버리기 전에 비켜"


"...누나. 자꾸 이러면 미움받는다는  알잖아. 적당히 하고 항복해"


진짜로 나를 죽일 생각인지 왼손으로 검을 잡고서 나를 향해 겨누었고, 그녀가 순식간에 나를 향해 달려왔다.
직선으로 내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검은 너무나도 빨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니...


[BAD END] - 주인공 DEAD (46일 생존)

피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몸을 비틀며 그녀의 검을 피하고  뒤 그녀는 다음 공격을 기다렸지만...

"또...병신 같은 새끼가!"


욕하는 벨라트릭스라니 이건 귀하다.
절대 못피하리라 생각했던 공격을 피했던 것인지 내가 회귀한것을 바로 알아챈다.

"그만하라고! 적당히 죽으라고!!!"


"누나가 그만하면 진짜 그만한다니까"


지금 들어와 있는 몸을 생각하면, 누나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지만.
벨라트릭스의 정신 공격을 위해서는 누나라는 말이 더 쓸만했다.

화를 내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그녀는 나를 무시하고 내 뒤에 있는 라일라를 죽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어딜 가려고?"


 뒤를 넘어가려던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내뻗어보지만, 그녀가 몸을 뒤로 빼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힘은 있는데 맞추지를 못하네.
내일이라도 어디 격투기 도장이라도 다니든가 해야겠다.

벨라트릭스가 균형을 잡고 라일라를 죽이기 위해 달려가기 전에 주변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얼음으로 된 기둥들이 주변 곳곳에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선생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이 들자 나는 등 뒤에서 라일라가 나를 껴안고 있다는 것을  수 있었다.

"방심하지 마"


"전부 선생님 때문이잖아요."

"지금  탓 하는 거야? 와... 나 때문에 방심했다?"

"...선생님이 다치는 건 절대 싫어요."

"내 몸 아니야"

조그마한 소녀에게 미안한 말이긴 했지만, 그녀가 부담을 덜기 위해 한 말이었다.

"아파하는 것도 싫어요"


 누구보다 나를 아프게 했던 여자가 할 말은 아니다.
이 긴박한 상황에 팀킬을 해버리면 안 되었기에 애써 목까지 올라왔던 말을 참아내었다.


라일라의 품속에 안긴  벨라와 눈이 마주친다.


라일라가 세워둔 기둥은 그녀만이 사용할수 있는 간이 공방 같은 것이었다.

이 안으로 들어오면 아까와는 다른 차원이 쓴 맛을  수 있기에 벨라트릭스도 들어오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다.


팔이  짝 없는 검사.
그녀는 지쳐있었고, 곧있으면 도착할 뱀파이어들은 지치지 않는다.

"뭐야. 벌써 체크메이트야?"

 있으면이 아니라 이미 도착한것인지 샤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꼬마는 내 것이니까 이제 놔주지 않을래? 너 같은게 만지고있으니 좀 화나거든"

"선생님이 언제부터 당신의 것이었죠?"


"지금은 뱀파이어잖아. 그러니 뱀파이어 여왕인 내 소유지"

고개를 위로 올리자 라일라의 어깨를 잡은 채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샤를을 볼 수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놔"

"싫은데요"

"둘  그만해. 지금 그게 중요해?"

이 긴박한 상황에 이딴 말 싸움을 하고 싶냐고 물어본 것이지만.

"응,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저 여자를 죽이든 잡든 구워 먹든 신경 안 써. 자기가 내 것인 게 훨씬 중요해."


...괜한 말을 했다.

"선생님은 물건이 아니에요"

껴안고 있는 라일라의 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숨 막히는데...

"둘 다 적당히..."


이럴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던 중 나를 보는 샤를과 라일라의 눈빛이 변한 것을 볼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코앞에 멈춰있는 벨라트릭스와 그녀의 검.
그와 함께 벨라트릭스의 몸에 박혀있는 얼음 가시들과 그녀의 목을 향해 휘둘러지는 사라의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멈......춰"

그녀의 피를 뒤집어 쓰며 마직막 말을 내뱉어본다.

팔 한 짝을 잃고, 라일라를 죽이지 못한 순간부터 승리가 정해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은...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BAD END] - 주인공 DEAD (46일 생존)



자살.
졌다는 것을 알자마자 죽기위해 달려든 것이다.


"선생님은 물건이..."

"놔"

"선생님? 갑자기 왜... 설마  여자 말대로... 안돼욧! 아무리 이런 여자에게 빚을 졌다고는 해도..."


"놓으라고"


나를 안고 있던 그녀의 팔을 푼 뒤 벨라트릭스에게 걸어간다.
이렇게 쉽게 끝나면, 그 새끼가 그녀를 버렸을 리가 없다.

"벨라트릭스"

마족들의 손에 죽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수십번을 죽었던 그였다.
그렇게나 사랑했던 여자를 버린 것이다.


"죽지 마"

"......"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


이 개복치 같은 여자는 어떻게든 죽으려고 발버둥을 쳤기에  번이고 말해줘야 알아 듣는다.


"대답해야지"

한쪽 팔이 잘리고, 옷들이 전부 찢어져있으며 온몸에 상처가 한가득 나 있는 그녀의 앞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임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이긴 했다.

"...왜"


무겁게 닫혀있던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왜...그녀가 죽으면  되는 것일까?

옛날에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회귀를 해버려서 전부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녀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었기에 무척 기억에 남았다.

[주군에겐 죽여야  적이 있습니까?]

"죽이는 건 몰라도 혼내줘야 할 여자가 있거든 네가 없으면 힘들어"

굳이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여자가 누군지 뻔하다.

[검을 배우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너한테 검은 몰라도 주먹질은 배우고 싶은 것도 있고"

[목표로 하고 계시는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상이 있으십니까?]


"거기다...  인생 편하게 살고 싶은데. 니들이 내가 약하다는 이유로 나를 가지고 놀잖아. 너라도 도와줘야지"

[주군께서는 저에게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냥,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죽지 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자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한테 반말 쓰는 꼬라지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정신 차려. 안돌아오면, 옷 전부 벗기고 사람들 눈요기시켜주고 다닐 거니까"


"...그래서 죽지 말라고..."

"네가 잘못했어. 그러게 왜 멍청하게 도망쳤어. 얌전히 있었으면, 거기서 행복하게 결혼하고 애도 낳고 살았을 텐데"


사랑도 받으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곳에 애착이 있는 새끼가 아니었기에 돌아올 생각 따윈 죽어도 안 했을 것이고, 거기서 그녀가 허락한다면 하렘까지 차려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죽지도 말고, 후회도 하지 마. 도망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해"

"싫어"

화가  것일까?
예전 가슴을 만졌을 때를 제외하고 그녀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나보고 살라는 건데.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는데."


그녀의  눈에 습기가 서려 있다.


"못해...못한다고...이제 더이상... 못하겠어. 죽여줘...죽게해 줘..."


"죽지 마"


"말해!!! 죽으라고 말해... 말해주세요..."


나는 입을 다문  그녀의 절규가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아무것도 없잖아... 살아갈 이유가 없잖아... 이제 제발 죽게 해줘..."

그녀가 우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으며 다짐했는데...


라일라와 사라. 에아. 프리시아. 거기다 이 몸의 원주인인 엘리엘린까지.
전부 몇 번씩이고 죽었다.

이 여자  명 때문에.

"그렇게 힘들면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던가"


눈을 천천히 떠 그녀를 마주 본다.

"생각해보니까 애초부터 난 주군도 뭣도 아니었잖아."

"......"


"난 너한테 충성 서약 같은 거 받아본 적도 없고, 애초에 널 본 게 이제 한 달도 안됐는데."

혹여 속마음을 들킬까 싶어 그녀의 눈을 피하고 싶지만, 그런데도 애써 그녀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다.
내 말이 진심으로 들리게끔 이 악물고 입을 연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지만, 네가 죽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

"죽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돌렸다.
죽으면 곤란하다.
지금까지 들인 모든 노력이 아무 의미 없는 짓거리가 된다.


몸을 돌려 한 걸음씩 걷자 뱀파이어의 밝은 귀를 통해 그녀가 자신의 검자루를 강하게 쥐는 것이 들려온다.


내 빈약한 머리로 생각한 최선의 결과가 그녀의 주군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이것 또한 올바르지 못한 선택이라 한다면 애초에 나 같은 게 그녀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니...그녀가 죽게 두는 것이 맞는 선택이다.

"멈춰..."


그녀의 목소리에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멈추라고..."


애써 무시하고 라일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마치, 나에게 너무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뭐 하고 있어. 가자"


"...네, 선생님"

"잠깐..."

고개를 돌려 벨라트릭스를 바라보았다.


"또 날 잡으러 오면 똑같이 해줄 테니까. 얼마든 다시 와"

"대체...대체 이런 경우 어디 있습니까!!!"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잡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멱살을 잡고서 들어 올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주군께서 죽지 말라고...멋대로...죽지 말래 놓고서 이제 와서...기억이 안 나니. 멋대로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 아무 상관 없다고...그딴 말이 어디 있어!!!"

"진짜 기억  나는데 어떻게 하라고"

"기억하셔야죠! 아니...적어도...죽으라고는 말해주셔야죠. 최소한 책임감이 있다면 마지막에는...이제 죽어도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거잖습니까"

작은 몸으로 멱살을 잡히다 보니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어 모양새가 이상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을 안 쓰는 것인지 그녀의  눈은 오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억지입니다. 주군께서 하시는 건...전부 억지입니다. 그런다고 제가 마음이 바뀔  같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하라고. 조금 전까지 마음대로 했잖아. 그거랑 똑같이 죽으라고. 죽고 싶다며. 왜, 막상 주군이 아니라고 하니까 화가나? 기억이 안 난다니까 어이가 없어?"

"...주군께서는...기억 해야만합니다"


"주군이라고 부르지 마. 쪽팔리니까"

"......"


"최소한의 책임? 지금까지 네가 날 위해서 한 게 뭐가 있는데? 내가 책임을 져야 해? 너 때문에 뒤진 기억밖에 없는데?"


벨라트릭스가 지금까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을까?
나를 위해 경찰서에 쳐들어와 주었던 일.
날 납치하려던 뱀파이어들을 막아 사라와 에아를 죽였던 일.

생각해보니 두 가지밖에 없다.

애초에 그 두 개도 전부 회귀로 사라져버렸으니...

"......"

"네가 죽든 말든  자유야."


"......"


"그런데 안 죽었으면 좋겠어. 이건 진심이야"

...수도 없이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녀가 죽는 것을 바랬다면 그녀가 디아나의 집에서 자살했을  내 목을 긋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옆에 있길 바란다.

"주군은...정말 못된 사람입니다"

"주군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지금부터 하는  어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없는 표정이지만, 적어도...그녀가 당장 죽을 생각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침, 날 훈련해 줄 기사가 필요하던 참인데"


"적당히...하시죠...전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짓말..."


"몰라."

"......"


"기억 안 나. 너랑 나 그리고 디아나랑 있었던 일들 전부 기억 못 해. 내가 기억이 날 때까지 죽지 말고 붙어 있든가."

"...억지 그만 부리시죠."


어쩌라고 내가 기억이 안 난다는데.
애초에 그가 디아나를 용서한다는 게 가능하나 할까?
그런데, 나는 가능하다.
그저 그가 당하는 것을 구경만 했을뿐. 내가 겪은 일이 아니었다.

내 몸이 천천히 내려와 바닥에 발이 닿는다.

"마지막까지...주군의 기사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전부 속죄하길 원했습니다.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해도...마지막 그 순간에는...당신의..."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

"아... 계속 올려다보니까 목 아프다"


일부러 비아냥거린 것이었다.
정말...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기에 더욱...

이미 망가져 버린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은 없다.
내가 심리치료사도 아니고.
애초에...내가 만든 설정과 상황이 꼬이고 꼬여 이렇게 된 것인데...
그녀에게 무슨 치료를 할수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한다면 그녀가 이 악물고 버틸 거라 확신했다.
내가 만든  굳건하고 강인한 기사다.



내 얼굴에서 갑작스럽게 격통이 느껴졌고, 몸이 붕 떠올랐다.

"아..."


정신이 들자 내가 벨라에게 얻어맞고 이곳까지 날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비아냥  걸...



"때리고 싶어 때렸습니다."

본래 몸으로 맞았으면 얼굴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미안해 엘리린...


"이제 주군도 아니고 약해 빠졌으니 때리면 맞아야지..."

"주군께서는 제가 필요하십니까?"

흙바닥에 앉아 일어서려던 내 앞에 눈앞에 무릎을 꿇는 벨라트릭스.
슬픔이 가득하긴 했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강인해 보였다.


"응"


"당신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우둔하고 쓸데없는 감정으로 매번 일을 그르치는 어설픈 기사지만.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필요가 되기를 원합니다"

"...응..."

"바보같이 주군을 사모하고 있는 기사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존나 힘들었다.


"...어...몇번을 말하게 해..."


존나... 오래 걸렸다.
한번 한번 뒤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어 미쳐버릴  같은데
미친 새끼처럼 버텼다.

"...주군은 울면  됩니다"


"안 울어"


"눈물이 나고 계십니다"


"니가 때려서 그런 거야"


좇같이 힘들어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녀가 내 눈을 닦아주던 그날처럼...


[실...례하겠습니다]

흙먼지가 묻은 손을 떨며 조심스럽게 내 눈을 닦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이곳에 온 뒤로 울음이 많아지셨습니다"

"기억 안 난다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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