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LEVEL 5.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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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 과잉이었다.
엘리엘린에게 납치당할 때.
나는 샤를에게 찍힐까 봐 두려웠다.
마음에드는건 꼭 가져야만 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나하나 부러트리며 쾌락을 느끼는 히로인이었기에 뱀파이어들에게 잡힌다는 건 곧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의식 과잉 인정한다.
샤를이 나를 보자마자 보여준 감정은 호감도 사랑도 아닌 무관심이었다.
내가 용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꺼지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에게 더럽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매우 부끄러워진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싶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양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조금 위험했다.
"날 앞에 두고 딴생각을!"
분노한 사라의 목소리와 뒤이어 들려오는 파공음.
대련 중에 딴생각을 너무 했던 것인지 그녀는 내 코앞까지 와있었고, 그녀의 대검은 내 머리를 반으로 가를 기세로 내려쳐 오고 있었다.
도망칠까 싶었지만,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빠른 기세로 내리쳐 오는 내 몸 크기의 대검을 향해 손을 내밀어 칼날을 잡았다.
"읏..."
이런 걸 대련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라가 아무리 압도적인 완력을 특성으로 들고 있는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실력 차이가 너무 난다.
기껏 해봐야 벨라와 비슷한 실력.
...벨라 생각하니까. 또 보고 싶어진다.
"나랑 붙는 게 의미가 있긴 해요?"
나에게 대검을 잡힌 채 옴짝달싹 못 하던 그녀는 한 손으로 나에게 주먹질을 해보았지만,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일일이 날아오는 주먹을 한 손으로 쳐내며 그녀의 쌀보리 게임에 어울려준다.
이 정도로 사라와 내가 격차가 난 것은 내가 강한 것 때문도 있지만, 아마, 내가 뱀파이어가 되어버렸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조금은 고생 좀 했을 것 같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꽤 강하다.
내가 구해다 준 기연들로 인해 로제가 이상하리만큼 강해져 버린 것이지.
아마 평범한 루트를 타서 소설대로 스토리가 진행됐더라면 로제가 초월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뱀파이어가 된 상태에서 아마 아무런 페널티 없이 샤를과 싸운다면 쉽게 이길 것이다.
내가 만든 이 세계의 설정들은 회귀에 무척 관대하다.
검사의 경우에는 관조를 통해 육체 구석구석 얼마나 세밀하게 마나를 퍼트릴 수 있는지.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지에 따라 낼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
마법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한가지다.
정신력.
검사나 마법사나 마나를 모으기는 해야 되겠지만, 그건 이차적인 문제였고, 가장 중요한 건 정신력이었기에 회귀한다고 해서 회귀한 시간만큼 힘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잃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회귀라는 힘은 압도적이었다.
나 같은 재능 없는 새끼가 이 정도로 강해졌으니 회귀가 얼마나 사기인지 증명은 된 셈이다.
어찌 되었든 정신력 그다음이 종족 혹은 마나의 총량이 싸움의 승패를 가린다.
그 밖에도 검술이나 경험 혹은 반사 신경 등이 있긴 하겠지만, 솔직히 내 소설에서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덤벼!!"
"사라님. 자꾸 무리하시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하시죠?"
"...그런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년은 여기 보스 직속 간부고, 나는 너희 장난감으로 잡혀 온 거야.
네년 몸에 기스 하나라도 난 순간 내 팔 한 짝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잘도 싸우겠다.
라고 말하기에는 지금의 이 평화를 깨트리기 싫었다.
한 손에 들려있는 사라의 대검을 대충 한쪽에 던지며 주먹질을 하다가 혼자서 지쳐버린 사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도 기절할 때까지 싸우시게요?"
"기절? 그런 계집애들이나 하는 짓 그만하고 날 죽일 기세로 싸워라"
"사라님도 성별만 놓고 보면 여성..."
말실수.
아무런 생각 없이 대답해버렸다.
"네놈도... 날 여자로 보는 건가?"
"그건... 여자인 건 사실이잖아. 아니, 사실이잖아요"
"죽고 싶은 건가?"
"네? 항상 죽일 기세로 덤비던데. 이제 와서 죽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이렇게 사라가 나에게 덤벼들기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지만, 단 한 번도 죽일 기세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항상 죽으라고 고래고래 악을 지르면서 덤벼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죽고 싶냐고 물어보면 퍽 겁먹겠다.
"닥쳐라!"
그녀의 애병은 이미 저 멀리 던져버렸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먹질밖에 없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달려드는 모양새가 뭔가 짠하다.
한 대만 맞아줄까 싶었지만, 저번에 그렇게 했다가 더 화가 났던 기억이 있었기에 애써 그녀의 손을 전부 쳐내며, 그녀가 지치길 기다린다.
이런 걸 보면 접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다.
상사 비위 맞추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이것이 아버지들의 고통인가?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소꿉놀이와 같은 대련을 지속하고 나서야 사라는 온몸에 기운이 빠져 선 상태로 기절했고, 그렇게 쓰러지는 사라의 몸을 익숙하게 받아내었다.
잔디밭에 사라를 살며시 눕히고 나 또한 그 옆에 주저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
평화롭다.
한 달 동안 이곳에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는 감상이었다.
더는 죽지 않아도 된다.
더는 발악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은 나를 괴롭힐 사람도... 의무를 줄 사람도 없다.
행복이란 건 이런 것일까.
"너는 어떻게 그렇게나 강해진 거냐"
"벌써 깨어나셨어요? 어떻겠냐고 물으셔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해졌다고 말할 셈인가? 퍽이나 그러겠군"
"...아뇨.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긴 하네요"
있기야 있다.
머릿속에서 이제 지워버려야 하는 이유.
"꼭 구해야 할 사람이 있었거든요. 엄청... 강해져야 해서. 꽤 오랜 시간 노력했죠"
오랜 시간...
강해지기 위해 회귀라는 힘을 이용해 미친 듯이 발악했다.
죽고 죽고 또 죽으며 강해졌다.
얼마나 죽었는지 이제 모른다.
그냥, 엄청 죽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었나? 그렇게나 강해질 만큼?"
"상사가 직권을 이용해 부하의 사생활을 캐묻는 거 비호감입니다"
"......"
"장난이에요. 얼굴 피시죠? 소중한 사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옛날에는 알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라일라를 만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아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고, 어떤 목소리를 했었는지. 이제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불쌍하다는 것만이 기억이 난다.
동기가 희미해지니. 목표 또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은 아마, 지금까지의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졌기 때문이리라.
"아직 구하지 못했나?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하늘에서 눈을 떼고 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미친년 소리를 해도, 싸움에 미친 것만 빼면. 참, 순수한 여자였다.
로제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싸움에 미친 만큼 오히려 다른 부분들이 정상적인 건가?
애들이 아니더라도 나름 정상적이라고 설정한 히로인들 많은데...
왜 얘네 둘 빼고는 다 비정상인 것 같지?
[얀!!!!!!!!!!!!!!!]
안데레다이스키
저놈이 문제다.
히로인들한테 그딴 속성만 안 넣었어도 히로인들 성격이 그런 식으로 뒤죽박죽이 되진 않았으리라.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왜 그러지? 내가 아무리 너보다 약하다고 한들. 최소한 네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줄 힘이..."
"포기했거든요"
"......"
내 말에 사라는 나와 눈이 마주친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곧이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포기한거냐. 너는 초월자를 앞두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텐데"
"상대가 좀 치거든요. 그리고, 내가 초월자가 되는 일은 평생 없을 거예요"
초월자...
소설 속에서 초월자는 전설 속에서나 내려오는 경지 중 하나였다.
뭐, 소설 막바지에는 주인공은 물론이고 히로인들 중 몇몇은 초월자였다 보니 개나 소나 된 것이긴 하지만, 세계관만 따지면. 유사 인종에게 있어 초월자는 반신이라 불리는 경지였다.
드래곤과 여신 그리고 마왕의 바로 아래 단계.
파워 인플레이션이 과해진 나머지 신의 영역까지 간 주인공은 못될지언정 반신인 초월자까지는 될 줄 알았지만...
내가 그곳까지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몇 번을 회귀해도 얼마나 시간을 들이든 간에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이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벨라를 구하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이 죽었다.
수백 번? 아니, 분명 나는 천 번을 넘게 발악했다.
하지만, 그 회귀 속에서도 나는 1mm도 성장하지 못했다.
무엇이 부족한지 전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불가능하다는 것 하나 만큼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한걸음.
초월자까지의 그 한 걸음을 나는 평생 딛지 못할 것이다.
"포기하겠다고 말한 주제에 미련은 남아있나 보군"
"네?"
"아무것도 아니다"
"...비꼬시는 거라면 끝까지 하시죠"
혼잣말이면 속으로 할 것이지.
괜히 찝찝하게 입으로 내뱉어서 사람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나보다 계급만 안 높았으면, 진심으로 한 대 때릴 텐데 매우 아쉽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뛰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바로 알아버린다.
"예삐!!! 어디 있어?!!"
"저기 있다!!!"
"저것들 또 왔나 보군. 그런데 네 이름이 정말 예삐는..."
"아닙니다"
"한 번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아서"
"......"
내 이름...
늘 하던 대로 주인공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의 나는 주인공이 맞는 걸까?
이곳에 왔을 당시.
내가 쓴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주인공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댄 이후로 나는 줄곧 주인공이었다.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이름을 잊은 지 오래다.
수천 번을 죽으며 회귀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하겠지.
지구에 있을 때의 이름도 잊고 주인공조차 아니게 되었다면, 나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생각해보니 예삐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 같은 새끼를 부르는 호칭이 뭐든 무에 중요할까.
뭐라 부르든... 죽지 않고 고통받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름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예삐는 아닌 것 같으니 바꿔라"
"왜요. 귀여운데"
"귀...엽다고? ...크흠, 네가 예삐면. 난 지금까지 그 애완동물 이름과 별다를 바 없는 예삐에게 패배한 게 되니. 날 위해라도 바꿔라"
하긴, 샤를이 누구에게 검을 배웠냐고 물어볼 때.
예삐라고 대답하긴 좀 그럴 것이다.
"아니! 왜 지금까지 여기 있는 거야! 우리가 오늘은 빨리 들어오라고 했잖아!"
"맞아! 바보! 멍청이 예삐! 자꾸 말 안 들을 거야?"
"죄송해요. 사라님이 자꾸 놔주질 않아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요"
"사라가 그랬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사라가 나빴네! 우리 착한 예삐 괴롭히지 마!"
이렇게 사라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오늘 종일 왜 안 왔냐고 나를 들들 볶을 게 뻔했다.
사라와 이야기하다가 늦은 건 팩트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어하는 사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지만, 가볍게 무시해준다.
"빨리 가자!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놀 거야?"
"나! 나! 어제 했던 이야기! 그거 이어서 해줘!"
소녀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끌려가며 생각한다.
평화롭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평생 쭉 이렇게 이어졌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마족이었고, 마족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만,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그저... 이 평화가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을 바라는 것뿐.
그렇기에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평화는 최악의 형태로 깨어져 버렸다.
사라가 죽어버렸다.
"오랜만에 보네"
사라를 죽은 사람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명령이야"
나의 이해자였으며 친구였던 여자.
"지금 당장 로제라는 여자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나는 여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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