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LEVEL 5 (6)
소설을 쓸 당시 나는 전 늘 하나의 키워드를 정해놓고 히로인을 등장시켜왔다.
컨셉과는 다르게.
다수의 캐릭터가 나오는 하렘 소설에서 그 캐릭터의 느낌을 잊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정해놓은 나만의 방식이었다.
각각의 캐릭터가 여러 가지 컨셉을 가지거나 공유할 수는 있지만, 캐릭터마다 설정해놓은 몇 가지의 키워드만큼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될 절대적이었다.
엘리제는 악역.
벨라트릭스는 기사.
라일라는 의존.
디아나는 반전.
그 밖에도 각각의 캐릭터마다 욕설, 빈곤, 멍청, 헌신, 애증, 쾌락 등이 존재했다.
그리고.
샤를에 대한 키워드는 소유.
주인공이 바뀌어 그녀들과 겪은 경험이 다르기에 보이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녀들에 대한 초기 설정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샤를은...아마, 하하 호호 웃으며 히로인들과 함께 하렘 무리에 섞이지 않을 것이다.
"으헤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가 매일같이 꿈꿨던 소중한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망쳐버린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다.
"샤를"
"...으에...?"
내 부름에 반응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반응하는 것을 보니 매우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뷰륙...
그녀의 배에 손을 올리자 내 손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힘이 풀려서인지 이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하반신에서 백색의 액체가 덩어리지어 흘러내렸다.
적당히 괴롭히면 기절할 줄 알았는데...
하드웨어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겨우 이런 것으로는 기절하지 않는다.
하긴, 샤를과도 같은 히로인들은 마나라는 비상식적인 힘을 늘 몸 안에 두고 있어 폭탄에 맞아도 상처 하나 없을 텐데. 이런 레슬링 몇 번 했다고 기절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다만 소프트웨어는 다르다.
경험.
나를 예로 들어보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죽음을 잘 견디는 사람이다.
나보다도 잘 죽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압도적인 공포와 고통을 무감각하게 넘겨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회귀로 인해 정신이 초기화가 되지 않더라도 단순한 자살은 나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한다.
고작 40번의 죽음으로 나는 그렇게...
하지만, 아직도 나는 타인의 죽음이 두렵다.
나를 웃게 했던 그리고 울게 했던 그녀들이 죽는 것에 아직도 괴로움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나 정이 많은 새끼였나 싶지만...그녀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은 대부분 나를 위해서였으니.
그것 하나는...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나를 사랑해 죽는 그녀들의 죽음이 더는 괴롭거나 두렵지 않게 되었다면... 반복되는 죽음으로 결국 최소한의 인간성까지 상실해버린 것이리라.
"으으...읏..."
그녀가 허리를 들어 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고, 금세 침대에 털썩 내려앉아 마치 몸 전체가 바이브레이터가 된 것처럼 주기적인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저 배에 손을 올리고 살며시 쓰다듬기만을 했을 뿐이었지만, 너무나도 연속된 쾌락에 몸이 민감해진 것인지 겨우 배를 쓰다듬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의 배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살며시 떼자 그녀의 몸이 점차 안정되었다.
"자?"
"......"
"대답 안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거야"
거짓말이다.
애초에 이제 고추가 서지 않는다.
잠은...안자도 되겠지만. 나는 그녀와 같은 뱀파이어가 아니니 식사와 휴식은 필요하다.
그녀가 이렇게 기절해있는 동안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목욕이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쓰러져 자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히읏..."
내 살갗이 닿자마자 그녀의 쾌감 섞인 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지만, 그런데도 눈을 뜨지 않는다.
잠을 깨워가면서 괴롭히고 싶을 정도로 사디스트는 아니지만...
이대로 두고 가면 깨어났을 때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내가 어디를 가던 샤를은 무조건 데려가야 한다.
나는 샤를을 가지고 싶다.
디아나의 경우에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지만, 그녀는 내가 없으면 망가져 버려 결국 죽음에 이르기에 억지로 옆에 두려 한 것이지만, 샤를은...오롯이 나를 독점해야만 할 것이다.
당장, 그녀에게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한번 물어본다면, 아마 좋은 대답은 못 들을 테니...
좋은 대답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그녀를 완전히 맛이 가게 만들고 싶다.
샤를을 안은 채 방 밖으로 나오자 한쪽에 익숙한 인상의 여자가 나를 보고 배꼽 인사를 하고 있었다.
"너는..."
"처음 뵙겠습니다. 부군께서 이곳에 있는 동안 시중을 들 메이드. 강유리입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목숨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뱀파이어.
서양인을 떠올리는 창백한 피부와는 어울리지 않게 동양적인 외모.
꽤 옛날 샤를의 방을 나왔을 때 봤던 여자였다.
무미건조한 얼굴과 목소리가 너무 인상 깊어 기억에 남는다.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인격을 상실한다는 설정은 없지만...
샤를의 특성이 걸린다.
프리시의 그림자. 사라의 괴력. 엘리린의 영혼. 에아의 불사와 같이 샤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지배였다.
세뇌와 최면과 같이 타인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힘.
샤를이 이 여자의 뇌를 싹 밀어버렸을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예전에는 분명 이름을 잊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혹시 씻으실 장소를 찾으시는 겁니까?"
과민반응하는 거겠지.
고추에서 물을 너무 뺀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잠을 청하고 싶긴 하지만...
"으흐흑..."
"안내해줘"
추운 것일까.
내 품에 안긴 샤를이 가슴께로 얼굴을 더욱 파묻는 것에 나는 몰려오던 잠을 애써 참으며 앞서서 안내하는 메이드의 뒤를 따랐다.
"여긴 어때. 살만해?"
그녀의 성이 워낙 넓다 보니, 샤를의 방에서 욕실까지 꽤 거리가 되었고 마냥 걷기만 하면 잠을 이기지 못해 쓰러질 것 같아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앞서가는 메이드의 뒷머리를 꽤 오래 바라봤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 들려?"
"...네"
"안 들린다는 거야? 아니면 살만하다는 거야?"
맨발인 나와는 다르게 메이드 차림의 여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복도에 '또각또각' 소리만이 울릴 뿐.
내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야, 너 사람 무시..."
"부군, 이제야 끝난...여왕님은 왜...거, 참 천이라도 덮어주지. 아무리 이 성안에 여자만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여왕님이신데 그런 몰골로 노출쇼를 했다는 걸 아시는 날에는...하..."
내 말을 끊으며 들려오는 사라의 목소리에 내 말이 끊기긴 했지만,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변한 것은 아니었기에 사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무슨일 있소?"
"강유리라고 했지? 너 뭐냐? 고개 들고 나 좀 봐봐"
화를 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잠기운이 자꾸 올라와 짜증이 섞인톤으로 말을 내뱉어버렸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은 내 말이 잘 들리나 보네? 조금 전에는 왜 내 말 무시했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가 아니라. 왜 그랬냐고 물어본 거잖아. 한국말 못... 그냥 대답이나 해"
유리라는 이름의 뱀파이어가 살며시 사라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 입에서 나오려 할 때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마치,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짜증이라는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 자체가 되지도 않는 갑질 같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도 되네. 아니면, 내가 죽이길 바라는 것이오?"
누군가를 죽인다는 말이 참 쉽게 나온다.
하기야. 애초에 내가 쓴 소설은 중세를 배경으로 했으니, 그녀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비슷하다는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데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됐으니까. 너는 내가 씻고 올 동안 먹을 밥이나 챙겨놔. 나왔을 때 바로 식사할 거니까"
어차피 이 성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니 욕실을 못 찾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걸어가다 중간에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싶어 안내하라 한 것이기에 나는 식사 준비를 시켜놓고 곧장 욕실이 있는 방향으로 샤를을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사라의 발걸음 소리에 입을 열었다.
"사라 혹시 여기서 일하는 사람...아니, 뱀파이어들은 전부 거짓말 못 하게 돼 있어?"
"알고 있었소?"
"그건 아니긴 한데...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그저 이곳이 살만하냐는 물음이었다.
얼마나 이곳이 좇같으면, 대답 자체를 안 한 것일까.
이곳은 그녀와 같은 여자의 목숨을 개미 목숨처럼 취급하는 곳임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하긴, 사실대로 여기 좇같아서 한시라도 탈출하고 싶다고 대답했으면, 그것도 문제긴 했다.
내가 안고 있는 샤를이 혹여 들을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라와 같이 엿듣는 이도 있을지 모르니.
샤를이 이런 상태일 때 한번 바깥으로 나가 부산의 상황을 구경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예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사라.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동행인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는가"
"여기 샤를 성 아니야? 대체 위험할 게 뭐가 있는데?"
샤를이나 나나 옷을 전부 벗은 알몸인 상태였기에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욕실 안까지 들어오려는 것인지 내 등 뒤에 사라가 바짝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내가 오지랖 부리는 거요"
"퍽이나 네가 오지랖 부리겠다."
"거, 나도 나름 부군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네만"
표정에 나 숨기는 것이 많소. 라고 적혀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거짓말을 할 거면 입에 침이라도 발라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내가 설정했다고는 하지만, 참 거짓말을 못 하는 여자다.
사라는 늘 직설적으로 속내를 숨기는 것을 혐오하는 캐릭터였는데.
이렇게 이런 평범한 대화에 거짓을 섞는 것을 보니 그녀가 무엇인가 숨기려 한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마구 샘솟는다.
"내가 도망칠 거라 의심하는 거지? 안 도망치니까. 좀 적당히 해"
"...그러면...뭐, 따라 들어가지는 않으리다"
"감시가 아니라 너도 목욕하고 싶었던 거라면 들어와도 되고"
"...밖에서 기다리겠소"
3p를 할 생각은 아니지만, 누가 지켜보는 장소에서 샤를과 섹스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긴 했는데...아깝네.
그런 생각을 하며 뭉게뭉게 김이 올라오는 탕으로 몸을 움직였다.
따끈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샤를을 옆자리에 앉히자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과 함께 눈을 저절로 감긴다.
"으음...여긴..."
"깼어?"
"자기야...나 왜 여기있어? 나 분명히 자기랑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쾌락에 몸을 맡겼던 그녀가 깨어났기에 애써 잠을 이겨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쾌락에 젖은 나머지 얼굴이 풀려있던 아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예쁜 얼굴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샤를을 다시금 마주하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마음을 다시 다 잡을 필요가 있다.
"그것보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어땠어?"
"무슨...말을 하는 거야?"
"기분 좋았어?"
"......"
내 말에 점차 그녀의 순진무구하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해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악물고 기억 안 나는 척 하지 말고, 네가 기억 안 나는 척 해도 내 기억에는 또렷하게 남아있거든? 우힛 에헥하던 우리 여왕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게..."
"...그만 놀려. 나 진짜 화났으니까"
"미안"
"알면 됐어"
은인에게 도리어 죄를 저지른 배은망덕한 이가 어찌 또다시 은인을 놀리겠는가.
나에게 호의를 줬던 상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것에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그런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금수만도 못한 인간일 것이다.
"나, 졸려. 나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자기는 천천히 씻고...꺄악!"
그리고 나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탕에서 나가려고 하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아 양손으로 가슴을 붙잡았다.
맨들맨들한 피부와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나를 잠에서 깨게 만든다.
"하지...읏... 마라고! 왜 이러는 건데! 진짜...너무하잖아...으흑..."
"싫으면 내 손을 치우면 되는 거 아니야? 말로만 거부하는 걸 보니 너도 아직 부족한 거 맞지?"
"흐읏...자기야...부탁이야...진짜...부탁할게...이따가 하면 안 될까?"
"이제부터 나한테 존댓말 쓰라고 하지 않았어? 말 안 듣네?"
아까 이해하지 못할 옹알이를 하긴 했지만, 한번 기절했다. 깨어나니 리셋이라도 된 듯 곧바로 반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 아예 처음부터 다시 교육해야겠다.
"너..."
"일어나자마자 날 묶었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굳이 안 할걸 보면. 또 안기고 싶었던 거잖아"
"...아,아니야..."
손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을 끝내고, 위치를 옮겨 양쪽 꼭지를 살며시 매만진다.
"...흐응...하지마...나...이상해진단 말이야. 그렇게 안 해도...읏...조금 천천히...꺅"
짝.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내뱉는 그녀를 보다 못한 나머지 양손을 가슴에서 떼고 흰 엉덩이를 떼렷다.
우리가 있는 장소가 욕탕 안이다 보니 찰진 소리가 꽤 음란하게 울린다.
"지금... 나 때린 거야?"
내가 때렸다는 것에 놀란 것일까?
그녀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채 나를 바라봤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짝.
"자기야...읏...아,알았어! 알았어요! 때리지...읏"
아픈 건 아닐 텐데...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잘 알 수 없어서 다시 한번 때린 것이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또 때렸다.
"화내지 마..."
화내는 건 아니지만...
수면을 이겨내기 위해 표정을 찡그린 탓인지 그녀는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나 보다.
"응? 자기야...꺅! 아,알았어... 자기말대로 할 테니까...이제...화풀어...응?"
애가 탄 눈을 하는 샤를을 보니 오해를 풀기 위해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제가 매일같이 말하던 엉덩이 팡팡이 이렇게 효과가 좋은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사용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