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 LEVEL 5.5 (7) (84/87)

〈 84화 〉 LEVEL 5.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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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복수하려고 했다.

내 손으로 로제를 죽이게 만든 여자를 쉽게 죽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회귀하게 되면 전부 없던 일이 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쓰러져 기절해있는 샤를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본래라면,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내 손으로는 그녀를 죽이지 못하니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사람들에게 던져주어 마녀사냥을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불에 태우던. 칼로 찌르던. 그녀를 어떻게 죽이든 간에 그녀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여긴...어디...인가요?]

남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웃긴 이야기였지만, 나에게 있어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죽이는 것을 망설인 것은 아니다.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던 진짜로 기억을 잃었던 그녀가 죽어야만 나에게 걸린 주박이 풀릴 테니.

그녀는 죽어야만 했다.

[살려주세요]

사람들이 그녀를 악마라 부르며 돌을 던질 때.

나를 보며 도와달라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역겨움을 느꼈다.

[잘못했어요]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나라를 잃은 피해자들의 앞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발밑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눈을 흘겼고 사람들의 비난에 수도 없이 용서를 구했지만,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동정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를 제외하고...

원망받을 수 밖에 없는 스토리를 짠 것은 나이니...

불에 타서 죽어야 할 것은 그녀가 아닌 나였다.

그런데도 그들의 손에 죽을 수 없는 것은 나를 죽일 수 있는 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녀...오세요"

"꼴도 보기 싫다고 말했을 텐데"

"...죄송..."

"부탁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나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죽으라는 말밖에 없으니까"

눈과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는 샤를에게서 눈을 떼고 집을 나온다.

나는 얼마나 시간을 낭비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오늘도 한가롭게 농사나 짓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건만 하나도 즐겁지 않다.

샤를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에 묻혀있고, 라일라가 어째서 나를 아빠라 부른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진짜 내가 정신이 나간 건가?

뱀파이어가 되어 여왕을 지키기 위해 뇌가 오염이라도 된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데도 내가 너무 한심해서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자네..."

"아... 로한씨? 어쩐 일이세요."

뒤를 돌아보니, 낯이 익은 얼굴을 한 아저씨가 나에게 용무가 있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이곳저곳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보니.

그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니 용무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정말 미안하지만... 자네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번에는 저도..."

"이렇게 부탁함세! 제발 하나면 되네. 하나만... 제발. 나는 한 입도 안 댈걸세. 제발, 딸아이 목숨만 좀 살려주시게나"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나에게 빌고 있는 남자를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린다.

샤를이 그날 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몇 개 남으셨나요"

"한 개 뿐일세..."

어제 받자마자 세 가족 모두 하나씩 마셨나 보다.

하긴, 저번 달에도 나에게 받아서 겨우 버티셨으니...

"딸은 물론이고 부인도 저번 달부터 못 움직이신다 들었어요. 1개를 가지고 세 명에서 한 달..."

"......"

"최소한 두 명은 죽어야겠네요"

"딸아이만...살리면 되네...그런데..."

"다음 달이 문제인 거죠? 하긴, 다음 달에도 저한테 무릎 꿇고 빌 사람이 있어야 되니. 로한씨나 아내 둘 중에 한 분은 살아계셔야겠네요"

"그럴 일 없을걸세! 다음 달에는 어떻게든 할당량을 채울 테니. 자네에게 부탁하는 일은..."

"그래 봐야. 의미 없어요. 평생로한씨 딸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보급 때까지 아사의 고통만 느끼다가 결국 못 버티고 죽을 거에요"

내가 나눠준다는 소문을 듣고 저번 달에도 빌려 간 전적이 있으니 이 남자가 나에게 올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피를 요구하는 양이 다를뿐더러...

날이 갈수록 피의 질은 떨어져만 간다.

애초에 사람의 피는 뽑은 이후부터 빠른 속도로 그 신선도가 떨어진다.

며칠만 지나면 액체가 아닌 고체가 되어버릴뿐더러, 아무리 물에 섞어서 마셔도 그 효과는 반 토막 그 이하로 떨어진다.

앞으로 30일 가까이 버텨야 하는데.

나에게 남은 건 이제 5개.

남에게 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렇다고...죽는걸 지켜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살릴 수 있는데... 내가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그래도 안 되면..."

"그래도 안 되면 저한테 빌면 어떻게든 해결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겠죠"

"미안하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누가 그를 이렇게까지 나약하게 만든 것일까.

샤를? 인간?

아니면...내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하나도 모르겠다.

"가방에 있을 테니. 가져가실 거면 가져가세요."

내 말에 헐레벌떡 일어나 가방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는 가방 안에 있는 두 개의 주머니를 가슴에 꼭 품고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무척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채로 있던 그는 곧장 행복한 미소를 하고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방금 습득한 주머니를 숨길 곳으로 가는 것이겠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리춤에 차여진 물주머니를 입에 넣는다.

분명,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고 있음에도 무척 목이 마르다.

*

본래, 뱀파이어는 낮에 자고 밤에 일을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뱀파이어들을 감시해야 하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낮에 일하는 것이 감시하기 수월했다.

효율은 안 나올지언정. 우리들 중 한 명이라도 이곳을 도망치게 되면, 뱀파이어의 숫자는 금방 증식되기에 우리는 낮에 일하고 저녁에는 육체의 회복에 온 힘을 써야 한다.

그날 잠을 못 자 육체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다음날 태양 빛에 못 이겨 쓰러지게 될 테니까.

"언제...오셨어요? 오,오신줄 알았으면... 여,여기는 추,추워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무리 무시하고. 아무리 욕을 내뱉어도. 그녀는 여전히 말을 건다.

2년이나 이렇게 반응 없으면, 적당히 그만할 줄 알아야지. 참 독하다.

"혹시... 저 때문이라면... 제가 밖에 있을게요..."

"그럴 필요 없어"

"......"

"시간 되면 알아서 들어갈 거야"

"저번에도...그렇게 말씀하시고...밤새..."

밤늦은 시간이 됐음에도 내가 밖에 나와 이러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에는 잊어서는 안 되니까.

"무,무척 소중한 분이셨나 봐요... 라일라...라는 분..."

무덤에 새겨놨으니 그녀가 라일라의 이름을 아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소중한 분이...아니셨...나요? 자주 여기 나와계셔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어요..."

"불쌍한 아이였지"

나에게 라일라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애초에 라일라가 소중했더라면, 내가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바라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애였어. 고작 해봐야 10살 남짓한 나이인데. 가장 바라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곧바로 죽는 거라고 대답할 것 같더라."

"......"

"그런 애를 보고 동정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잖아. 그런데 나는 그러면 안 됐어"

다른 사람은 다 돼도 나만큼은 그래서는 안 됐다.

"그 아이의 입에서 더는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순간부터 나는 그 아이의 전부가 된 거야"

그래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말을. 금방 찾아가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잖아. 이 병신 새끼는 진즉에 잊어버리고 지 편하게 사려고 도망쳤는데"

이보다 불쌍한 아이가 있을까.

"만약, 그 아이가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손에 죽은 기억만 수십 개야. 그런데 걔는 나한테 기억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했어. 어쩐지 회귀할 때마다 입에서 죽겠다는 말을 그만두는 날짜가 다르더니. 이렇게 보면 참, 영악해... 눈치도 빠르고..."

그녀가 사람들의 눈치를 잘 보는 것은 그 누구보다 라일라의 설정을 짰던 내가 제일 잘 알지만...

몇 번을 죽었음에도 아닌 척 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때 말했으면 내가 포기했을 텐데... 구하는데 너무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차라리 포기하라고 말했을 텐데..."

정말, 라일라는 살고 싶었기에 입을 다문 것일까.

"그런데, 내 입으로 그 아이한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해버렸거든. 그러니까... 쭉 기다렸을 거야"

사지가 찢겨 나가고 매일같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곳에서 라일라는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얼마나 회귀한 걸까?

그저 내가 회귀하면 무조건 함께 회귀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라일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리라.

거기다가... 더는 회귀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겨우 고통에서 해방된 아이를 다시 그 지옥으로 집어넣는 꼴이니...

하지만, 라일라를 아무리 불쌍히 여긴다고 하더라도 로제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나는 다른 트리거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회귀를 하야만 한다.

"그러니까... 샤를. 부탁할게"

"......"

"죽으라고 말해줘"

"...죄송해요... 저는... 못해요..."

"왜, 못해? 어차피 난 회귀해. 너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너만 입을 열면 모두가 행복해지는데 왜 매일같이 안 한다고만 하는 건데"

비석에서 눈을 돌려 샤를을 바라본다.

그녀의 붉은 눈이 달빛에 반사돼 새빨갛게 빛났지만, 그녀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나타내듯 파르르 떨렸다.

"마,만약 돌아가시게 된다면, 당신은 저를 어떻게 할 건가요"

"그거 때문이라면 아무것도...하지 않아"

어차피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내가 그녀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옆에 있고 싶어요. 가,같이 있고..."

"샤를"

"......네"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토가 나올 것 같다.

"뭐든 상관없으니. 죽으라고만 말해. 니가 무슨 지랄 같은 소원을 빌든 간에 용서해줄 테니까. 죽으라고만 말해"

"......"

"니가 사람들을 뱀파이어로 만들고 죽이고 별 지랄을 했어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 다 몰라도 나만큼은 이해할 수 있어."

내가 쓴 소설이니까.

"로제가 죽은 것도... 네 소중한 아이인 사라를 로제가 죽였으니 그에 대한 복수로 로제를 내 손으로 죽이게 만든 것도... 어떻게든 용...서할게. 아니, 용서하도록 최대한 노력할게"

그래... 그녀의 입장에서는 봤을 때에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제발...죽으라고 말해줘...부탁이야"

"......"

"말해!!!"

지금까지...

2년 동안 그녀에게 이렇게 부탁한 것만 몇 번일까.

이번에야말로 화를 내지 않고, 부탁하려 했다.

...그러면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바뀔까 싶어...

그런데 로제에 대한 이야기가 내 입에서 나오니 내 손으로 로제를 죽였던 기억이 떠올라버려 애써 억누르던 감정이 튀어나와 버렸다.

"더는 못 기다려. 이번에 말 안 하면 진짜 죽일 거야"

"......"

"저번처럼 구하는 일은..."

"못하시잖아요..."

"......"

"당신은... 저,절... 죽게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잖아요"

"네가 뭔데 아는 척하는 거냐"

"아무리 회귀한다고 하더라도. 혼자밖에 기억 못 한다고 하더라도, 전부 있었던 일이라 여기시잖아요."

"역겨우니까. 입 다물어"

"처,처음 눈을 뜰 때부터 당신이 저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죽기 싫어서... 살려달라고 수도 없이 외쳤는데... 인간들한테 절 넘겨주는 순간까지... 당신은 저를 엄청...미워하셨...어요"

"......"

"지금까지도 미워하셔서... 그래서, 저는 지금도 당신의 이름을 몰라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미워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가지고 계시면서 당신은 그날 절 구해주셨어요"

평소에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내 눈치를 무척 많이 봤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대화하기를 늘 꺼려왔기에 그녀는 말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2년 동안...쭉 당신만 봐왔어요... 여기에 숨어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당신에 관한 생각뿐인걸요."

"피를 잔뜩 들고 오셔서 남들에게 전부 나눠 주시는 걸 보고 바보같이 착한 분이라 생각했어요"

"남들에게 전부 주고 정작 자신은 2년 동안 매번 배고픔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우둔하다 여겼어요."

"자기는 그렇게 매일 아파해놓고... 저 같은 쓸모없는 여자가 괴로워 비명 지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제 몫의 분은 늘 늦지 않게 주셨어요."

"그렇게나 미워하시면서... 저 같은 거 보기도 싫으시다고 하셔놓고 한 번도 절 가두신 적도... 입을 막으신 적도 없으셨어요... 저와 손이 닿는 것조차 싫으시면서..."

"제가 기억을 잃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미움받는 것이 싫으신 거잖아요. 증오하는 여자조차 늘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세요"

"전부 없던 일이 되더라도. 자기 혼자 기억하는 기억을 진짜 있었던 일이라 믿고 계시잖아요. 전부 진심으로 마주하시잖아요"

"저,저는... 차라리... 당신이 저를 죽도록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어요"

"이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도리어 제가 이렇게나 이기적이기에 당신에게 미움받았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렇게 당신 앞에서 죽어가게 된다면... 저는 평생 당신의 기억 속에 남을 거에요"

"미움이 아닌...죄책감으로 남게 된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절 다시 찾아주시겠죠...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당신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칠 거에요."

"그렇게 해서 단 하나라도 당신과 함께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당신에게 죽으라는 말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은 거에요"

이기적인 년.

"당신은 엄청나게 듣기 싫은 말일진 모르겠지만, 정말..."

"함께 있고 싶어요..."

"평생 미움받아도 좋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겐 이것밖에 없어요. 그저 옆에 두겠다. 약속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두겠다고 말씀해주시면...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아무 소원이나 내뱉어보라고 했더니. 진짜 아무 말이나 내뱉는구나...

이 여자 참, 지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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