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LEVEL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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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모르게 된 그녀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샤를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뱀파이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을 방치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결국 내 손으로 샤를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얼굴도 모르는 수십만이 넘는 뱀파이어들을 죽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원래부터 서울을 짓밟았던 원흉이 이성을 잃은 좀비라고 믿어왔고, 그렇기에 나의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위해 좀비들을 전부 죽이기로 했다.
그저 죽일 대상이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좀비에서 뱀파이어 전체로 변한 것뿐.
그들로 인해 서울이 내가 살던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 전부가 무너진다면, 나는...
[그래도 안 죽여?]
차라리 몰랐더라면...
샤를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뱀파이어가 전부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히로인들 중 나에게 단 한 번도 적의를 내비친 적이 없는 여자였다.
샤를은 나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고 과거를 들먹이며 나에게 짐을 지워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쿠레아에게 이 말을 들은 순간부터 백만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는 존재와 샤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게 되었다.
왜? 굳이 내가?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죽든 말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애초부터 그럴 계획이었잖아.
하지만, 그때와 다르다.
그 당시에는 내가 주인공임을 몰랐거나 부정했기 때문에 그저 혼자만이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쳤었다.
그녀들의 성격을 만든 것은 주인공이다.
그녀들이 이곳에 넘어온 이유도 주인공 때문이다.
그녀들을 멈출 수 있는 존재 또한... 나밖에 없다.
벨라트릭스와 라일라 없이 과거로 돌아가 뱀파이어들을... 샤를을 멈출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는 가능하다.
벨라와 라일라에게 뱀파이어 모두를 죽이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전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니지.
애초부터 쿠레아가 한 말은 진실일까?
아닐 수도 있잖아.
샤를이 단 한 번도 죽지 않았기에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애초에 샤를의 죽음을 본 적도 없는 쿠레아가 그녀의 죽음 이후의 일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확신하는 것일까.
[이제 죽이고 싶어졌어?]
순간 아까 봤던 소녀의 눈동자에 서린 증오가 떠오른다.
동시에 샤를이 나에게 애원하듯 했던 말이 떠오른다.
[대신에 라일라. 그 아이 버릴 수 있어?]
...저번과 같다.
디아나와 벨라 그리고 엘리제의 때와 같이 그들 또한 내가 모르는 관계 속에 서로 얽히고 섞여 있는 것이다.
"아저씨. 무슨 생각 해요?"
"...어?"
"긴장하셨어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뱀파이어 여고생.
처음 만났을 때는 무척 거만하게 말해 과거 학창 시절 PTSD가 와서 졸았었지만, 실상 알고 보니 옆에 같이 있던 여자가 전부 시켰던 것이고 실상은 그냥 일반적인 여고생이었다.
아까 잠을 자기 전 이곳의 리더가 나에게 식량 조달하는 것을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기에 도와주러 가기 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오긴 했지만, 얘는 왜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일까?
"아니, 딱히"
"거짓말. 밥도 한 숟갈도 안 뜨시고, 얼굴도 엄청나게 굳어 있는데요? 밖에 나가는 게 무서운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 부근은 제가 꽉 잡고 있거든요"
주먹을 내밀면서 잽을 날려 보이는 자신만만한 소녀의 모습에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진다.
나한테 주먹질을 하다가 혼자서 발 걸려 넘어진 뒤 코피 흘리며 언니를 찾은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남아있는데. 대체 어디를 꽉 잡고 있다는 말일까?
"일단 가슴은 꽉 잡기에는 좀 매우 작네"
"...네?"
그녀의 앞에 검지와 엄지를 집게처럼 만들어 집는 시늉을 보인다.
"이렇게 잡아야 하니 꽉 잡는 건 힘들지 않을까?"
"......."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없다.
더럽다는 듯이 쳐다보거나 아니면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거 농담인데 반응 좀 해주지"
"그런 농담 다시는 하지 마세요. 소름 돋아요"
"그렇게 말하는 거치고는 무덤덤해 보이네"
그녀는 내 말에 쓸쓸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식판을 내려다본다.
"그래요?"
"내 옆에서 좀 꺼져달라고 한 말인데. 굳이 거기 앉아있는 것만 봐도 무덤덤한 거지"
"......아저씨도 저 싫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여고생을 바라보았고, 곧이어 식판을 뚫어지라 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슬픔이 보였다.
"왜, 다들 너 싫어해? 그럴 리가 없는데"
"......"
그럴 리가 없다.
사람과 히로인들을 비교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매우 실례이기에 그녀들과 비교할 순 없지만, 내 앞에 있는 소녀는 그래도 나름 이쁜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거기다 뱀파이어 자체가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본능적으로 외모나 풍기는 매력을 통해 어느 정도 사람들을 홀리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사랑받았으면 사랑받았지 싫어할 리가...
"...엄청 싫어해요"
"그래?"
"4명 정도 부숴버렸거든요. 거기"
거기?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고추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예쁘게 태어난 걸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오히려 손해에요"
"......"
"아저씨는 절 그런 식으로 안 보는데.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 사람들이 다들 이상해졌거든요. 남자들은 저를 더 친절하게 대해주고, 여자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절 미워하더라고요. 어른 또래 할 것 없이"
좋지 않다.
이 아이의 말을 더 듣는 것은 나에게 독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들 나에게 왜 그러는지 뻔한 건데... 저는 좋을 대로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세상이 변했는데... 바보같이... 그중에 가장 친절한 사람이... 절 구해줬던 사람이... 제가 뱀파이어라도... 인간이라고... 인간과 똑같다고 말해줬던 사람이... 절..."
"멍청했네"
내 말에 소녀의 놀란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냥 한번 대주지 그랬어"
"......"
"그걸 대체 왜 만난 지 하루 된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원래 사람은 그런 동물이야.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자손을 남기는 게 뭐가 어때서. 나한테 공감을 원해서 그딴 말한 거면 집어치워"
그녀가 평범한 여자아이였더라면, 조금은 위로해주고 그녀가 듣기 좋은 말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평생 내가 이 뱀파이어 여고생을 데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면 그녀 또한 사라져야 할 뱀파이어다.
소녀의 동그란 눈동자에 이슬이 맺히는 게 보였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식판에 손을 올렸지만, 곧이어 그녀의 손에 팔이 잡혔다.
"공감 같은 거 바라는 거 아니에요. 그냥... 대리고 가주세요"
"......"
"오늘 밖에 나가면 이곳에 다시 들어오지 않을 거잖아요. 이번에 저도 조달팀에 참여했으니... 가실 때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내가 왜?"
"여기 있으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내가 왜?"
"안대리로 가셔도 어차피 따라갈 거니 상관없어요"
그러면 왜 물어봤는데 쌍년아.
"그리고 저한테는 중요한 정보가 있거든요. 이대로 나가면 아저씨 분명히 죽을 거에요."
"뭔 소리야?"
"아까 숨어서 들었는데. 조달팀 아저씨들이랑 찬수 아저씨랑 몰래 이야기하더라고요"
찬수라는 이름에 순간 누군가 싶었지만, 아까 이곳의 리더라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뭐라고 몰래 이야기하디?"
"몰라요"
"...어? 아니, 숨어서 들었다며"
"너무 조용히 말해서 안 들렸어요"
"아니, 지금 나 가지고 놀아?"
"진짜에요. 몰래 이야기는 거들었어요"
"아니, 그래서 내용이 뭐냐고"
"너무 조용히 말해서 내용은 몰라요"
이년 빡대가린가?
내가 지금 금붕어와 이야기를 하고 있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주변을 살펴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도리어 헛웃음이 나온다.
"에휴, 됐다"
"진짜라니까요? 이대로 따라서 가면 죽는다니까요?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쳐야 해요"
무시하고 일어서던 중 그녀가 내 팔을 강하게 잡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다그친다.
"알 것 같으니까. 손 놔"
"알 것 같다뇨...? 아저씨는 조달팀이 출발하면 어디로 갈지 아시는 거에요? 대체 어디서..."
"너 방금 그 사람들이 너무 조용하게 말해서 안 들렸다며"
"......"
'헤헤' 소리를 내며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내 말을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아까 눈을 글썽거렸던 것 또한 연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너 이름이 뭐냐?"
"정세연이요"
"넌 어딜 가도 잘 살아남겠다"
"...그거 칭찬 아니죠?"
"오냐"
"앗..."
그녀에게 잡혀있는 손을 재빠르게 빼내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아저씨! 진짜 후회 할거에요!"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지만, 대충 무시하고서 복도를 걷는다.
그녀가 죽는다고 말했던 것이 뭔지 대략 감은 온다.
[부탁드립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첫 만남부터 끝까지 나는 쭉 고자세를 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자세만을 유지했다.
꿍꿍이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뱀파이어를 수백만이라 잡아낸 나를 두고 대충 식량 조달을 시키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리는 절대 없다.
그것을 나는 알고 있고, 그렇기에 그의 부탁에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그런데 나는 왜 인제 와서 나를 이용하려는 이를 상대로 일부러 호구 같이 당해주려는 것일까?
아마...
[멍청해. 더 멍청해. 봐야 알아]
그녀의 말대로 나는 멍청해서 직접 눈으로 봐야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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