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LEVEL 5 (10)
[주인님은 이곳에 있는 동안 즐거우셨어요?]
왠지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내 모든 이야기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엘리제를 통해 진행되어왔다.
확신은 없지만, 심증은 차고도 넘친다.
그렇다고 그녀를 죽이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커다란 카드를 가지고 있다.
애초에 그녀는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레벨업이라는 개 같은 것과 함께 개꿈을 꾼 후로 엘리제를 적대하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를 죽이고 세계를 멸망으로 이끈 그조차도 엘리제만큼은 죽이지 못했는데.
그보다 약한 라일라나 벨라트릭스의 힘으로 엘리제를 죽일 수 있을까?
엘리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녀의 장난감이 되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은 이제 진저리난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내 앞에 무릎 꿇리고 잘못했다고 빌게 할 것이다.
죽이는 것도 아깝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낱낱이 고하게 만든 후 외딴곳에 처박아 생명만을 연장하며 매일 같이 비웃어줄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천천히 눈을 뜬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상은 대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이번에는 어떤 고문을 당할까.
오늘은 어떤 식으로 죽게 될까.
다가올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눈을 떴지만, 눈을 자극하는 밝은 빛에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일어났어요?"
"...누구?"
처음 듣는 목소리.
찌푸린 눈 사이로 보이는 인상은 기억이 끊기기 전에 봤던 쿠레아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세연아! 이 사람 깨어났어!"
"그 변태 새끼 일어난걸 왜 보고하는데?"
"그래도 네가 주워왔잖아. 네가 살린 사람이니까. 궁금해할 것 같아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하긴 6일 만에 잠을 자는 것이니만큼 생생한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퀴퀴한 냄새와 눈동자를 찌르는 전등 빛은 그저 내 뇌가 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할...
"야, 변태"
설마 나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마주한 목소리의 주인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
"왜, 대답을 안 해? 너 벙어리야?"
히로인들이 나타난 후부터 나를 부르는 수많은 호칭이 있었지만, 변태와 벙어리는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거기다 뱀파이어.
"여긴 어디야? 오늘이 몇월 며칠이지?"
"여기가... 어? 그러니까 9월..."
"세연아!"
뱀파이어 여고생이 내 말에 대답해주려던 중 맨 처음 깨어날 때 봤던 여자가 그녀를 붙잡고 귓가에 대고 무엇인가 말했다.
속삭이고 싶었던 것 같지만, 그리 거리가 머지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들려온다.
'기.선.제.압'
"내가 먼저 물어볼 거니까. 아저씨는 묻는 말에나 답해요!"
"흠흠..."
"더 해야 해? 그렇지만 언니. 이 아저씨 바보 같아서 굳이 이런 걸 할 필요가..."
둘이서 개그라도 하는 것일까.
"아씨, 세연아 잠깐 따라와 봐. 저기 그쪽은 잠깐 여기 있어요. 금방 이야기하고 올 테니. 도망칠 생각하지 마세요!"
30대...아니, 좋게 보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자기 멋대로 날 쏘아붙이고는 세연이라는 이름의 뱀파이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이 나가고 조용해진 방안에서 멍하니 두 사람이 나간 문을 바라본다.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현재 벌어지는 상황이 무척이나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몸이 묶여있는 것도 아니고, 팔이나 다리 한 짝이 날아가 있거나 자다가 죽은 것도 아니다.
이제 깨어난 지 10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뭔가 시작이 좋다.
대충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이리저리 난장판이 돼 있는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방안...아니, 카운터가 있는 것을 보니 어떠한 매장으로 보인다.
옷걸이들을 보니 옷을 팔던 곳처럼 보였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더러운 옷가지들은 이곳이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거기다 퀴퀴한 냄새.
역겨운 냄새이긴 하지만, 옛날 맡아본 적 있는 냄새였다.
어디서 맡았더라?
마치...땀... 아...
군대에서 맡아본 냄새다.
완전 작전 중 물탱크가 고장 나 2주 이상을 씻지 못했을 당시. 생활관에 들어갈 때마다 맡던 그립고 역겨운 냄새다.
천천히 일어나 코를 막고 방안을 둘러보던 중 문 쪽에서 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네가 기선제압을 해야 된다니까? 또, 저번처럼 당하고 살 거 아니잖아'
'언니가 하면 안 돼요? 저 진짜 못하겠어요... 모르는 사람한테 막말하는 것만으로 엄청 힘든데...'
'내가 흡혈귀가 됐으면 당연히 내가 했겠지. 그런데, 아니잖아. 세연아. 잘 들어. 아까처럼 무시당하면 그냥 한 대 때려'
'...때...려요? 아,안되요! 자,잘못 때리면 죽을지도 몰라요. 아직 힘 조절이 안 되는데...'
내 귀가 좋아진 것일까.
아니면, 이 여자들이 하도 멍청해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일까.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한쪽에 놓인 야구 배트가 눈에 들어와 살며시 그것을 잡았다.
야구 빠따가 무척 단단한 게 마음에 든다.
'...최대한 해봐. 더는 힘든 거 알잖아. 나...너무 힘들어. 저번처럼 또 그런 짓을 당하면 나... 못 버틸 것 같은걸...'
'언니...그냥 저 사람 내쫓고 다른 사람...아니, 여자로 데리고 올게요'
'괜찮겠어? 이제 버티기 힘들다고 했잖아'
'참아볼게요. 저보다 언니가 더 중요해요. 저 언니 없으면 이제...'
'세연아... 일단 들어가서 계획대로 하자 그다음에...'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낌새에 천천히 문에서 떨어졌다.
"야, 누가 멋대로 돌아다니래? 죽...을...그건 왜... 들고 계세요?"
"내가 야구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오랜만에 배트 한 번 휘둘러볼까 싶어서 들어봤어."
그냥 하는 소리라면 모를까.
기본적으로 인간의 완력에 3배에 달한다고 설정한 뱀파이어가 때리겠다고 뒤에서 모략을 하고 있는데 누가 안 쫄까.
쫄긴했어도, 그다지 떨리지는 않는다.
이 여자들이 너무 멍청해서일까?
아니면...
"아저씨. 그거 내려놓으세...내려놔"
눈앞에 뱀파이어가 내 몫까지 떨고 있어서일까?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나에게 야구 배트를 내려놓으라 명령하는 여고생의 모습을 보니 김이 빠진다.
"아저씨. 조금 아플 거에요"
띵.
대충 배트를 내려놓고 이야기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에 야구 배트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고, 야구 배트가 바닥을 굴렀다.
내가 전의를 상실한 것을 보지 못한 것일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온다.
주먹을 내지르기 위해 손을 뒤로 넘기며 달려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할지 아니면 막을지를 고민한다.
예전 레벨 1로 올랐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레벨업을 하면 그래도 일반인을 기준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긴 했다.
다만, 내 주변에 있는 히로인들이 전부 괴물같이 강하다 보니 성장한다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었지만...
겁먹은 여고생 뱀파이어의 주먹을 피하는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으에에엣..."
피할 필요도 없었네...
달려오던 중 실수로 배트를 밟은 나머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자빠지는 뱀파이어 여고생의 모습.
"꺅! 세연아 괜찮아?"
"흐에...언니이..."
"코피! 휴,휴지 여깄어!"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이건 샤를의 이벤트인가?
무료한 나를 웃기기 위해 개그맨을 영입해 준비해 놓은 것들일까?
쿠레아가 내 눈앞에 나온 이상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둘이서 하는 꼴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지금 웃으시는 거에요?"
"어"
코부터 넘어진 것을 보니 무척 아플 것 같긴 하지만, 웃긴 걸 어쩌겠는가.
여자는 뱀파이어의 목을 잡고 턱을 젖히도록 만든 후 코를 붙잡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쪽. 더는 필요 없으니 당장 여기서 꺼지세요"
"나가기야 하겠지만, 물어볼 게 있어서. 몇 가지 좀 물어보고 나갈게"
"...이런 사람인 줄 미리 알았으면 길바닥에서 물어뜯기게 놔뒀어야 했는데"
"물어뜯겨?"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어요?"
"아니 그것보다..."
"세연이가 그쪽 구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그쪽이 무슨 사정으로 거기 버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연이 아니었으면 그쪽 무조건 죽었어요. 그런 생명의 은인한테 무기를 들이밀고, 거기다가 코피를..."
"코피는 내가 한 게 아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참, 이 여자 제멋대로다.
말을 들어보니, 저 애가 길바닥에 던져진 나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날 공격하길래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데?"
"...아무리 세상이 이렇게 됐어도 예의 없이 반말하지 마시죠. 제가 더 나이 많을 것 같은데"
...반말.
그러고보니 옛날 라일라가 존댓말을 썼다는 이유로 나를 죽일 때부터 일부러 반말을 쓰기 시작었는데.
이제는 남을 하대하는 것이 완전히 입에 붙어버린 것 같다.
"그거야 내 맘이지. 어찌 되었든 쉽게 쉽게 가자. 누가 날 공격한다는 건데?"
눈빛만으로 쌍욕을 하는 여자는 곧이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한테 죽는다 말인 거 뻔히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건데"
"뱀파이어? 아...그럼 여기 부산이야?"
아직 샤를의 영역이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전과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빠르게 샤를에게 돌아갈 수 있는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든다.
"부산이라니 무슨 소리야...에요?"
"...어?"
"여긴 울산인데... 혹시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무슨 개소리를... 울산?"
[울산광역시에 좀비가 나타나 사람을 물고 있다는 속보입니다. 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부산에 전부 동원된 지금 울산의 피해자가 확산하는 것을 막을 수단이 전무한 상황이며. 현재 인근 지역을 봉쇄해 천천히 시민들을 구출해 나가는 방향으로 정부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는 울산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아직도 울산에 좀비 있어? 생각해보니 부산이랑 울산이랑 엄청 가깝잖아]
[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거야?]
[아니, 그냥 혹시나 아직 있으면, 세트린느한테 그만하라고 말해두려고]
[아니, 아무 문제 없어. 자기야. 이제 도착했으니까. 내리자]
대화를 끊으며 눈을 피했던 샤를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른 지역은 어떻게 됐나요? 구출하기로 했던 군대는 아직인가요? 며칠 전부터 더는 헬기가 오지 않는데... 저기 말 좀..."
"아니, 그건 모르겠고, 뱀파이어가 공격한다니? 뉴스에서는 울산은 좀비에 점령당했다고 했잖아"
좀비에게 점령당했다 했기에 디아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적당히 샤를과 놀다가 디아나를 시켜 울산을 정리하라고 말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좀비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
"저도 처음에는... 좀비라고 생각했어요."
내 물음에 대답해준 사람은 세연이라 불리는 뱀파이어 여자였다.
"사람을 물어 피를 빨고, 물리는 순간 똑같이 되고 또, 쉽게 죽지 않고 태양에 취약한 괴물. 그 괴물을 보자마자 친구들이 전부 좀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바보같이 죽이려고 했는데...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 같다고 말하면서 죽이려고... 그런데 아니에요. 영화에서 보던 좀비와는 다르게... 엄청 빠르고... 힘이 세서... 다들 물려버렸어요"
무엇인가 이상하다.
뱀파이어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머리가 아파진다.
"친구들이... 전부 눈앞에서... 분명히 저도 물렸는데... 몇 명은 저처럼 인격이 남아있는 애도 있었는데... 오히려 더 잔인하게 물어 뜯겼어요. 배에 있는 빨간 것들이 막...전부...전부..."
"세연아. 이제 그만해"
"언니..."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더는 기억 안 해도 돼"
"인격이라니? 그게 대체... 여기 있는 뱀파이어들은 인격이 없다는 말..."
"그만 좀 하세요! 애 힘든 거 안보여요? 당신이야말로 어디서 왔길래 모르는 건데요! 아무리 멀리서 왔다고 해도 이제 벌써 두 달이에요. 그 괴물들한테서 도망쳐다닌 지...벌써...두달... 모를 리가 없잖아요... 놀리는 거라면...이제 그만해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려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더는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좀비와 뱀파이어는 꽤 흡사한 존재다.
심장이 뛰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물리는 것으로 전염까지 된다.
햇빛을 피하는 것도 비슷하며, 둘 다 쉽게 죽지 않는다.
인간의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와 살점을 탐하는 좀비.
핏기없는 피부를 가진 뱀파이어와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좀비
이성을...잃은 뱀파이어는 좀비처럼 보이지 않을까?
만약 옛날 서울을 폐허로 만들었던 것이 좀비가 아닌 개체마다 월등히 힘이 차이가 나는 뱀파이어라고 한다면...
쏟아지는 정보량에 머리가 아파지지만,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샤를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