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LEVEL 5 (9)
샤를의 입에서 라일라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예전에 봤을 때에도 그다지...
[그래, 너. 그렇지 않아도 너랑 한번 이렇게 이야기해보고 싶긴 했는데, 이렇게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자기를 상처입히지는 못해도 저 여자는 죽일 수 있어]
[눈꼴 시린 데, 진짜 그 여자 죽여버리면 안 돼?]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예전 라일라를 용서하는 데 샤를의 도움이 무척 컸기에 둘이 사이가 좋을 거라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역시 똑같잖아...거짓말쟁이]
며칠 전 들었던 그녀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돈다.
나는 이 말을 예전에도 한번 들은 적이 있다.
사지가 잘리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라일라를 차마 두고 보지 못해 회귀를 결정했을 때.
샤를은 나에게 저 말을 하며, 라일라를 죽였다.
그때 샤를은 속으로 내가 라일라를 버리는 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코오..."
귀여운 콧소리를 내며 잠을 청하고 있는 샤를을 가만히 지켜보던 중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가여워 바닥에 있는 이불을 주워 그녀에게 가져간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마냥 이렇게 그녀의 나신을 감상하고 싶긴 하지만, 기절한 여자에게 이불 하나 덮어주지 않을 정도로 양심 없는 새끼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걸로 엿새.
처음 마음먹었을 당시에는 정신을 놓을 것 같다 싶으면 곧장 자살해서 정신을 말끔히 하려 했었지만, 의외로 엿새 동안 단 한숨도 잠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앉아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꽤 오래전 봤던 인터넷 잡지식을 떠올려본다.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 기네스에 올랐던 사람은 최장 11일을 버텼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는 6일 만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도 죽었던 탓일까.
인간의 수면욕을 오롯이 정신력만으로 이겨내고 있다.
그렇게 샤를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중 슬슬 씻을까 싶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읏"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그녀의 송곳니에 깨물렸다.
장난으로 깨무는 것이 아닌 꿈속에서 식사라도 하는 것인지 피가 나올 정도로 송곳니를 박아넣은 것이 느껴진다.
"쮸웁..."
당장이라도 깨워 기절하기 전 박아넣었던 위계질서를 다시 한번 깨우쳐줄까 했지만, 어미 젖을 먹는 아이와 같이 손가락을 쪽쪽 빠는 샤를의 모습에 고통을 인내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마냥 손가락만 빨고 있는 모습이 다시 한번 소유욕을 자극한다.
가지고 싶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내 것으로 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샤를은 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라일라는 전혀 아니다.
내가 없으면 라일라는 확실하게 망가진다.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다.
"적당히 빨고 빼라"
천천히 그녀의 입안에 들어 있는 손가락을 빼내려고 해봤지만, 이제는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서 혈액을 갈취하는 샤를의 모습에 혹여 깨어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어 입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츕...츕..."
아닌가?
꿈결에 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계속 빨리다가는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몰랐기에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바람을 불었다.
"으...에..."
귀에 바람 한번 분 것만으로 그녀는 몸을 떨며 물고 있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수면 중 절정에 이르는 모습이 너무 야한 나머지 수면 절정에 재미가 들릴 것 같아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6일 동안 그렇게나 가지고 놀았으니 자고 있을 때만큼은 푹 쉬어야 내일도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래도 자고 있을 때 결정한 것은 어떤 기분인지 조금 궁금하니 나중에 수면 강간의 미수가 있는 라일라를 통해 시험해봐야겠다.
밖으로 나오니 매일같이 보던 메이드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배고프니까. 식사 먼저 준비해 줘."
"죄송합니다. 부군께서 언제 나오실지 몰라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당장 준비하라 이를 테니..."
"어"
늘 똑같은 기계와 같은 목소리 톤과 멘트에 조금 질린 나머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진짜 세뇌라도 당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식당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바깥이 훤히 보이는 창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노을이 지기에는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도시의 풍경은 꽤 그림이 된다.
"오늘 메뉴는 뭐야?"
"......"
이 여자는 무시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일까?
직업정신이 투철하지 못한 것에 조금 화가 날 것 같다.
강제긴 해도 메이드가 된 이상 손님 접대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게 해야 될 것 아닌가.
마치, 우리 집 메이드 만큼이나 직업 정신이...
"너..."
"네, 무슨 일인가요?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시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니...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따라...오기나...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무미건조한 얼굴에 있는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이곳에 오기 전 히로인들을 쉽게 떨어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엘리제만큼은 절대로 떨어트려 놓기 힘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아무리 그녀가 몸을 숨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하더라도, 샤를의 구역. 그것도 그녀의 수발을 드는 메이드를 연기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
"주인님?"
이제 숨길 생각조차 안 한다.
조금 예쁜 동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엘리제 특유의 사람 약 올리는 듯한 저 미소를 보니 눈앞에 여자가 엘리제 본인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알게 해주었다.
"왜...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분명..."
"제가 있을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주인님의 옆자리뿐이랍니다"
하여간 존나 말 안 들어요.
"하...됐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이제 하루 남았기도 하니, 대충 안 들키게 잘 하고 있기나 해"
"주인님은 이곳에 있는 동안 즐거우셨어요?"
무시하고 식당으로 걷던 도중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살짝 고개를 돌려 자칭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즐거웠냐고 물어본다면...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하지만 요 며칠간 나만 재밌는 휴가를 보내긴 했다.
"불길하게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요"
"...별로 재미없었는데?"
"주인님"
"뭐, 왜! 또 무슨 짓 하려고!"
불길하다.
그녀는 내가 안정과 안전을 느낄 때마다 매번 수작질을 벌였기에 더욱 불길하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나는 샤를의 방 안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고, 가장 안전한 샤를의 방은 저 자칭 메이드를 지나쳐야만 갈 수 있었기에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주저한다.
"어머, 무슨 짓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제가 주인님한테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어요"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말하는 게 어때?"
그녀가 나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경계를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것일까.
이 똑똑한 여자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정체를 들어낼 리가 없다.
"저는 늘 그랬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러니 절 원망하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 거에요!"
"구라도 적당히 해야. 귀엽게 넘어가지. 이제는 그냥 혐오스러우니까 그만해"
"주인님. 자꾸 나쁜 말 하면 저 상처받을지 몰라요"
"지랄"
고작 이 정도 말로 상처받았으면, 나는 이미 전신이 난도질당해 골백번은 과다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진짠데... 저는 정말 주인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주인님에게 무엇인가 한 여자가 있다면, 그건 제가 아닌 주인님의 무수히 많은 여자 중 한 명이겠죠"
대체 왜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주는 것일까.
나는 애초에 그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인기는커녕 여자와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눴던 새끼다.
외모는 둘째치고 말재주도 없을뿐더러 늘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인 나머지 친구도 없던 아싸새끼였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으니. 내가 도망쳐도 잡지 마라"
"물론이죠. 설마 제가 주인님에게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앗! 그렇다고 우리 귀엽고 깜찍한 작은 주인님을 안 건든다는 말은 아니긴 한데... 음... 그래도, 주인님을 기절시킨다던가. 납치하지는 않을 거에요"
웃기지도 않는 장난을 치는 말들을 전부 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를 지나쳐 샤를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빠르게 땅을 박찼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그녀를 지나칠 때까지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고, 내 몸은 점차 아까 나왔던 문과 가까워졌다.
"저는 아이들이 주인님에게 미움받는 걸 전부 지켜보고 싶은걸요"
쿵.
달리던 중 갑작스레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달리던 육체가 물리 법칙에 의해 바닥을 나뒹굴어 의도치 않게 목표했던 문에 굴러서 도착할 수 있었지만, 시야가 흐릿해진다.
목덜미를 가격 당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엿새 동안 잠을 못 자서 그런 것인지는 애매모호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기절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고 있기에 감기는 눈을 애써 부여잡는다.
그런데도 무거운 눈꺼풀에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했고, 그 좁아지는 시야 사이로 엘리제가 아닌 다른 이의 형체가 보인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던 여자.
아니...여자아이.
남아있는 히로인들 중 드래곤 하이네스 다음으로 가장 이곳에서는 안되는 히로인이 싸늘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피부와 기다란 귀를 가진 백색의 단발머리를 흩날리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