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LEVEL 5 (11) (69/87)



〈 69화 〉LEVEL 5 (11)

대충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들은 이후 머리가 멍해져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싸  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될 즈음  여자의 속닥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피는 이제 괜찮아? 아직은 배 안 고프지?"

- 네. 아직 괜찮아요. 그런데 언니..."

- 알아. 저놈은 일단 밖으로 내보내고 다른 사람으로 찾아보자"

또박또박  들린다.
이 여자들이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귀가 좋아진 건가 보다.

대로에 발가벗고 쓰러져있는걸 봤을 때. 무시하고 그냥 갔어야 했어"

- 그래도...언니 그대로 두면 죽을 걸 아는데. 외면하고 가버리면. 그 새끼들이랑 다르게 없잖아요."

내가 옷을 벗고 있다고 눈치를 줄 사람이 없었기에 샤를의 성에서는 자주 태어난 본연의 모습을 한  돌아다니곤 했다.
그래서, 납치 했을 때에도 아무런 옷도 입지 않았겠지만...

"하아..."

발가벗은 채로 도시 대로변에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진다.

"아저씨... 이제 더 궁금하신 게 없으면 여기서 나가주실..."

세연아. 빨리 여기서 꺼져주시라고 말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폭력을 행사하는 짐승만도 못한 새끼는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역겹다고 빨리 말해

어,언니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너무   같은데... 그리고, 이제 곧 해가 져서 내보내면, 분명히 죽을 거에요. 그냥...

- 아니, 오늘 방금 처음 본 사람인데 왜 정을 주고... 하아... 아니다. 그냥 내가 할게.

"저기요. 저  말 있어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하는 이름 모를 여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며칠 동안 작정하고 허리만 놀린 탓일까.
작은 가슴이 무척이나 눈에 띈다.

"양심이 있으면, 나가주세요.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쪽 옷 입혀준 사람이 저라는 거 아시나요?"

"...그래서? 혹시 내가 입혀달라고 부탁했어?"

"...부탁이라니... 당신이 기절하는 동안 자꾸 왔다 갔다 하던 그 흉물스러운  때문에 저희가 기분이 얼마나 나빴는데!"

흉물스럽다니... 우리 귀염둥이에게 말을 너무 심하게 하네?

"그럼 안 보면 되잖아. 그리고, 내가 그쪽한테 구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냥, 길바닥에 쓰러져있게 두지 왜 여기로 데려온 거야? 이거 엄연한 납치야"

"...네?"

"하... 그리고, 멋대로 날 납치해 놓고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하면, 내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나가야 해? 내가 왜?"

손가락 까딱이는 것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히로인도 아닌 주제에 어디서 감히 명령이야.
내가 요즘 당하고만 사니까 이제 듣도 보도 못한 것들까지 나를 무시하려 든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뭐, 이런 년이 다 있어?"

사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히로인들은 전부 극단적으로 순종적이거나 극단적으로 강압적이다 보니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나오는 반응들이라고 해봐야 모두 비슷비슷했다.

내 입을 막아버리거나 아니면 죄송하다고 빌거나.
아니면. 엘리제처럼 개 같은 상황을 만들거나.

그런데 이 여자는 분노에 차올라 주먹을 꽉 쥐고 나를 노려보며 눈으로 쌍욕을 내뱉고 있다.
분해 죽으려고 하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빨리 여기서 꺼져"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는 거라고 하던데. 그쪽이 나가지?"

"원래 여기 우리 자리였거든? 빨리 나가아!!"

"어,언니 너무 목소리가 커요. 조금 조용..."

"아니! 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너는 화 안나?"

내 뺨이라도 때리려는 것인지 한 손을 높이 들고 나에게 오려고 하는 여자를 애써 붙잡고 있는 뱀파이어 여고생의 모습.
적당히 데리고 놀았으니 이제 돌아가 볼까.

벨라트릭스와 붙을 때 이후로 이제 일주일만인가?
오랜만에 자살할 생각에 마음이 들뜨는 것인지 심장 박동수가 무척 빨라진다.

심호흡한 뒤  손을 들어 여유롭게 손가락을 튕긴다.

딱.

"어?"

딱. 따딱. 딱. 따닥. 다닥.

...어?
어째서인지 손가락을  번이나 튕겼음에도 시야가 변하지 않는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잘 작동 되었는데...

편하게 죽기 위해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심장에 박아놓은 마법이 어째서인지 작동되지 않는다.
벨라와의 싸움에서 이것을 이용해 수십번을 편하게 회귀해왔었는데...

"아저씨 지금 뭐 하세요?"

벌써 고장이  것일까?
나중에 라일라에게 심장에 박힌 마법을 수리할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을 살폈다.

"지금 뭐 찾는 거에요?"

"칼 같은 날붙이. 뭐, 가지고 있는 거 없어?"

"...그건 왜 찾으시는 건데요?"

죽으려고.
사실대로 말해주면 괜한 오해를  것 같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샤를의 입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자살하기 쉬운 도구를 찾는다.
옷가게를 뒤적이던 도중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문을 열고서 나가려고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 죽여. 그러니까 굳이 안 도망가도 돼"

"그렇게 안심시킨 뒤에 죽이시려고요?"

"안 죽인다니까. 애초에 내가... 잠깐 나가지 말고..."

내가 무해한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사람은  해명도 듣지 않은 채 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시 잡아 올까 싶었지만, 어차피 두 번 볼 사이도 아니기도 하고 회귀하면 전부 없었던 일이 되기에 곧장 신경을 끄고 자살하기 쉬운 도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뒤적거렸다.

아무리 찾아도 칼 같은 건 보이지 않아 밖으로 나가볼까 했지만, 곧이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질식사.
옷가지들을 이어 천장에 매단  목을 조여 죽는 방법이 머릿속을 스친다.

존나...아프겠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목숨에 대해 너무 무가치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샤를을 가지기 위해 자살한다는 생각도 그렇고, 이번에는 만나려고 자살한다는 게... 틈만 나면 죽을 생각만 하는 것을 보니 인간으로서의 생존 욕구를 포기해버린 기분이다.

일단 노력은 해보자는 생각에 한쪽에 있는 야구 빠따를 들고 그녀들이 나가버린 문으로 몸을 움직였다.

차를 구한 뒤 운전해서 부산으로 갈까.
아니면, 전화기를 찾아서 벨라트릭스나 라일라에게 연락을 취해볼까.

생각해보니, 죽을 필요가 없어 보이긴 한다.

밖으로 나와보니 해가  있는 것과 함께 보름달이 떠 있어 어느 정도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폐허가 되어버린 거리.

이곳이 울산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건물에 붙어있는 간판 몇몇에 울산이라는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쿠레아는 왜 이곳에 나를 던져놓은 것일까.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

솔직히, 다시는 쿠레아를 보고 싶지 않아서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길을 거닐며 쿠레아에 대한 것을 떠올려본다.

다크 엘프 쿠레아.
암살자이자. 주인공의 딸 포지션에 있던 히로인.

쿠레아의 첫 등장은 꽤 암울한 스토리였다.
마족 침공 바로 다음 장이 쿠레아의 첫 등장이었고, 그녀는 인간들에게 쫓기던 중 주인공에게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애초에 그녀를 쫓기게 한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마족침공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의 파워 인플레이션이 폭발한 덕분에 다크 엘프 군세는 거의 전멸에 이르렀고, 악화한 다크 엘프들은 인간들의 역공으로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다크 엘프라는 이유로 인간에게 쫓기던 쿠레아는 주인공에게 구원아닌 구원을 받아 생명을 연장하고, 그의 비호 아래에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설정 오류.
오류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족의 원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나 할까?
그저 소설 속이기에  수 있었던 억지였다.

그녀의 설정들이 시작부터 억지임을 나도 알고 있기에 쿠레아를 빠르게 퇴장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버렸다.

독자들이쿠레아에게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쿠레아가 몇 화 정도 나오지 않으면 빨리 내놓으라고 하며, 나를 들들 볶았다.

모든 것을 잃고 주인공에게 이것저것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나가는 모습.
거기다 초반의 어둡고 절망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해 귀여운 딸 같은 위치로 자리매김을 하다 보니 독자들은 물론 나까지 쿠레아에 애정이 생겨버렸다.

그것으로 인해 쿠레아는 소설 초중반 부부터 주인공의 딸 포지션을  잡고 완결까지 함께하게 된다.
꾸준히 붙어있기 위해 주인공의 파워인플레이션의 콩고물 설정을 받아먹어가며...마지막까지...

...그래서 나는 쿠레아를 이해할 수 없다.
예전 히로인 집결 사태 때 봤던 모습과 몇 시간 전 나를 기절시킬 때 봤던 쿠레아의 표정.

늘 히로인들의 행동 몸짓 말투 표정을 읽어가며 내가 알고 있는 히로인과 대조시키는 방향으로 그녀들의 생각을 읽어왔지만...
두 번이나 그녀를 봤음에도 그녀의 표정도 목소리도 알지 못한다.

...가지고 있는 정보가 근본부터 틀려먹었으니.
무슨 사고로 나를 이곳에 떨어트려 놓은 것인지 이해할수 없다.

대로를 거닐며 멍하니 쿠레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몸을 숙였다.

- 케에

몸을 숙이자마자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괴음성이 들린다.
마치, 사람이 괴물을 흉내 내는 듯한 목소리.

발을 움직여 등 뒤의 미상 생물체에서 몸을 떨어트린  그것을 마주 본다.

붉은 눈. 창백한 피부. 날카로운 송곳니.
뱀파이어가 확실했다.

초점을 잃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뱀파이어 여고생의 말대로 이지를 상실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일반인에게서 내 몸을 지킬 수단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 벨라트릭스와 붙고 난 이후에 조금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볼까 했었지만, 곧바로 샤를이 나타나는 바람에 무산이 되어버렸기에 아직 감이 잘 안 잡히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훈련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나는 죽고 싶어도 못 죽기도 하고 거기다 실전만 한 훈련도 없다고 하니.
이렇게 아무나  명 붙잡고 샌드백처럼 때리면 훈련보다 훨씬 효율이 높을 것이다.

- 크엑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침을 튀기기며 나에게 달려드는 괴물의 모습을 보며 예전 엘린의 몸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한다.
인간과 비교할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능감.

무엇이든 할  있는 전능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아마 그것이 마나일 것이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그것을 몸에 받아들인다.
내면 관조는 육체적인 근력이나 몸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반사신경. 동체 시력. 피부 그리고 청력과도 같은 감각들이 상승한다.

아까 뱀파이어 여고생의 공격이 느리게 느껴진 것과 두 여자의 대화가 쉽게 들렸던 것도 전부 이것 때문.

피를 빨아먹기 위해 나를 껴안듯이 달려들던 뱀파이어를 여유롭게 피한 뒤 발로 그것을 밀쳤다.

"느려"

바닥에 나자빠지는 뱀파이어 내려다보며 살면서  한번 해보고 싶은 드립 중 하나를 해내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내 상상의 산물이 곧 세계관이었기에 스승이 필요 없어서 편하다.

판테아에서는 주먹을 이용해 바위를 여유롭게 부술 정도로 육체 능력이 향상되었을 때 견습 기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뱀파이어를 보며 아까 들고 왔던 야구 빠따를 강하게 잡았다.

육체를 넘어 쥐고 있는 물건에까지 그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사 혹은 전사로 불리며 견습 기사의 경우에는 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푸른 빛을 내기 시작하는 야구 빠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공은 여기까지 약 6개월이 걸렸다.

히로인들이 나타나고 한 달 하고 24일.
훈련한 적도 없는 내가 이 정도로 여유롭게 마나를 다루는 것을 보니 나는 원래 매우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 크...에에...?

뱀파이어의 머리에 전력으로 몽둥이를 휘두르자 '깡' 소리와 함께 뱀파이어의 목이 비이상적으로 꺾인 후 죽어버렸다.
맥없이 죽는 것을 보니 강해졌다는 것에 실감하지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나는 또 히로인들 사이에서 쭈글모드인채로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게 될 게 분명했다.
내가 천년을 수련해도 벨라트릭스 및 라일라에게는 도저히 비비지를 못할 것이다.

그녀들의 창조주로서 내리는 냉정한 판단이다.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노력  하려고 했는데...

대충 피 묻은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고 부산까지 타고 갈만한 차 혹은 전화기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내면 관조는 가지고 있는 마나를 계속해서 소모하고 거기다 사용하는 만큼 머리도  아프다 보니 각자마다 그릇의 크기만큼 최소화해놓고 지내는 것이 정석이기에 관조를 풀려던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 케에
쿠에
- 키에
꾸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일까.
각양각색의 괴음을 내며 어둠 사이로 보이는 많은 숫자의 붉은 눈.

생각보다 그 숫자가 많아 보인다.
이성은 무섭다고 말하지만, 어째서인지 게임을 하는 듯한 감각이다.

잦은 죽음으로 공포. 두려움과 같은 것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마치, 과거의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치던 과거의 그를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이성과 몸이 따로노는 상황에 맞닥뜨리니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딴 웃기지도 않은 장난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붉은 눈을 향해 한 손을 들어 까닥인다.

"드루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