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LEVEL 5.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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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아니. 포기했다.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부서져 버리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어 포기했다.
벨라트릭스는 내 구원자였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을지언정 내가 그녀에게 구원받았다는 사실만큼은.
...내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이미 부서져 내려 미쳐버리기 직전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여자.
그런 여자를 나는 내 손으로. 내 의지로 벨라트릭스를 버렸다.
그녀가 나를 떠날 때 그녀의 용서해달라는 눈빛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은 채 나를 괴롭힌다.
옆에 있게 해달라며 수도 없이 애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시시때때로 귀를 울려 숨을 멎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물밀 듯이 후회가 밀려온다.
조금 더 해볼걸. 버텨볼걸.
겨우 그 정도 죽음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해버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그런데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녀가 나로 인해 미쳐버리는 것을 또 보게 될까 봐 너무나도 두렵다.
"병신새끼"
"아악..."
복수에서 올라오는 고통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감싼다.
"전투 중에 딴생각이나 하고, 잘하는 짓이다"
"......"
"일어서"
일어서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배를 부여잡은 채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본다.
내가 일어서있음에도 나를 내려다볼 정도로 장신인 그녀였기에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더욱더 매섭게 느껴진다.
철혈여제.
그녀의 이름인 로제는 장미에서 따온 것이었다.
외모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닌.
전쟁 속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붉은 피에 온몸을 적신 채 홀로 피어있는 꽃을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그만...하자"
"뭐가 된 것 같은데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지랄하지 말고 검 잡아"
"이 정도 맞았으면 그만할 때 됐잖아. 얼마나 더 팰 건데"
"지랄 그만하고 검이나 다시 잡아. 안 잡을 거면 이대로 맞던가"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바닥만 보고 있자 그녀의 주먹이 날아와 다시 한번 복부를 강타한다.
"아악..."
"너야말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뭐가 바뀌기라도 해? 그렇게 후회할 거면 차라리 지금 당장 네 잘난 기사한테 연락해서 다시 돌아와달라고 하지 그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내가 무엇인가 하며 시간을 보내면... 벨라를 정말로 포기해버린 것 같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 라일라 라는 여자애"
"......"
듣고 싶지 않다.
"그 애새끼 조금이라도 빨리 구해줘야 한다고,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야 한다고 말했던 새끼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
"나...도 사람이야"
"아가리 열 시간에 검 들어"
"사람이라고! 나도 힘들 수 있는 거잖아. 나도 지칠 수 있잖아. 벨라 보내고 나서 조금은... 조금은 무너질 수도 있는 거잖아. 조금만...시간을 주면...나도..."
"그래서 언제까지 그 지랄할 건데"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위로라도 해놓고 그런 말 해. 아니, 위로까지도 안 바래. 너는 다 알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날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제. 너만큼은 이러면 안 된다.
"나보고 고작 여자 하나 떠난 것 때문에 위로까지 하라는 거야? 너 미쳤냐?"
"고작 여자 하나? 고작? 어떻게... 벨라가 나한테 어떤 의미를 가진 여자인지 알고 있는 주제에... 그딴 말을 내뱉을..."
"왜 못해? 지금 네 꼬락서니를 봐. 나는 애초에 네 허황한 부탁 하나 때문에 내 시간을 쏟고 별의별 짓거리를 해가며 여기까지 따라온 거였어. 그런데 너라는 새끼는 사랑놀이에 빠져서 그 지랄... 하... 됐고, 검이나 잡아"
"그래도...조금은...아주 조금은... 이해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랑하는 여자가 수십번이고 내 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미쳐서 내 손으로 죽인 적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몰라"
"왜 몰라! 알려줬잖아. 내가 항상 말해줬잖아. 벨라 죽을 때. 너도 같이... 힘들어했잖아..."
"그런 적이 있다고 듣기야 들었지"
나는 들려오는 로제의 말에 말을 하는 법을 잊은 듯 입이 멈춰버렸다.
"같이 여행 다니고. 몇 번이고 함께 싸우고, 그러다가 애가 미쳐버린 건지 날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손으로 죽였다고 네가 말해줬었지"
말해줬었지...
몇 대 맞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진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거 말고도 여러 개 더 들었던 것 같긴 한데. 너무 많아 기억도 안 난다"
"그,그래도...너는...그러면...안되는거잖아..."
그녀의 한숨 소리가 귀를 울린다.
"너 이번에는 너무 멀리 돌아왔어. 내가 그 여자 본 거라고는 이제 반년. 같이 다닌 건 두 달도 채 안 돼. 거기다 너 이번에 그 여자 살리겠다고 몇 번 돌아갔어?"
"......"
"그 정도로 지랄하는 걸 보니 최소 수백 번이겠지"
모른다.
나도 내가 얼마나 회귀를 반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고통받았던 걸 그저 네 말만 듣고 이해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왜...다들...잊어버리는거야... 한 명 정도는... 기억해줄 수 있는 거잖아... 왜 매번 나만..."
"어리광 부리지 마. 네가 선택한 회귀잖아"
"어리광? 널 살리기 위해 적어도 수십번은 죽었어. 너 말고도...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적어도... 나한테... 어리광이라는 말 같은 걸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까지 이딴 개 같은 능력 날 위해서 쓴 것보다 몇 배는 다른 사람 때문에 썼어. 그런데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되는 건데?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죽을 사람 살렸는데... 수십번이고 내가 대신 죽었는데. 이 정도 어리광은 받아 줘야 하는 거잖아"
모두 날 잊어버린다.
나는 그저 살리기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회귀했을 뿐인데.
늘 돌아보면 혼자만 남아있다.
내 옆에 있었던 사람들도.
내가 구해주었던 사람들도.
날 괴롭혔던 사람들도.
나와 관계되었던 모든 이들이 내가 회귀하는 순간 없었던 일이 되어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늘 나만 기억하고 나만 아파하며 나만 슬퍼한다.
그렇기에 로제만큼은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왔다.
믿음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내가 아무 말하지 않을 때에도 그녀는 나를 이해해주었으니 날 전부 이해해 줄 거라고...
쭉 그렇게 생각해왔다.
...나는 억지로 그렇게 믿어왔는지 모르겠다.
한 명쯤은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그 사람이 로제라고 마음속으로 억지로 믿어왔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적당히 뒤졌어야지. 병신 새끼야"
"......"
"잘 들어. 우리는 그 얼굴도 모르는 년 살리겠다고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지금 너는 뭐 하고 있어?"
로제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받은 것 때문이었다.
세 가지 소원.
그중 마지막을 이루어주기 위해.
나는 소설을 쓴 작가였고, 이곳은 소설 속 세상이었기에 그녀가 언제 위협을 당할지.
어떻게 구해줄지 전부 계획하고 받아내었던 소원이었다.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가고 싶어서...
소소하게 장사를 하거나 아니면 농사를 해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죽으려고 했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그녀의 빚을 지고는 절대 못사는 성격이라는 설정을 이용하기 위해 그녀에게 빚을 지웠다.
애초부터... 이딴짓거리 하려고 그녀를 이용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나 하나 편하려고 한건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이제 그만하고..."
"그만... 그래... 그만하자"
"...뭐?"
"전부 그만하자고. 나 같은 게 뭔가 하려고 했다는것부터 문제였어"
"이 씨발 새끼가 무슨 소리하냐?"
"......"
"다시 한번 지껄여봐. 뭐?"
"그만...아악!!!"
걷어차였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시야는 하늘을 보고 있었고, 육신은 어디론가 날아가 처박혔다.
"아아...으..."
"다시 지껄여봐"
"그만하고..."
말을 하던 도중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져 그녀의 얼굴이 앞에 있었지만, 그녀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그냥 돌아가자... 애초부터 잘못 생각했어. 나 같은 새끼가 뭘 할 수 있다고..."
"정신 차려"
"......"
"니가 여기까지 오려고 해온 짓거리들을 생각해"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
"그깟 애새끼 살려보겠다고, 왕국의 기둥 중 하나인 성녀를 정신병자로 만들어서 데려왔어. 덕분에 왕국에서 우릴 지명수배했더라. 한 달 전까지는 기사단장도 우리랑 같이 있었으니 기둥 두 개를 뽑아왔었네. 씨발"
디아나.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면 그녀는 오히려 이 정도밖에 망가지지 않게 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네가 개입한 덕분에 다크앨프 애새끼는 부모도 잃고 말도 못 하는 벙어리 새끼가 됐어. 그때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평생 속죄할 거라고 했어. 자기 때문에 부모를 잃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죄하겠다고 말했었잖아"
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쿠레아의 부모가 죽임당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네가 개지랄을 떨어준 덕분에 나는 마들렌한테 찍혀서 평생 연합국에서 용병질도 못하게 됐어"
"그건 켁... 네 잘못잖아"
"씨발 그게 중요해? 그럼 그년이 너 내놓으라고 지랄발광을 하는데 가만히 있을까? 지금 그 변태 같은 년한테 너 넘기고 튀는게 나았다고 말하는거지?"
"그러니까 더 그만해야겠네. 내가 뭔가 해 봤자 또 누군가 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말이잖아. 여기까지 왔는데도 이 정도면 나 같은 새끼는 영원히 가만히 있는 게 맞는 거잖아. 그러니까..."
육신이 장난감이라도 된 듯 그녀의 손에서 내팽개쳐져 바닥을 뒹군다.
몸이 바닥을 구르는 것을 멈추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일어설 힘도 그럴 의지도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눈을 감는다.
"너는 여기까지 와놓고 그만하자는 말이 참 쉽게 나온다. 나는 내 일이 아닌데도 뒤지게 아까운데"
"안 하는게 아니야. 못 하는거지... 진짜... 더 이상...못하겠어..."
"그럼 할 수 있어질 때까지 맞으면 되겠네. 그래도 이 지랄 계속하고 있으면 연합국에 찾아가서 마들렌 육변기 찾아왔다고 하고 포상금이나 받아야겠다"
고통은 익숙하다.
만약, 이것으로 그녀의 기분이 풀린다면... 차라리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은 채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고통은커녕 시원한 바람만이 코를 간지럽힌다.
"비켜"
로제의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뜨자 시야로 보이는 조그마한 육체.
언제 온 것인지 조그마한 아이가 나와 로제의 사이에 서서 양팔을 핀 채 로제를 보고 있었다.
"난 애라고 안 봐줘. 거기다 인간도 아니니 더더욱 봐줄 이유 없어"
"아!! 으!!"
"쿠레아. 비켜줘"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내 멋대로 로제를 이용했고, 내 멋대로 끝내자고 한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형식으로 화를 내던 나는 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쿠레아는 내 쪽은 보지도 않은채 고개를 흔들며 들고 있는 자신의 양팔을 더 넓게 펼쳤다.
"인공아. 네 눈에는 이딴 병신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
"나는 진짜 모르겠다."
"로제..."
"됐어. 나도 안 해. 네 좆대로 해라. 씨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짐을 챙겨 홀로 떠났다.
...이거면 됐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다.
나 같은 새끼가 누군가를 구하려 했다는 것부터 개 병신같은 생각이었다.
"주,주인님...괘,괜찮으세요?"
역겨운 목소리에 정신이 깬다.
전부 저년 때문이다.
내 모든 것을 망가트린 여자.
디아나.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날 천 번이 넘도록 죽이고, 또 죽이고 죽였던 여자.
거기에 라일라의 육체를 본래대로 되돌려준다는 것을 핑계로 나를 수도 없이 죽였던 여자.
이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내가 쓴 소설대로... 전부... 순리대로...
"주, 주인님...죄송해요... 다시는 말 안 걸게요... 죄송해요..."
내가 그녀의 앞에 걸어가자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보며 내가 용서해 달라고 빌 때마다 즐거워하던 그녀의 역겨운 미소가 떠오른다.
"너도...꺼져"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제, 제가 더 잘할게요... 주,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거 전부 하, 할수있어요... 그러니 버,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전부 부질없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은 그저 주제도 모르는 개새끼의 발버둥일 뿐이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이 여자에게 복수했을 때에는 통쾌하고 행복에 겨웠지만, 여러 번 복수가 반복되었을 때부터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녀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복수가 해롭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백날 복수를 한다고 해서 그녀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아무는 것이 아님을 알게된 것 뿐이다.
복수는 그저 내 기분 좋으라고 한 것일뿐.
그날 이 역겨운 여자에게서 받았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그녀를 버리는 것이 맞다.
이것으로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여자는 평생토록 고통받을 테니까.
"자, 잘못했어요... 버리지 말아 주세요... 버, 버리지 말아 주세요...저...저 아직 필요하시잖아요... 제...제가 있어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라일라를 구하지 않기로 했으니 이제 이 여자는 필요가 없다.
"알아서 따라오지 마"
"주,주인님!!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저...제가 뭘하면되나요? 전부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시켜주세요... 제발..."
내 손을 붙잡고 늘어지는 디아나의 행동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빼고 곧장 그녀를 밀쳐 발로 찼다.
"역겨운 년"
배려 따위는 전혀 없었기에 그녀가 저 멀리 굴러가는게 보인다.
그렇게 역겨운 년을 떨쳐내고 발을 옮기려고 하는데 시야에 이제 홀로 남은 아이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아는 데리고 가야지...
다크엘프는 이 세상에서 전부 사라져 쿠레아만이 홀로 남았고, 그 어떠한 종족도 이 아이를 환영해주지 않을 테니.
내가 대려가야만 했다.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등 뒤에서 쿠레아의 발걸음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온다.
이제 아이 한 명 정도는 얼마든지 키울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마침... 둘이서 살 집도 구해놨었으니... 집도 문제없다.
그곳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은 채 조용히 살자.
그래도 그동안 개고생한 덕분에 초월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중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무척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 향해 걸어가던 중 등 뒤에서 들려와야 할 발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아?"
분명 등 뒤에 레아의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어째서인지 레아는 가만히 서 있었고,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으!! 에!!"
납치?
레아가 누군가에게 잡혀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빠르게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을 뽑아 들고 움직였고, 검이 레아를 잡고 있는 괴한에 닿기 전 누군가의 팔이 검의 궤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레아?
끼어든 것이 레아의 팔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었다.
"쿠레아! 왜 끼어든 거야!"
"다행이다. 팔 잘릴뻔했어"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웃고 있는 레아의 모습.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의 입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너 어떻게 말을..."
"용사인데 쉽게 걸리네"
"바보라서 쉽게 걸린 거야. 바보 용사"
그제야 쿠레아의 등 뒤에 있는 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의 모습을 한 뱀파이어.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뱀파이어 중 소녀의 모습을 한 뱀파이어가 머릿속을 스친다.
엘리엘린 자매.
흡혈을 통해 영혼을 이동시키는 능력을 갖춘 뱀파이어.
짧은 순간 여기까지 떠오르자 나는 다시금 검에 힘을 주어 레아의 뒤에 있는 뱀파이어에게 휘두르려고 했고, 곧이어 레아의 육신이 방패처럼 그 자리를 메꾼다.
조금 더 빠르게...
"용사 오빠. 그거 또 휘두르면 나 죽어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다크 엘프를 죽인다고 해야지"
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몸을 멈추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뱀파이어의 계급 중 최상위에 속하는 이들이었지만, 이들은 전투와는 동떨어진 캐릭터였기에서 그냥 싸운다면 눈을 감고 싸워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아가 인질인 상태에서 억지로 공격하는 것보다 차라리...
10분 전으로 회귀하면 전부 끝나는 문제였다.
"칼 먼저 버려!"
"빨리 버려!"
"내가 목적인 거지? 그러면 쿠레아는 놔줘"
"놔주면 죽일 거잖아!"
"맞아! 사라만큼 샌 거 다 알고 왔어!"
"약속 먼저 해"
방심을 시키기 위한 말이었지만,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두 뱀파이어는 24시간 상시 무방비 상태가 아닐까 의심이 드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다크 엘프 맛 없으니 상관없어!"
"용사가 훨씬 맛있어!"
"알아서 잡혀주면 나는 놔줄게!"
"놔줄게!"
검을 놓자 검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순간에 맞춰 심장을 향해 손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한방에 찌른다.
손가락이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과 함께 심장에 다다랐고, 곧이어 심장을 뚫는다는 확신이 들 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인간?"
"프리!"
"어떻게 알고 왔어! 미행당했다!"
"어? 용사한테서 왜 피가 나지?"
"우리가 찜했는데 프리가 뺏어갔어!!"
"두 분... 여왕님께서 찾으니 시니... 어서 돌아가세요"
죽지 못했다.
뚫린 가슴을 통해 피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즉사하지 못한 것이다.
"빨리 돌려줘!"
"피 아깝단 말이야!"
이곳에 온 이후로 늘 이딴 식이다.
세상 좆 같다 느낄 때마다 더한 좆 같음이 내 앞에 나타난다.
이보다 떨어질 수 있을까 싶을 때 더한 바닥을 보여주고, 올라가려고 발악을 하면 할수록 내가 부서져 간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참 좆 같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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