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LEVEL 5.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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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는 노예였던 어미의 배 속에서 태어났다.
노예의 아이니, 그녀 또한 어린 시절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했고, 그것은 제국 전쟁까지 이어진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채 판테아 대륙을 쥐고 흔들던 있던 제국이었지만, 그 뿌리는 썩을 대로 썩어있었고, 그 썩은 뿌리가 제국에 탄압받던 종속국들이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썩었어도 군사의 건재함은 여전했던 제국과 종속국가가 되어 빌빌거리던 약소국들이 연합한 것에 불과한 연합국이 전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두가 연합국이 패배할 것이라 여겼지만, 거기서 마들렌이 등장한다.
약소국의 연합인 연합국 중 가장 약소국 출신 공주.
그리고, 전쟁과 내정 능력치 양쪽 모두를 최고치로 찍은 히로인.
어리다는 이유로. 병사도 별로 지원하지 않는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발언권 한번 얻지 못할 줄 알았던 공주가 연합국의 왕들을 전부 찍어누르고 지휘봉을 붙잡은 순간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오롯이 전략과 전술만으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따내었다.
그녀가 지휘하는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은 없었다.
연합국은 그렇게 영토를 하나하나 수복해나가며, 전쟁을 이어갔고 제국은 정전을 고민하는 지경에 이른다.
당연하겠지만, 그럴 때 나타난 여자가 로제였다.
단 한 명으로 좌지우지되는 전쟁.
공주 한 명이 전장을 지휘했던 마들렌의 경우에는 개연성이 떨어졌지만.
마나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기사 한 명은 얼마든지 전쟁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 로제가 등장할 때의 나이가 13살이었고, 기사 또한 아니었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노예 출신이었던 로제는 기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몇 년간의 전투 중 첫 승리를 해내었다는 업적은 썩어버린 뿌리조차 환호할 수밖에 없는 값진 것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로제가 귀족 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로제가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로제를 그다지 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연합국은 어느 정도 제국 수준에 맞춰서 유지 외야만 했다.
마들렌과 로제의 수 싸움으로 인해 버거운 승리가 몇 년간 이어졌고, 결국 대륙 최강이었던 제국은 협상 테이블에 올라서게 된다.
정전.
그리고 휴전.
아무리 로제의 활약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로제의 용병단이 전장에 참여하기 전까지 제국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연합국에 내어줘 왔기에 사실상 휴전 협정은 제국의 패배나 다름이 없었다.
판테아 대륙을 호령했던 제국은 몰락했지만, 그런데도 철혈여제는 제국에 서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철혈여제는 제국의 방패였으며 제국 인들의 수호자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몰락해야 할 제국이 몰락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제로 인해.
제국이 몰락하지 않았기에 썩은 뿌리는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뿌리는 여전히 탐욕스러웠다.
토사구팽.
가문이 모조리 멸족당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있던 과거 용병단... 이제는 아녜스 가문의 기사단이 된 이들은 전부 처형당했으며 로제 또한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그녀만이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목에 현상금까지 걸려 평생 제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했다.
복수를 꿈꾸며...
그런 그녀가.
믿었던 국가에 그렇게 처참하게 짓밟힌 로제가 용사를 내놓으라고 말하며 제국으로 들어왔다.
오롯이 나를 위해서.
이건...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그녀가 제국에 들어 올 이유가 전혀 없다.
제국을 뱀파이어의 국가로 만드는 샤를을 응원했으면 응원했지.
그녀가 이곳 올 이유가...
[지금 당장 로제라는 여자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
샤를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죽여달라고 말하며 그녀의 명령에 저항했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된 지 거의 1년.
뱀파이어들의 여왕인 샤를의 명령이 절대적이었다.
그 누구보다 설정한 당사자인 내가 잘 알고 있다.
내가 뱀파이어인 이상. 그녀가 죽지 말라 말한다면 절대 죽어서는 안 되고, 그녀가 누군가를 죽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 야만 한다.
그래서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성을 나섰다.
바보 같다.
어차피 나는 로제에게 안된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초월자인 로제를 이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로제가 있는 곳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하나씩 떠오른다.
[일어서]
[그래서 언제까지 그 지랄할 건데]
[이번에는 너무 멀리 돌아왔어]
그녀의 말은 전부 나를 위한 말들뿐이었다.
[어리광부리지 마]
[지금 너는 지금 뭐 하고 있어?]
[나는 내 일이 아닌데도 뒤지게 아까운데]
그녀가 화냈던 모든 게 내가 무너지는 것을 잡아주는 말들뿐.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됐어. 나도 안 해. 네 좆대로 해라. 씨발]
안 한다면서... 왜 온 건데...
"누구냐!"
"로제 아녜스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양손을 들고서 로제가 이끄는 무리를 바라본다.
뱀파이어가 되지 못한 제국민들.
그녀는 자신을 버렸던 이들과 함께 있다.
"뱀파이어?"
양손을 들고서 항복을 표하자 성벽 위에 있던 궁병들이 나를 노리고 활시위를 당긴다.
로제가 아니라 이들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죽으면,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뱀파이어로 생활한 지 1년.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면. 사라가 성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 사라의 죽음을 막아야 할까?
아니면, 1년 전 뱀파이어가 되기 전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벨라가 떠나기 전?
그것조차도 아니면...
나는 대체 언제로 회귀해야 되는 걸까?
목적이 없어지니. 언제로 회귀해야 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손을 든 채 서 있었고, 곧이어 성문이 열리기 시작하며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로제.
"...오랜만이야"
내 말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곧이어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뱀파이어가 된 내 모습에 화가 난 걸까?
오늘따라 로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은 죄가 있기에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볼수록 자꾸만 해서는 안 될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죽여]
알고 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하지만, 조금은...아주 조금은...늦게 돌아가고 싶다.
아직, 돌아갈 시기를 정하지 못했으니.
그때까지만...
큰 막사였다.
영주의 성에서 살아도 될 텐데. 로제는 막사 안에서 생활하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걸어갔고, 나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 그곳에 들어갔다.
막사안은 난장판이었다.
"왜 이렇게 지저분해? 내가 정리 좀 하고 살라니까"
그녀의 성격이 정리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은 맞지만.
엎어진 책상.
촛불과 책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평소 정리 습관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아, 내가 왔다는 말에 놀라서 책상을 엎은거 아니야?"
"...어"
"에?"
"응. 네 말이 맞아. 정신없이 뛰어나가느라 엎어진 지도 몰랐네"
로제의 말에 나는 막사 입구에 선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여]
잠시 멍해진 틈을 타서 뇌에 울려 퍼지는 샤를의 목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아직...아직은 아니잖아. 개년아.
로제를 보면 볼수록 뇌가 아려오는 듯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원래는 오자마자 반쯤 죽여놓으려고 했는데"
"나도 성문에서 보자마자 맞을 줄 알고 각오하고 있었지"
그녀는 내 말에 조용히 웃는다.
"병신새끼"
오랜만에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욕설은 내 안에 있던 허전함을 채워주었다.
욕먹고 좋아하다니. 드디어 내가 미쳤나 보다.
"너라면 금방 일어설 줄 알았지. 늘 거랬으니까"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아, 그리고 여기서 너 사는 거야? 굳이 영주성 내버려 두고?"
[죽여]
"매번 쭉... 그래왔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무슨 일이 있든 곧잘 이겨내 왔으니까"
"너답지 않으니까. 그만해"
[죽여]
"1년... 이렇게나 긴 시간을 돌아가 버리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 너는 이렇게 1년 동안 이 지랄을 했는데도. 못 일어설 정도로 나약한 놈이었던 거야"
"...네가 날 과대평가한 거지"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
"몇 년을 더 그 병신같은 상판대기로 있을래?"
"...말했잖아. 그만한다고."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죽여]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미안했어"
"어?"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위로해 달라며"
"......"
"말실수였어. 실수라기보다는... 그 기사한테 목매다는 널 보는 게 싫어서 그냥 아무 말이나 했다고"
로제는 순간 멋쩍었는지 고개를 돌렸지만, 금세 나를 바라본다.
가끔 나를 바라보던 애틋한 눈을 한 채.
로제가 실수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무조건적인 내 편이길 바란 내가 잘못이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매번 로제에게 이해하는 '척' 해달라고 부탁했다.
말하지 않았을 뿐. 입으로 내뱉지 않았을 뿐.
늘 나는 그녀에게 강요했었다.
제발 이해해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불쌍한 얼굴로 늘 로제에 강요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것뿐이다.
나는...
"그러니까... 돌아가지 마..."
로제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고, 곧이어 나는 내 손에 검이 쥐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검이 그녀의 심장을 향하는 것도.
샤를이 내 검을 붙잡고 있는 것 또한 이제야 알아챘다.
[죽여]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몸이 움직여 그녀를 배려도 했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죽여줘"
"성문 앞에서 네 썩은 얼굴을 보자마자 알겠더라. 지금 네 손으로 죽는 건 못하는 거지?"
"빨리 죽여!!!!!"
그녀의 손에 잡힌 검이 자꾸만 미끄러져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나아간다.
"평생 돌아가지 마. 그딴 생각으로 돌아가 봐야 똑같은 시간을 반복할 뿐이야."
"로제!!!"
"나는 몇 번이나 네 손에 죽었어? 내가 널 죽인 적은 많을 텐데. 네가 날 죽였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봐서"
"......"
"만약 멋대로 회귀하게 된다면. 적어도 네 병신 같은 상판은 돌려놓고 회귀해. 원래 상판이 조금 멋있긴 하니 화는 좀 덜 낼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검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로제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바보가 겨우 목숨 한번 빚진 걸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날 도와주겠는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마법사 토벌을 함께하고.
라일라 때문에 일을 못 나가 빚을 지고 있을 때 대신 갚아주고.
급기야 전쟁터까지 함께 나갔다.
내가 가자고 하는 대로 가고.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고.
결국엔 날 구하겠다고, 자신을 버린 이 저주받은 땅에 걸어 들어왔다.
그녀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로제의 심장에서 피가 뿌려지며 온몸을 적신다.
"기억도 못 할 거면서 화를 어떻게 낼 건데..."
로제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야만 한다.
그녀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 모른다면, 알 때까지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녀의 유언이니까.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돌아가기 전까지 내가 알아내야 할 숙제니까.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진 로제의 시체에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린다.
...그전에 복수는 해야겠지.
[지금 당장 로제라는 여자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
로제의 목을 가져오라고 말한 여자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로제를 위해 회귀해야 하기에 전부 없던 일이 될지언정.
내 손으로 로제를 죽이게 만든 그 여자에 대한 복수만큼은 반드시 할 것이다.
로제의 목을 들고서 천막을 빠져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으...아..."
날 보고 놀란 얼굴을 한 여자아이.
바닥에 넘어진 채 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 있는 쿠레아.
로제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성문을 향해 걷는다.
"...꺄아!!!!!"
"로제님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
무기를 챙겨 들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타인이 죽였다고 해서 타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기 위해 그들의 공격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 자체가 자살 행위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다가오지 마. 부탁할게"
그녀는 인망이 높은 사람이다.
예전에 봤던 그녀의 용병 단원들도 그녀를 무척 잘 따랐는데...
이곳에 있는 제국민들도 무척 그녀를 잘 따랐던 것인지. 사방에서 그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달려든다.
죽이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나에게 그들을 죽여야 할 의무는 없다.
[지금 당장 로제라는 여자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
그러니...나는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년만은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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