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 LEVEL 5.5 (8) (85/87)

〈 85화 〉 LEVEL 5.5 (8)

* * *

[함께 있고 싶어요]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착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현실에서 들을 법한 말인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대체 어떻게 나한테...

당시에 너무 화가 나서 입이 벌려지지도 않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표정. 애틋한 눈동자. 떨리는 목소리. 그녀의 모습 중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호의가 계속되니 내가 호구로 보였나 보다.

...사실 호구가 맞다.

세상에 이런 새끼가 또 어디 있겠는가.

둘도 없는 친구를 내 손으로 죽이게 만든 여자를 동정이나 하는 이런 병신 쓰레기 같은 새끼가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가 없다.

그녀의 거부로 인해 또 다시 쓸데없이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

시간은 늘 내 편이기에 시간이 흐른 것은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아득바득 회귀를 재촉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내 기억이 점차 풍화되는 것 때문이었다.

로제와의 약속.

다졌던 각오.

혹여 그 기억들이 조금이라도 사라질까 싶어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로제와 라일라가 땅에 묻혀있는 것도...죄책감이 들고...

떠올려보면, 엘린 자매와 사라가 죽은 것도 마음에 걸린다.

...관계를 맺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련해지는 건 내가 그만큼 약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겠지.

어째서인지 회귀하면 회귀할수록 몸만 강해지지. 정신은 더 약해지는 기분이다.

"자네는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하니 있는가?"

"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감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다음"

내 앞에 사람이 기사 앞으로 나아가서 주머니를 받아 가는 모습이 보인다.

다음이 내 차례인가.

매달마다 하는 짓이지만. 이 시스템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한마을에서 사는 사람들만 보급을 받는데도 반나절 이상이 걸리니.

보급을 받기 위해 태양 아래에서 반나절 가량을 버텨야 하는 뱀파이어들 입장에서는 보급 받는 게 일보다 더 힘들 지경이다.

거기다 사방에서 기사들이 칼을 꺼내 들고 있으니 일반적인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신적으로도 압박이 클 것이다.

"다음"

내 차례를 알리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간다.

기사들을 흘낏해서 보니 저번 달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예삐...씨 맞죠?"

"네"

이름을 바꿀까 말까 몇 번이고 고민했는데.

그냥 마땅히 바꿀 이름도 없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고 있다.

사실, 내 이름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피식 웃는 거 보면 내 이름 하나로 누군가를 웃길 수 있어 오히려 앞으로 쭉 예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도 많으시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주위 눈치를 봤다.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겠지.

"무슨 일이지"

아니나 다를까.

저번 달에 내가 많은 양의 피를 가져간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었던 여기사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냥 평균으로 주시죠"

"네..."

마들렌을 신처럼 모시는 듯한 저 여자에게 이번에도 시비가 걸리는 건 사양이었다.

아무리 모실 게 없어도 그렇지. 그 여자를...

내가 지금까지 봤을 때. 여신이나 마들렌이나 그년들을 따르는 연놈들은 다 비정상이었다.

"잠깐"

"또... 이번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주머니 6개를 받고, 뒤를 돌아가려는 사이 저번과 똑같은 목소리와 말투로 그녀는 멈춰 세웠다.

"3개가 평균이다. 나머지는 내려놓고 가거라"

"가족이 있습니다...저번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 또한 나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듯 보였다.

...뭔가 그녀의 눈이 기분 나쁘다.

마치, 악의가 깃든듯한...

그녀는 내 말에 자신의 검집에 들어가 있는 검을 빼 들고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물어보니 아니라고 하던데. 가족이 있는 거 확실한가?"

"...검은 집어넣으시죠"

"악마의 자식 주제에 감히 나에게 명령하는 건가? 그리고, 너 같은 불순 종자가 갑자기 무슨 짓을 벌일지 알고, 검을 집어넣으라는 거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목에 천천히 칼을 가져다 대었다.

...급발진이다.

이건 누가 봐도 이 여자의 급발진이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이다.

"필"

"네, 단장님"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보통 목에 칼을 들이대면 조금이라도 겁을 먹는 게 당연한데..."

그녀는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서 부하와 대화하는 듯했으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누가 봐도 전장을 조금이라도 구르지 않고서야 나오지 않는 담력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보이는 마나는 평범한 수준"

"...그만두시죠"

"맞아. 그 눈이야.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나와 눈을 맞출 수 없다. 악마 새끼들은 인간과는 다르게 본능적으로 알거든. 내가 자신들보다 강자라는걸. 그런데, 이놈은 아니다."

"제 눈이 문제라면, 앞으로 깔고 다닐..."

"아니다. 네가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사람일진대. 어찌 너희 악마 놈들과 똑같은 짓을 하겠느냐. 인간은 악마와는 다르게 공평한 법과 규칙이 있으니 그것대로 해야지"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는 오늘은 물론이고 저번 달에도 족히 열두 개의 주머니를 챙겨야 했을 것이다.

...이것만보더라도 인간이나 뱀파이어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것 하나 만큼은 전혀 다를 바 없다.

"저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이름이 뭐였지?"

"......"

"이름이 뭐냐 물었다"

"베티라는 이름입니다. 거기 쓰여 있을 텐데요. 제 가족으로 나와 있으니 찾기 쉬울 겁니다"

"네 이름이 예삐. 풉..."

네년 웃으라고 지은 이름 아니다.

"누가 봐도 가명인데. 어찌 의심을 안 했을까"

그녀의 눈초리가 기록을 담당하던 인간에게로 넘어가자 그는 기겁하며 양손을 모아 잘못했다 빌기 시작했다.

"되었다. 어디 보자. 베티..."

심각하게 잘못 걸렸다.

2년 동안 잘 숨어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표정 관리가 문제였던 걸까.

"2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을 하지 않았다...라... 네 여동생은 참, 곱게 자랐나 보구나. 손에 물도 묻히기 싫은 오라비의 마음이 보여서 참 마음이 따뜻해져"

"......"

"다시 한번 묻겠다. 너에게 가족이 있는가"

"......"

"너 같은 영악한 악마 새끼가 곳곳에 숨어있기에 내가 이런 시궁창 같은 곳까지 와야 하는 거다. 위원장님의 마음도 모르고 이용만 하려는 악독한 악마 놈"

최악이다.

"인간의 피가 그렇게 탐났더냐!"

"그렇게 없는 여동생 만들지 않아도 규칙대로 받는다고 하면, 저는 많은 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네 말대로라면 2년 동안 네가 주는 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나태한 악마가 이 마을에 있다는 말이겠지"

"......"

"병사 중 이 자의 혈육을 본 자는 손을 들어라"

샤를의 얼굴은 연합국 전역에 퍼져있어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죽어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해왔다.

그러니 있을 리가 없다.

"마을에 사는 악마 중에 한 명이라도 이자의 혈육을 본 자가 있다면, 나오거라. 기사들의 피를 뽑아서라도 넉넉히 챙겨주겠다"

...죽여야할까.

아니면, 도망쳐야 할까.

죽인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죽이지 말아야 할까.

도망친다면,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야밤에 검문을 담당하는 놈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필시 뇌물이 오갔을 것이다"

"부르지 마시죠. 여동생은 없습니다. 피를 더 받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족 묶음 하면 혜택 있는 줄 알았다고 할까.

통신사도 가족끼리 묶으면 혜택 있던데...

"생각해보니..."

말을 하던 중 바닥으로 누군가 흙먼지를 날리며 뒹구는 모습이 보여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얼굴.

항상 우리 집 쪽을 순찰하는 병사였다.

"잡아 왔습니다. 이놈이 예...저놈 집을 검문하던 놈입니다"

예삐를 왜 예삐라고 말을 못 하니.

남자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을 보였다.

"너는 저 남자의 혈육을 봤나?"

"네,네!! 저, 전부 검사했습니다. 저 남자의 집도 확인했고, 분명 제 눈으로 혈육이 있는걸 확인했습니다"

"어떤 얼굴이더냐"

"그게..."

숨기는 건 이제 포기하자.

기사단은 전부 죽여야 될 것이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시간은 벌어야 되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전부 죽여 야만 한다.

그게 내가 잡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차라리죽이는 것보다... 마들렌의 아량을 기대해볼까?

그래... 그게 나을 것 같다.

"천연두에 걸린 적이 있어... 얼굴이 무척 험하다는 이유로... 늘 가리고 나와서..."

"뱀파이어가 병에 걸린다? 다 죽어가던 늙은이를 한창때의 나이로 회춘하게 만드는 악마들이 병에 걸렸다는걸 믿..."

"잠시만요"

실례한다는 의미로 그녀 앞에서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뭐냐"

"전화 찬스. 가능해요? 마들렌한테 전화 한통하고 싶은데"

"너 지금 뭐라고..."

"예삐라고 하면 아마 모를 거고. 주인공 여기 있다고만 전해주시면 되겠네요"

그녀는 내 말에 순간 얼빠진 얼굴을 보였고, 곧이어 얼굴이 붉으스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너 같은 악마 새끼가... 위원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마들렌님한테 전해주시죠"

"니...놈이...아직도..."

존대를 해줬는데도 문제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그녀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해 내 목까지 드리워져 있는 검을 힘껏 내질러 내 목을 꿰뚫으려 했다.

깡.

피부와 철이 맞닿는 소리라고는 볼 수 없지만, 실제로 그녀의 검은 내 피부를 뚫지 못한 채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네놈...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그녀의 검에 목이 뚫려 죽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마나를 움직여 막아버린다.

"...악마 놈들. 숨어서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역시 모조리 죽여버렸어야 했다. 다들 뭣들하고 있는 거냐!"

반역이라니... 어쩔 수 없이 숨길 수밖에 없었는데...

힘순찐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강하다는 티를 내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질걸 알고 있었고, 또 하나는...

내가 힘을 쓰면... 그녀들이 내가 있는 곳을 알게 된다.

도둑질이나 사기 등의 혐의로 그녀들에게 쫓기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숨기는 건 꽤 자신 있었는데...

이런식으로 들킬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검을 잡고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보니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억누르고 있던 마나는 내 생존본능을 위해 멋대로 움직일 것이다.

"죽여도 상관없다. 저 악마를 죽이는 기사에게 플라티나 가문의 이름을 걸고 보상을 약속하마."

말해놓고 자기만 뒤로 빠진다.

피부에 칼이 안 들어갈 정도면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단과 나의 전력 차이는 너무나도 명확하건만. 혼자만 살겠다고 뒤로 빠지다니.

저년이 제일 나쁜년이다.

나에게 기사들이 달려들기 전에 2년 만에 영역을 펼쳐본다.

내가 평범한 인간의 몸일 때에는 절대 사용할 수 없었던 마법사들만의 전유물.

"꿇어"

내 말과 함께 기사들은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아악!!!"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중력에 눌린 듯 바닥에 나자빠진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인간부터 시작해 뱀파이어들까지 모조리 몰살시켜야 하는 걸까...

아직, 그것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

나 혼자 도망친다면, 로제가 더는 이 세상에 없으니. 급하게 도망갈 필요는 없지만, 샤를을 데리고 도망갈걸 생각해보면 빠르게 정리하고 움직여야 한다.

샤를을...굳이 대려가야할까.

[함께 있고 싶어요.]

두고 가면... 아마 인간들 손에 죽거나 피를 못 마셔 아사하겠지.

내가 고민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영역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고민한 시간이 1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벌써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렇게나 빠르게 이동할만한 힘을 가진 히로인이 대체 누가 있을까.

...떠오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도 다가오는 속도는 말도 안 되었기에 일단 이 자리를 탈출하자는 생각에 몸을 뒤로 돌렸지만, 내 등 뒤에 그 여자는 이미 도착해있었다.

그 여자...아니...아이.

무척 조그마한 다크 엘프 아이는 낯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너였어"

다크엘프일족이 멸망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아이는 3년 만에 초월자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됐네. 거기다 나보다 강해졌고"

나 없이도 이렇게 잘 큰거 같아 대견하면서도 안타깝다.

얼마지나지 않아그녀의 조그마한 입이 열렸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감정도 없이. 조용히.

"왜. 살아있어"

"...아직 말을 잘못하는 건가?"

"로제. 죽이고. 왜. 너는. 살아있어"

"......"

싸가지 없는 말을 내뱉었다.

싹수를 제물로 바치고 초월자가 된 건가?

아장아장 내 뒤를 따라오던 쿠레아는 대체 어디간 것일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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