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LEVEL 5.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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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났다.
뱀파이어가 된 지 대략 3년은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 죽지 못했다.
"거참 쉬엄쉬엄하라니까"
"아저씨. 오셨어요? 방금 밭 보러 간다고 하시더니. 금방 오시네요"
이제는 무척 익숙해져 버린 옆집 아저씨의 목소리에 나는 잡초를 뽑던 몸을 일으켜 어색하게 지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가 쌓아 올린 경지에 비하면 이 정도 일은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있을테지만, 뱀파이어의 육신으로 태양 아래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조금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네는 뭐 그리 바쁜 일 있다고, 매번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일 하는 건가"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살죠. 땅 파서 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저희가 게으르면, 가족들 밥은 누가 챙겨 준답니까"
"...쉬엄쉬엄 해. 우리가 먹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이 먹는 쌀을 공들여 키워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저번에 그런 불순한 생각 품고 계시다가. 기사님한테 한 소리 들은 거 벌써 잊으신 것 같네요"
"끙...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본래 내가 이렇게 농사나 할 사람이 아니건만...쯧"
또, 시작이다.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말일세. 세상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귀족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금화를 쓸어 담던 상단주..."
"암요암요. 30번은 더 들은 이야기지요"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30번은 넘게 들은 이야기다.
한두 번이어야 재미있게 들어주지 3번 이상부터는 뇌절이다.
대충 이 남자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 넘기고 있을 때 즈음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뿐이랴. 내가 제국 황실에 납품한 귀금속만 해도 금화 만 개는 넘을..."
"배급 왔나 보네요"
"잉? 오늘이 배급 날이었던가?"
"형식상으로는 오늘이긴 한데. 기일에 딱 맞춰서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내 말을 증명하듯 저 멀리 산 중턱에 기다란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는 눈이 좋은 건가 귀가 밝은 건가? 저 멀리서 오는 걸 어떻게 매번 아는지. 참 신기하구만"
"...둘다 좋은 편이죠"
"...그 악마 같은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못해도 기사는 됐을 텐데. 자네 같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야"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아저씨는 안 가시나요"
"...가야지. 살려면...가야겠지"
그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뒷말을 붙이며 나를 따라왔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참 더러운 세상이다.
광장에 도착하자 배급을 기다리는 기다란 행렬이 눈에 보였고, 익숙하게 그 꼬리로 향해 배급을 기다린다.
...배급.
2년이 넘도록 이런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이 순간이 될 때마다 참 어색하다.
뱀파이어는 살기 위해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한다.
개체마다 삶에 필요한 피의 양이 천차만별이지만, 그런데도 대다수의 뱀파이어는 일정 기간 피가 없으면 죽는다.
아사.
뱀파이어의 아사는 무척 고통스럽다.
...정말...고통스럽다.
"지랄하지 마!! 겨우 이것만 주면 다음에 올 배급까지 어떻게 버티라는 건데!"
행렬의 제일 앞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온다.
매번 있는 일이다.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지는 것 또한 매번 있는 일.
"제발... 이번에도 못 받으면 저희 딸 다음에 올 때까지 못 버팁니다. 부탁드립니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어 당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한 집의 가장인 남자가 기사의 다리를 붙잡은 채 빌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매번 있는 일이었고, 매번 보는 광경이지만 그가 저렇게 발악하는 것을 어느 정도 공감한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굶주림의 고통을 알기에.
자신의 딸이 아사의 고통을 느끼며 죽게될 미래를 받아들이지 못해 기사에게 간청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럼에도 방관한다.
"일을 하지 않았으면 죽어야지"
당연하다는 듯 매타작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를 정도로 망가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주 보았던 얼굴.
가끔 딸아이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피를 달라 간청했던 남자였다.
그에게 두 번 정도 준 적이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딸 아이와 아내는 태양을 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결국 이 남자는 홀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서 3인분을 소화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이곳에서 뱀파이어들의 1인분이란 인간을 기준으로 6명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니.
인간 18명의 역할을 일반 뱀파이어인 그가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매타작에 기절했음에도 4개의 주머니를 품에 꼭 안은 채 쓰러져있는 남자의 모습.
사람들은 애써 그를 외면한다.
줄이 천천히 줄어들고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늘 하던 대로 가방을 꺼내어 주머니를 담는다.
"그만"
가방에 주머니를 넣던 중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곧이어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뭔데 그렇게나 많이 담아가는 거지?"
"...기준대로 받는 겁니다. 일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 규칙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 누가 봐도 방금 네가 담은 주머니 수는 말도 안 되는 수였다. 3개를 가져가는 게 평균이건만, 너는 지금 10개를 넘게 가져가 놓고 더 담으려고 하고 있지 않느냐"
아무 말 없이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아는 얼굴은 아니다.
기억에 남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여자의 갑옷 정중앙에 박혀있는 마크가 너무나도 익숙해 입을 다문다.
연합국 기사단.
그중 상위 위원 전속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양.
마들렌에게 꼬리를 잡힐 수는 없었기에 평소 하던 것처럼 대충 힘을 보여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곧장 내 앞에 앉아 있는 서기에게로 걸어가 일지를 빼앗았다.
"기준대로 받은 건 맞나보군"
"......"
그녀의 말에 나는 마저 남은 것을 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올렸지만, 그녀에게 손을 붙잡혔다.
"놓고 가라"
"...분명 정당하게 일해서 받는 것임을 확인하셨을 텐데요. 연합국은 일한 만큼 받는 것이 규율이며 미덕이라 들었습니다"
"홀로 소작하고 있는 면적만 1만에 달하며, 그 밖에도 마구간, 건설 및 수리 보수. 그 밖에도 옷과 신을 짜기. 그뿐만이 아니라 대장간 조수까지. 과연 연합국 백성들을 위해 분골쇄신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허나, 과하구나. 너는 이렇게나 피를 가져서 어디에다 쓰려고 하는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이다.
그런데도 괜한 억지를 부리려 하는 기사의 말에 입을 애써 다문다.
이딴 년이 보급에 끼어서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이번 달은 조금 빠듯하게 생활해야 할 것 같다.
"그 악마 같은 여자의 뒤를 이을 셈인가? 또다시 대륙에 피를 보게 할 생각이냐. 너는 악마의 자식이다. 악마의 손에서 태어나 인간의 피를 빨아먹을 때마다 힘을 더해가는 악마. 위대하신 위원장님의 아량이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뼈와 살이 분리당했어야 함이 마땅한 악마가 지난 과오를 잊고 또다시 대륙에 피를 뿌리기 위해 피를 탐하고 있는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냥 배부르게 먹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억측이 과하시네요"
마들렌을 향한 충성심이 심히 높은걸 보니 개새끼가 따로없다.
이곳에서 뭔가 한 건 공을 세우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하다.
얽혀봐야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됐습니다. 남들 받아 가는 대로만 받아 가겠습니다. 일한 것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주기 싫다는데"
...아, 감정이 새어 나와버렸다.
본성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일까.
다행히 기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릴 뿐 나의 말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고, 혹시나 걸고넘어질까 싶어 대충 가방에 담았던 주머니들을 몇 개 꺼낸 뒤 빠르게 몸을 돌렸다.
"평균은 3개인데. 가방에 든 숫자가 좀 많아 보이는군"
"...집에서 기다리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2인분은 가져가게 해주시죠"
더는 다른 트집은 없었기에 가방을 든 채 집으로 향했다.
...참는 것은 쉽다.
하지만, 힘을 가지고 있는데 참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인간을 학살하고, 그 뒤로 오는 군대도 학살하며, 연합국에 있는 모든 인간을 학살해서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피밖에 남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이가 너무 적다.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목재로 지어진 조그마한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조그맣지만, 눈에 띄는 돌이 보인다.
나는 이곳에 라일라를 묻었다.
그렇게나 구해주겠다 맹세한 아이를 나는 이곳에 묻어둔 채 아직도 회귀하지 못하고 있다.
"오,오셨어요. 오늘은 느,늦으셨네요"
내가 오는 소리가 들린걸까?
집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붉은 머리의 여자... 뱀파이어.
"나는 분명히 쳐박혀 있으라 말했는데. 왜 네가 이곳에 나와 있는 거지?"
"너,너무 늦으셔서... 기다리다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거,걱정이 돼서..."
내 눈치를 보며 눈을 위아래로 훑는 모습에 무심코 손이 올라갔지만, 이내 그녀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간다.
이 여자와 얼굴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기에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내 그녀가 피를 섭취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떠올린다.
가방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그녀를 바라본다.
붉은 눈.
붉은 머리카락.
옛날 고고하며 타인을 깔보던 그 눈빛은 어디로 간 것인지 몸을 돌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숙인다.
마개를 열고 주머니를 반대로 뒤집자 바닥에 피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개고생을 하고, 쓸데없는 억측까지 받아 가며 구해온 피를 바닥에 쏟아내자 그녀가 천천히 내 앞에 천천히 걸어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는다.
"가, 감사합니다."
"남기지 마"
"자, 잘먹겠습니다..."
이딴 말 시킨 적 없다.
그저 주머니를 건네주기도 싫고, 곱게 먹는 것도 보기 싫었기에 바닥에 쏟은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잘 먹겠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싫은 것을 넘어 역겹다.
당장이라도 발밑에서 붉은색 액체를 탐하고 있는 여자의 머리에 발을 올려 터트려버리고 싶지만, 나에게 그러한 행동은 금지되어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당장 저 여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알려 저 여자를 죽게 만들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나는 그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이는 꼴은 대체 무엇인가.
그 사이에 동정심이라도 생긴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내 손으로 복수하고 싶은 건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끼이익.
나무문 소리와 귀를 울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그게..."
"내가 분명히 아무 데나 처박혀서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가,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그래...다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저 첫 단추를 잘못 꿰매어 버린 것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감사? 무슨 감사? 네 덕분에 아직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새끼한테 무슨 감사? 니가 보기엔 내가 웃기지? 그래. 니 같은 년을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 꼴이 참 우스울 거야"
"...아니...그...그런...뜻이 아니라..."
그래, 이 여자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역겨운 표정이 문제였다.
"사실대로 말해. 기억나지? 기억나잖아! 대답해. 샤를!"
"죄,죄송해요...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을게요... 잘못했어요... 화내지 말아 주세요..."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래?"
"......"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다 끝나?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 지금에 와서 그 지랄이냐고. 이건...너무 작위적이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기억을 못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이 여자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참담한 기분을 그녀는 십 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에게 복수해야 하는 내 심정을 단순히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을까.
"기억 못할 거면. 나한테 당장 죽으라고 말해"
"그...그건..."
죄송하다는 말만 하던 그녀는 나의 죽으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붉은 눈을 커다랗게 떠 보인다.
"한마디면 돼"
"......"
"그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차마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용서.
그녀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것이다.
평생 원망받고, 평생 고통받아야 할 그녀에게 용서라니.
내 손으로 로제를 죽이게 만든 여자에게 용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
"...죽으라고 말해"
"제가…. 잘못했어요..."
"말하라고!"
"...죄...송해요..."
침대에 앉은 채 머리를 싸맨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일까.
당장이라도 이 여자가 죽도록 만들어야 하건만.
나는 지금 왜 이딴 여자를 아직까지 살려두는 것일까.
"니가 무슨 잘못 했는지나 알아?"
"그,그게..."
"나가"
"......"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아마...
나는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채로 인간들 손에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병신새끼]
오늘따라 로제의 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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