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2화 〉 LEVEL 5.5 (5) (82/87)

〈 82화 〉 LEVEL 5.5 (5)

* * *

.

.

.

문득 내가 이곳에 오기 전.

내가 만든 소설 속이 아닌 진짜 현실 세계에서 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

방구석 폐인 새끼.

아무도 보지 않는 글만 싸지르는 병신.

사실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디아나가 나를 수도 없이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로제를 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라일라를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벨라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내 눈앞에 거대한 벽이 세워지면.

나는 순식간에 무너져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는 세계에 홀로 서 있다.

가만히...

홀로 서 있다 보면, 자꾸 떠오른다.

잃어버린 것들.

놓쳐버린 것들.

그렇게 수도 없는 후회를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금 일어서 과거로 돌아간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애초부터 나는 그런 새끼였다.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하는 주제에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하는 병신.

그래서 누구와도 관계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벽을 세웠다.

현실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그저 나만 상처받고 끝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곳에서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다.

히로인들의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어서 일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회귀를 할 수 있어서 일까?

그것조차 아니라면, 아직도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줄 아는 걸까?

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갔다면,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샤를을 죽이고 싶어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저히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멍청하게 샤를의 앞에서 그녀에게 수십번이고 적의를 들어냈다.

어린 애새끼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나는 감금당했다.

꼴사납다.

로제의 목을 들고 이곳에 오면서 수도 없이 죽이겠다 다짐했는데.

내가 한 짓이라고는 그저 애새끼처럼 죽으라는 말을 내뱉는 것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병신은 아니었는데.

마족과의 전쟁할 때와 디아나에게 복수할 때에는 그래도 없는 머리 잘 굴리며 감정을 최대한 억눌러 계획했던 대로 일을 치렀었는데...

내 병신같은 행동을 막아줄 로제가 더는 내 옆에 없어서일까.

감정에 못 이겨 일을 그르쳤다.

또각또각 거리는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귀를 울린다.

매일 일정 시간만 되면 들려오는 소리였기에 나는 그대로 드러누운 채 천장을 바라본다.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여자의 목소리.

"오늘도 안 드셨네요"

"....."

"엘린 자매분들께서 많이 걱정하시고 계세요"

사람의 피를 먹는 것에 거부감은 없다.

전쟁터에서 내가 죽인 사람의 숫자만 몇인가.

뱀파이어로 살아온 일 년간 수도 없이 인간의 피를 마셔왔기에 이제 와서 피를 마시는 것을 역겨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마시지 않는다고 하시더라도, 죽지 못하실 거에요. 한계가 다가오시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를 탐하게 되실 테니까요"

나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고 말하는듯한 여성의 목소리에 나는 드러누운 채로 고개만을 살짝 움직여 여성을 바라본다.

이곳의 시녀인 걸까?

메이드 복을 입은 채 쪼그려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뱀파이어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본다.

"여왕님에 대한 증오를 푸신다면, 금방 풀려나실 거에요. 다행히도 당신은 엘린님과 엘리님에게 총애를 받고 계시니까요. 물론, 에아님도 당신을 무척 찾고 계세요"

"......"

"그분들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셨을 거에요"

"마지막엔 죽을 수 있었겠지"

내 말이 끝나자 들려오는 조그마한 여성의 웃음소리.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철창 바깥에 다소곳이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녀를 마주 본다.

메이드 복을 입은 시녀의 모습을 마주하니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 누구보다 메이드와 어울리지 않는 여자.

필요할 때에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내가 가장 밑바닥에 떨어져 필요가 없어질 때만 되면 나타나는 여자.

최악을 경험하고 있을 때. 항상 그보다 최악을 경험하게 만드는 여자.

그리고, 내가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여자.

"엘리제"

"네, 영원한 주인님의 노예. 엘리제에요"

"이제 와서 왜 나타난 거지?"

"그야..."

"이상한 소리 할 생각하지 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나타난 거냐고 묻는 거잖아. 네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최악이야."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게 만든 목표는 내 안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뱀파이어가 되어버려 멋대로 죽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거기다...로제가 죽었다.

"어머, 우리 주인님.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지랄하지마"

"그치만, 이렇게 된 건 전부 주인님이 자초하신 일 아닌가요? 저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

"하긴, 저 같은 노예에게 화를 내셔서 주인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얼마든지 화를 내시는 게 맞긴 하죠"

"이제 와서 나타난 목적이 뭐야"

"...이렇게 되는 건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감옥 안을 울린다.

늘 보이던 장난 가득한 고음이 아닌, 훨씬 낮은... 것이었다.

"그 여자가 주인님의 손에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최악이에요"

"...뭔지는 몰라도 잘된 일이네"

눈앞에 있는 여자가 싫어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 되었던 나에게 올바른 방향일 것이다.

"그거 알아요? 이대로 이야기가 쭉 진행되면, 주인님은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예요"

"......"

거짓말로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믿는 것부터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그런데도 거짓말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로제는 이것을 바라고 죽었던 것일까?

로제가 이 여자의 생각을 읽고 그런 행동을 벌였을 리가 없지만, 적어도 로제의 말대로 나는 평생 죽지 않을 수 있게 되었나보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그건 주인님도 싫으시잖아요"

"네가 싫은 거겠지"

"그러면, 그 여자를 죽은 채로 두실 생각이에요? 설마?"

"......"

"아까보니까.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몸만 땅에 묻혀가던데... 우리 로제의 머리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씨발년"

"어맛! 그런 무서운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못 본 사이에 입이 아주 험해지셨어... 옛날에는 엄청 마음 약하고, 누구든 지켜주려고 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멋있는 남자였는데. 입도 험해지고, 자신을 좋아하는 소중한 여자를 버리려고 하시고... 변했어요"

"적당히 해..."

"그래도, 말만 그렇지. 속마음은 아닌 거 다 알아요. 저는 주인님의 메이드니 전부 알 수 있답니다"

얼마 전이었다면, 그녀의 장난 같지도 않은 말에 조금은 어울려줬을 법하지만...

시답잖다.

...입에 담는 모든 것이 거짓말.

이 여자에게 무엇인가 부탁해봤자.

나는 지옥 구렁텅이로 더욱 떨어질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 여자를 이런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은 애초에 나였으니. 그녀를 원망해도 나를 원망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말을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다시금 몸을 차가운 바닥에 뉘어 그녀에게서 몸을 돌린다.

"걱정하지 마세요"

"......"

"저는 착한 메이드니. 주인님이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드릴 테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마"

"아~ 세상에 이렇게 착한 여자가 대체 어디 있을까요? 조금 반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또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드러누워 있던 내 몸은 어느새 철창에 붙어 팔을 내민 채 그녀의 목을 잡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잖아. 얼마나 나를 괴롭히려는 건데. 너한테 당한 것만 수십번이야. 이제됬잖아. 이 정도 보여줬으면 된 거잖아. 못해. 못한다고."

그녀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어 그녀의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해보지만, 그녀는 평온한 얼굴을 한 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애초부터...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대체...뭘 하려는..."

쾅.

거대한 폭음에 말을 멈추었고, 곧이어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주인님이 간절히 바라는 걸 해드리려고요"

"무슨 말을..."

"마침, 주인님이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아이가 제 신체를 도둑질 해갔더라고요"

"너..."

"마침, 이 주변에서 날뛰고 있기도하고...그냥, 살짝 건드려주기만 했어요. 어차피 알아서 자멸 할 테니. 그 아이도 주인님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기뻐할 거에요"

그녀의 목을 조르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엘리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째서인지 이해해버린다.

그녀가 말하는 아이가 라일라라는 것을 깨닫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라일라가...깨어났어?"

"물론이죠. 그 아이가 깨어날 걸 알고 계셨잖아요. 당신이 구해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전부 알고 계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부서질 것이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아이는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수다가 육체가 힘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자멸하게 될 것이다.

라일라가 얼마나 끔찍하게 죽어가는지 수도 없이 봐왔다.

그래서... 도저히 라일라가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해 매번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죽였다.

"멋대로 제 것에 손을 댔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죽는 건 오히려 행운인 거죠"

"라일라는 원한 적 없어"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주인님이 늘 만하잖아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결과가 중요하다. 늘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서 부정하시는 거예요? 그 아이의 가슴에는 그녀의 심장 대신 제 것이 있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에요"

그녀의 말과 함께 또다시 위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온다.

"...피해자일 뿐이야"

"저도 그렇게 딱하게 굴 생각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그저 그 아이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 것 뿐이랍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 정도면 됐잖아... 이 이상 얼마나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데..."

내 말에 그녀는 늘 보여주던 환한 미소를 내비친다.

"그치만, 절 이렇게 만드신 건 주인님이잖아요"

"......"

"주인님께서 미워하시는 샤를이나 디아나도 주인님께서 만드셨어요.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로제나 벨라트릭스도 주인님께서 만드신 아이들이에요"

"......"

"그러니 책임지셔야죠. 주인님이 외면하든. 받아들이든.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큼은 전~부 받아들이셔야 되는 거잖아요"

일방적인 말이었다.

나로서는 그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냐는 그녀의 말을 반박할 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불쌍한 우리 주인님..."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인다.

내가 만들었다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얼마든 부정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글을 그런 식으로 썼겠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지 않은가.

수도 없이 고민하고, 고뇌해가며 만든 세계였고, 히로인들이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부정하면, 이 세계와 그녀들은 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차라리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설 속에 떨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귀를 계속해서 울리는 폭음과 뱀파이어들의 비명.

내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엘리제는 이미 사라졌었고, 열려있는 철문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 철문 밖으로 나는 무심코 나가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버린 복도를 천천히 걸어간다.

이 성 전부를 삼키고 있는 영역의 주인을 보기 위해 계속 걸었고, 곧이어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

기억 속에 있는 모습보다 훨씬 커다란 키.

기이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이상하게 붙어있는 다리와 팔.

그런데도 아직은 앳돼 보이는 옆모습.

내가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녀의 푸른 눈이 나와 마주친다.

초점이 하나도 잡히지 않은 눈이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그녀의 푸른 눈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아...빠..."

그녀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

그녀가 나를 그런 식으로 불렀던 것은 이미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어째서 저 아이는 나를 저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일까.

엘리제가 한 짓일까?

...아니, 만약 그랬다면, 엘리제 또한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라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또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찾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라일라의 몸이 점차 쓰러지고 있는 것과 내가 그녀를 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찾아왔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만, 내 머릿속엔 온통 '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체 왜?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저, 옛날 나를 보자마자 죽여달라 부탁했던 그 모습 그대로 이 아이가 있을 거라 생각해왔다.

그러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버려지는 게 무서워서 그랬어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아무 말이라도... 그녀에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라일라가 2년이 넘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절 볼 때마다...힘들어하는거 알고 있었는데...그래도..."

같이 있고 싶었어요.

라일라는 그렇게 옛날 나와 함께 살던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표정으로 내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절대 함께 회귀해서는 안 되는 아이가 함께 회귀해버렸다는 사실에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런데도 아직 따스한 그녀의 몸이 내 정신을 자꾸만 일깨운다.

그녀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생각한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나는 죽어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장 돌아가야만 한다.

몸을 천천히 일으켜 라일라를 안은 채 뱀파이어들의 시체가 즐비한 복도를 천천히 걷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