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LEVEL 5 (12)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조건은 무척 간단하다.
죽을 때까지 피를 빨리는 것.
죽음에 이르는 흡혈을 경험해야만 인간은 비로소 뱀파이어가 된다.
하지만, 내 발밑에 쓰러져있는 수십 개의 뱀파이어들은 무척 이질적이다.
나는 뱀파이어가 이성을 잃는다는 서술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분명한 뱀파이어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똑똑하다.
특히나 초반 한두 마리씩 달려들 때와는 다르게 몇 마리를 때려눕힌 순간 위기감을 느끼고 집단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케에에에
가장 먼저 달려든 뱀파이어를 빠따로 휘둘러 쳐내자마자 등 뒤로 뱀파이어가 달려드는 것이 느껴진다.
야구공을 쳐 내듯 허릿심을 써서 휘두르다 보니 약간의 딜레이가 생겨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고, 곧이어 목덜미에 송곳니가 꽂히는 고통이 느껴졌다.
"읏..."
일주일 만에 느껴보는 격통에 실수로 소리를 내버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먹에 마나를 감싸 등 뒤에서 목을 물고 있는 뱀파이어의 머리에 직통으로 꽂았다.
한 방에 죽지는 않을 거로 생각해 한 번 더 때리려고 했지만, 목을 물고 있던 뱀파이어가 떨어져 나간 것을 확인하고 한 손에 들고 있던 야구 빠따 바로 잡고 주변을 경계한다.
알루미늄으로 된 야구 빠따가 이곳저곳이 찌그러져 있는 것이 눈에 띄지만, 그래도 주먹이나 발보다 훨씬 낫다.
아까 어째서 그렇게 많은 뱀파이어가 곧바로 나타났는지 궁금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니.
아까 내가 죽인 한 마리의 피 냄새를 맡고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한 마리 없앨 때마다 두 마리씩 추가되는 느낌.
내가 쳐낸 머리통만 수십인 것 같은데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관조를 통해 방금 생긴 목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고 싶었지만, 여러 짝을 지어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달려든다.
온몸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빨리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이 약삭빠른 놈들이 내가 도망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다.
영화에서 나오던 빡대가리 좀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지만, 그래도 아직 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히로인들 사이에 끼어 치정 싸움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단순히 내 목숨을 위협하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나는 그것을 이겨내기만 하면 된다.
적도 아군도 불분명한 히로인들을 상대하는 것에 비해 이해하기 너무 쉽다.
잠깐의 휴식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찌그러진 빠따로 쳐낸 후 곧장 등 뒤로 발길질을 한다.
복부를 발로 차서 뒤로 밀려난 뱀파이어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등 뒤에 있던 것이 한 마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악! 이씨발 새끼들이"
알고 있다고는 해도 막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에 양쪽에서 내 팔과 어깨를 물어뜯는 두 마리의 뱀파이어.
배트를 잡지 않은 손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며 두 뱀파이어의 머리통을 때리자 살갗이 떨어져 나가는 격통과 함께 두 마리가 바닥에 눕는다.
빠따를 휘두를 때 생기는 딜레이를 이용해 공격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곧장 빠따를 버린다.
계속 오는 것만 쳐내려고 하면, 결국 지치는 것은 나다.
괴물들 사이로 들어가 난전을 끌어내야 한다.
달려들기 전에 내가 먼저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아간 뒤 한 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다.
옛날 벨라트릭스를 위해 수십번도 죽을 당시 그가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죽였을 때가 떠오른다.
벨라트릭스를 구하기 위해 적 병사 수천 명이 있는 곳을 단신으로 뛰어들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그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강했다.
나는 훈련은커녕 운동도 해본 적 없지만, 가지고 있는 힘은 그날 수천 명의 마족 병사를 뚫었던 그와 별 다를 바가 없으니 나도 할 수 있다.
그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다.
공간이 좁아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것을 미세한 차이로 빗겨내야만 한다.
종일 피할 수는 없으니 피하는 것과 동시에 한 놈씩 보내야 한다.
미약한 전능감.
그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각이 날카롭게 세우기 시작하자. 엘린의 몸에 들어갔을 때처럼 전능감에 휩싸인다.
춤을 추듯 뱀파이어 무리 사이를 누비기 시작한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듯한 기분.
물이 흐르듯 공격을 피하고, 주먹 한 방이 아까와 비교해 말도 안 될 정도로 묵직하다.
근력이 강해 묵직한 것이 아닌. 한방 한방이 전부 자석처럼 급소에 꽂혀 전부 유효타로 적용된다.
마치, 그의 기억 속에 들어간 기분.
나는 묘한 전능감과 해방감에 취해 몸을 맡겼고, 제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전부 정리해버린 것인지 일어서있는 뱀파이어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하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나머지 몸을 숙이자 발밑에 있던 뱀파이어의 눈과 마주친다.
나를 보자마자 부러진 뼈들이 살갗을 뚫고 나오고 있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 케에엑!!!
"씨발, 깜짝이야"
사람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인정이라는 것이 생겨나 주먹질에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인간으로서 한번 죽었던 존재다.
대화가 통하지 않고, 그저 본능에 따름에도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들을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핑계.
이들을 죽일지 죽이지 않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샤를이라는 존재 때문에 나는 이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한다.
애초에 이런 고민하는 것부터가 머릿속에 나사가 하나 두 개 정도 빠진 것이었지만...
그래도, 눈앞에 있는 것은 인간의 시체였다.
살아생전 이곳 한국 혹은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의 시체.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아비일 수 있는 인간의...
그리고... 피해자의 것이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샤를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솔직히 지금도 마찬가지로 샤를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그 마음은 어제보다 무척이나 작아졌다.
샤를을 안고 간다는 것이 이 이성을 잃은 뱀파이어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한 말일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남아있는 알량한 도덕심.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도리어 인간 쪽에서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불사 그리고, 강함 힘.
페널티가 거의 없이 이 두 가지의 것을 준다고 하는데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괴물이 되는 것은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히로인들이 사람을 해치는 것도... 눈 감을 수 있다.
하나하나 다 따지기에는 내 안전과 행복이 더 우선이기에 나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그녀들의 살인을 외면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하지만, 수 백 수 천 만 명의 대량 학살.
그리고...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이런 짓은 근본적으로 혐오감을 느껴버린다.
소설 속에서 서술한 적은 없지만, 대충 왜 이들이 이렇게 됐는지 어느 정도 감은 잡힌다.
이들이 샤를로부터 너무 많이 내려와 버렸기에 이렇게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어버린 것일도 모르겠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최초 샤를 혹은 직속 종자들의 흡혈로 인한 뱀파이어 변이자가 다른 이를 뱀파이어로 만들고 그 뱀파이어가 또 다른 뱀파이어를 만들어 하나의 뱀파이어 군세를 이루는 무한한 진조의 힘.
그것이 희석되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뱀파이어를 전염시키는 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여기까지 이어져 내려와 뱀파이어로써의 힘을 유지 못 할 정도까지 진조의 힘이 희석되었다.
라고 하면, 왜 샤를이 이곳을 방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 크에...에...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는 조각난 뼈가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왔음에도 이제는 더는 자가 치유가 불가능해진 것인지 붉은빛을 내던 눈 점차 흐릿해지는 것을 마냥 바라본다.
샤를이 수백만. 곧 천만에 달하게 될지 모르는 뱀파이어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각양각색의 성격.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으며 흡혈하는 행위 그 자체에 쾌락을 느끼는 뱀파이어들을 전부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에게 세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내 안에 있는 도덕심을 버리고 샤를과 이 괴물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샤를 이외의 모든 뱀파이어를 죽여버릴지.
그것도 아니라면, 미국을 초토화했던 하이네스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샤를도 부정해 버릴지 선택해야만 한다.
차라리 아까 목을 매달고 죽어버린 뒤 샤를에게 해명을 들을 걸 그랬다.
...이걸 눈과 피부로 느끼고 난 후부터 그녀를 다시 마주하는 게 두려워진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해명과 내 가정이 들어맞게 되면 나는 더는 선택을 미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단 한숨 자고 난 뒤에 생각해보자며 아스팔트를 굴러다니고 있는 빠따를 챙기고 몸을 돌렸고,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진기야. 여기 지원 병력 좀 보내주라
저 멀리서 상가 건물 옥상에서 쌍안경을 통해 나를 보며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는 남자의 모습.
무전기를 사용하는 것일까?
하긴, 통신사가 전부 맛이 갔을 테니. 전화기는 아닐 것 같다.
그가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외관상 군인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 뱀파이어 같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씨발, 아무리 봐도 진짜 괴물이다. 죽인 숫자만 100마리가 넘어가.
- 이성 있는 거 맞아?
- 어, 지금...나랑 눈 마주쳤는데. 아직 공격해올 낌세는 없어 보인다. 일단 대치 중이거든? 이쪽으로 몇 명 지원 좀 해줘.
- 죽이려고?
- 아니, 이야기 좀 해보려고. 혼자서 이 정도 숫자는 보스도 불가능해. 무조건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 해. 아니면 죽이던가. 반구 쪽에서 저놈 데리고 가는 순간 백화점 내어주는 건 둘째치고 그냥 끝장이야.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인지.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모습.
그렇지 않아도 동물이건 사람이건 움직이는 생명체를 때려죽인 것은 처음이다 보니 피가 들끓고 있었기에 무심코 주먹에 힘을 줘버린다.
- 그 정도야?
- 어, 그러니까 빨리 보내줘. 최대한 총질 잘하는 새끼로. 혹시 모르니까 수류탄도 몇 개 챙겨서 보내.
그렇지 않아도 쉴 곳이 필요했는데.
마침 좋은 타이밍에 등장해준 인간이라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올라온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주먹 쥔 양팔을 머리 위로 들고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
"정지! 그 자리에서 멈춰"
"뱀파이어 아니고 사람이니까. 쏘는 순간 살인이야"
"...사람...이라고?"
"눈을 보면 알 텐데?"
해가 어느 정도 뜨게 되고 거리 또한 가까워지자 그도 맨눈으로 나를 볼 수 있게 된 건지 놀란 얼굴을 한 채 나를 마냥 바라보았다.
"뱀파이어도 아닌데 어떻게...저것들 전부 네가 죽인 거 맞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대충 빠따를 어깨에 올려 보인다.
내 몸에 튀어있는 피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물어보는 건 그만큼 충격적인 상황이라는 것이겠지.
"피가 많이 묻어서 그쪽 집에서 씻고 싶은데. 화장실 좀 빌려주시죠"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부탁을 하는 것이다 보니 존댓말까지 써줬건만, 너무 하대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울산이 되어버렸기에 이곳에서 물이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웠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일단 그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3층 건물 옥상에서 무전기를 들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시작 했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건 시간 아까우니 몸 상태를 점검한다.
몸 이곳저곳에 난 상처와 살갗이 뜯겨 나간 어깨는 이미 치유가 된 듯 더는 아려오지 않는다.
더는 전능 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감각 자체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
이것도 오래 유지 못 한다.
기껏 해봐야 앞으로 2~3시간?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초반에 힘 낭비를 너무 많이 해버렸다.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최약체 엘리제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세계를 멸망시킨 그도 엘리제는 죽이지 못했으니 힘들 것 같다.
참, 정체 모를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