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 LEVEL 5.5 (10) (87/87)

〈 87화 〉 LEVEL 5.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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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회귀라는 권능은 죽어야만 발동할 수 있다.

옛날.

디아나에 의해 수도 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겪던 중.

그는 어느 순간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강렬한 소망이 기억을 지우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 외에도 회귀 가능한 시간 중 어느 순간만을 정해서 회귀한다든지.

지웠던 기억을 다시 볼 수 있다든지.

그가 가진 권능의 각성은 꽤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바라는 소망 중에 타인과 함께 회귀하는 소망은 없었을까?

라일라가 고통받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라일라를 죽였다.

로제는 그의 손에 죽는 것을 택했다.

그 두 사람 말고도...

[대신에 라일라. 그 아이 버릴 수 있어?]

[그 아이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 아이를 버린다고 약속해주면, 자기 말대로 할게]

[내가 할 거야]

[내가 하면. 안 아파. 내가 해야 해. 옛날에는. 못했어. 못해서. 아프게 했어. 이번에는 내가 해야 해]

[멍청이라고 해서 미안해. 바보라고 해서 미안해. 또 아무것도 못 해서 미안해.]

그의 손에 죽었던 샤를과 쿠레아 또한 회귀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죽음.

내 손으로 그녀들을 죽였을 때.

비로소 그녀들은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알고 있긴 했지만. 참 좇같은 능력이다.

*

"우웨엑..."

어질어질하다.

3년.

압도적으로 긴 시간이었다.

군 생활보다 긴 3년이라는 시간을 하나하나 곱씹는 듯한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역겨웠다.

피가 튀어 내장을 보는 것이나 전신이 난자당하는 등의 고통이 역겨운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야...

기억을 보는 것이 아니더라도... 수도 없이 겪었던 것이니...

하지만 그가 느낀 감정은 달랐다.

처음 그가 로제에게 그만두겠다 말했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역겨울 정도로 거대한 슬픔과 자책.

그리고 무기력함이었다.

쿠레아가 납치되기 직전에도.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자신의 손으로 로제를 죽였을 때도.

로제의 목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쿠레아가 보았을 때에도.

샤를에게 분노를 표출할 때에도.

그 이후에도...

그는 수도 없이 자신의 무기력함을 자책하고, 슬퍼했다.

당장이라도 정신이 파묻혀버릴 만큼 거대한 감정.

망가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는...

"우웨에엑..."

그것에서 이제야 해방되었고, 헛구역질하며 현실을 자각한다.

아니...

지금 보는 것은 현실...일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처음 보는 풍경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초원.

진한 초록빛이 한가득 땅을 메꾸고 있는 넓은 초원의 모습은 사람을 강제로 나른하게 만들 정도로 평화로웠다.

나는 이곳을 모른다.

살면서 이런 곳을 단 한 번도 본적 없다는 것을 깨닫자.

이내 내가 아직 그의...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하늘 정중앙에서 햇빛을 내리비치고 있었고, 따스한 바람이 몸을 감싼다.

난... 이 감각을 알고 있다.

분명, 예전 완전히 미쳐버린 그가 세상을 멸망시켰던 기억을 읽었을 때. 이러한 생생한 감각을 마주한 적이 있다.

주변을 살펴보자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건축물.

초원 한가운데 홀로 있는 거대한 성.

눈으로 그 성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그가 저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조물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알게 된다.

그때 보았던 성과 흡사하게 생겼다.

정신이 돌아버린 그가 저 성안 옥좌에 앉은 채 그저 손가락질로만 세상 전부를 파괴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성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걷는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여자 목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자주 들었던 엘리제의 목소리.

저 복도 끝에 있는 히로인이 엘리제라는 생각에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이해 못 할 기억들이 스쳐 간다.

[그거 알아요? 이대로 이야기가 쭉 진행되면, 주인님은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착한 메이드니. 주인님이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드릴 테니까요]

[주인님이 간절히 바라는 걸 해드리려고요]

그때 느꼈던 주인공의 절망을 분노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주인님이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아이가 제 신체를 도둑질해갔더라고요]

[그 아이의 가슴에는 본래의 심장 대신 제 것이 있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에요]

이해할 수 없다.

라일라의 심장에 박혀있는 것은 분명 여신의 심장이었다.

여신의 대리자 성녀를 배출하고, 여신의 용사를 소환하는 왕국의 국보이자.

여신이 인간이었던 시절 지상에 놓고 간 성육신의 심장.

일생의 실험을 위해 왕궁 최고 마법사는 그것을 훔쳐 달아났고 라일라는 그의 실험을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라고 말한 것일까.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정보에 발걸음이 빨라지고, 어느새 내 몸은 그가.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아..."

내 목소리.

하지만, 내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텅 빈 공간.

제일 높은 곳에서 왕좌에 앉은 채 턱을 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에도... 전부 죽여버렸네..."

나와 똑같은 얼굴.

나와 똑같은 목소리.

"엘리제"

"네, 주인님"

"얼마나 남았지?"

"더는 돌아가시는 건 불가능하세요... 쥐어짠다고 해봐야 간신히 한 번 정도는 권능을 발휘하실 수 있을 거에요"

"앞으로 한 번이면, 진짜 죽을 수 있겠네

더는 회귀를 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오자마자 하는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는 내 흥미를 끌기 충분한 것이었다.

"저는 늘 주인님에게 여러 개의 세계를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의 시간을 계속해서 되돌리는 것이니 권능에 한계가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고작 여자 몇 명 죽던 옛날과는 달라요. 아무리 지쳤다 해도, 세상 전부를 부숴버리는 것은 너무한 행동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너무하다고 한 것치고는 별로 아쉬운 얼굴은 아니네"

"아쉽다니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왜를 알게 된다.

왜. 그녀들이 내가 살았던 세상에 나타났는지를.

저쪽 세상에서는 회귀가 한계치에 달했으니 현대로 넘어와서 회귀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쓰레기 새끼들...

"주인님께서 겨우 이런 것으로 포기하셨을 거라면, 제가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을걸요?"

"...네가 따라오지만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도 않았어."

"제가 아니었더라면, 전부 잃으셨을 거에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겠죠. 영원히 끝나지 않는 회귀를 반복하며 평생 같은 시간 속에 살아가셨을 거에요."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희망이 있었겠지"

내 얼굴로, 내 목소리로 내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감이 들게 만든다.

"엘리제..."

"네, 주인님"

"내가 만약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다면, 너희는 나를 나라고 여길까?"

"기억을 지우는 건 여러 번 해보신 거 아니에요? 어차피 결과는 똑같아요. 저희가 주인님을 주인님이라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서로 주인님을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죽게 될 거예요"

"하나하나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쌓는 거야"

"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관계로. 처음부터 쌓아 올린다면..."

"몇 번을 하셔도 결과는 똑같아요. 기억을 전부 지우시는가 하더라도, 이곳과는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내가 쌓아 올리는 게 아니야. 너희들이 나와 관계를 쌓아야 하는 거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기억을 잃은 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기억이 없으니 마나도 다루지 못할 거고. 그러니. 나를 찾을 수도 없겠지"

"......"

"너희들은 가자마자 이것저것 부수고 난리를 피우겠지. 여기만 하더라도, 나 찾겠다고 이곳저곳 부수고 다니는 년도 있는데... 내가 만들 히로인들이니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나라도 바로 알아볼 거야. 내가 만든 히로인들이 세상에 나타났어! 라고 하면서... 도망치려고 하겠지..."

그의 말대로다.

나는 첫 죽음을 겪기 전 방구석에 박힌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힘들겠지. 여기저기서 날 가지려고 하다가 결국 수십번이고 부서져 버릴 거야"

"지금과 별다를 바 없는 결말이겠네요.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가 죽어도 버리고 갈지 몰라요."

"그러면 안 되지... 맞아... 버리면 안 돼... 지금과 똑같은 결말이라면 의미 없는 발악이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내 등 뒤에서 새로 등장한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몸을 뒤로 돌려 새로 등장한 이가 누군지 확인해본다.

"지랄한다. 여기서 뭐 하냐. 왕 놀이?"

"다 끝나고 온 거야?"

이마 위로 솟아있는 두 개의 뿔이 무척 눈에 띄는 여자였다.

하이네스.

예전 뉴스로도 본 적이 있고, 또...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겨우 이 정도로 지리면 어떻게 해. 아... 힘만 없는 게 아니라 기억도 잃은 거야?]

[다시 교육 해야 되는구나... 자. 따라 해봐. 주인님]

엘리제가 수작을 부렸던 그 날도 만났었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게 되니 이 여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이제는 말 존나 막하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땅에 머리 박고 다니던 새끼가"

"부탁했던 일은 끝났지?"

"좇까"

"고마워"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긴 하지만, 하이네스는 원래 이런 캐릭터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으면 자기 꼴리는 대로만 행동하는 최악의 히로인.

반대로 하이네스를 넘어서는 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저 여자에게 무슨 일을 시켰던 거에요? 주인님 또 저 몰래 무슨 짓 하고 다니시는 거에요?"

엘리제의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일어나 이곳을 향해 내려온다.

높은 왕좌에서 한 걸음씩 천천히.

그저 계단을 내려올 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 나 같은 새끼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끝냈다고...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이야기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행복에 주인님이 없었죠"

내가 없어도 상관없다.

아마, 그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너무나도 험난했고... 자신을 희생하며 어떻게든 걷는 것을 본 히로인들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평생을 수도 없이 희생만 한 채로 죽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전부 잃어도 누군가가 버려지지 못하게. 버려지는 순간 자살하게 끔 만들면 돼. 누군가를 버리기 위해 회귀를 이용하려고 할거라면, 회귀의 시간을 정해버리면 되는 거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누굴 버리든 상관없어"

"수도 없이 죽고, 망가지고, 모두를 죽여도 상관없어"

"처음으로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전부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

"오히려 빨리 날 망가트릴 수 있다면... 맞아... 빨리 망가트릴 수 있으면, 좋겠지... 디아나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와 눈이 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내 착각일까.

"주인님. 누구랑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엘리제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얼굴이 원래 저렇게 생겼던가?

거울을 볼 때는 몰랐는데...

꽤...아니, 제대로 미친놈 같다.

"내가 제일 처음 만날 사람은 라일라. 그 아이여야만 해"

"그 아이를 편애하는 건 좀 그만두시라니까"

"가장 처음은 라일라. 그 아이가 망가트리는 게 맞아"

씨발 새끼...

"라일라가 널 무척 믿고 따르잖아. 그러니 네가 몇 마디 거들어준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야"

"...믿고 따라요? 누가 누구를요? 그 아이 아마 세상에서 저를 제일 증오할 텐데"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일라여야만해"

"그 아이 말고 경력자 있지 않아요? 디아나라던지. 샤를이라던지. 그게 아니면..."

엘리제는 눈을 돌려 하이네스를 바라보았다.

"뭘 봐. 눈깔아. 씹년아"

"제일 잘할 것 같은 여자가 저기 있는데. 굳이 그 아이를 쓸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하이네스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정말, 주인님은 저 몰래 무슨짓을 하고 계신 건가요. 이렇게 제가 모르는 게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자꾸 안좋은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난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의 마지막 이야기일 것이다.

기억을 지우기 직전.

그가 내가 되기 직전.

현대에 넘어오기 직전의 이야기.

"엘리제"

"......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부탁이 아닌 거래야. 첫 번째는 그 누구보다 먼저 라일라가 날 망가트리도록 해줘. 그 이후로는 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 안 해. 두 번째는 내 기억과 힘을 네가 보관하고 있어 줘"

"기억이요?"

"가지고 싶어 했잖아. 그리고, 몇 번 대가로 가져간 적도 있으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주인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지금까지 숨기시려고 했던 부끄러운 모습들도 제가 전부 볼 수 있는 건데. 정말로 주신다고요?"

"......"

"저를 두고 음란한 상상을 했던 기억들도 전부 볼 수 있는 건데 정말 주신다고요?"

"그런 적 없어"

씨발...년놈들...

[주인님이 세상 어디에 있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 커다란 힘이 세상에 풀어지면,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님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고통받게 되시잖아요]

[그래서 막고 있었거든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저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몸 아깝지 않은 노예니까요!]

머릿속을 스치는 과거 엘리제의 발언.

그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날, 별의별 히로인들이 사방에서 나타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얼마나 힘들어했었는가.

"그리고, 보관 하고 있다가 전해주기만 하면 돼"

"...한마디로 심부름꾼이라는 말이네요"

"어"

"주인님. 제가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 그래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들은 최악이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쓰레기라는 것 외에는 따로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쓰레기다.

"그래서 언제까지 맡겨놓으시는 건데요?"

"지금 이 기억을 보는 순간까지"

"...네?"

"내가 이 기억을 보는 순간. 하이네스한테 건네주면 돼. 엘리제. 네가 할 일은 거기서 끝이야. 그리고 하이네스는 그걸 가지고 내 부탁을 들어주면 돼"

그의 눈이 나와 마주친다.

대화하는 중 잠깐잠깐 마주치던 것들은 전부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애초에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어. 동정심이던. 복수던. 애정이던.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의 의지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도망치는 걸 포기했다는 말이니"

"거기서부터 시작인 거야. 병신같이 나약해서 휘둘리기만 하던 새끼가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 순간이 첫날로의 회귀. 그리고, 지금 이걸 보고 있는 지금 순간이겠지"

"소설 이야기를 소설에서 끝낼 것이지. 현실로 가져오는 게 말이 되냐며. 분명 날 보고 지랄하고 있겠지.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냐고 원망하고 있겠지"

"그런데,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희대의 살인자든. 뭐든 간에. 중요한 건 결말이지 과정이 아니야"

"마지막에 어떤 그림인지가 제일 중요하잖아. 안 그래?"

광기 어린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눈을 감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생각한 것은 오롯이 샤를 때문이다.

인간을 무참히 학살하고, 감당할 수 없이 전염시켜버린 뱀파이어와 괴물들을 보고서 샤를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의 생각대로였을까?

...아니...아마 아닐 것이다.

그저, 이 새끼는...

내가 언젠가는... 수백 수천 번 죽고 난 이후가 되더라도, 언젠가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거라 굳게 믿고 있는 것뿐이다.

"네?? 이거한테 주라고요? 싫어요! 안 돼요! 아무리 주인님 부탁이라 해도 이 여자는 싫거든요?"

"그딴 더러운 거 나도 받기 싫어"

두 여자의 언성이 높아지며, 천천히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너진다기보다는... 기억 회상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었다.

성이라 생각했던 곳이 점차 흐릿하게 변하며 세상이 검게 물들어간다.

사람 참 찝찝하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듯 하다.

내가 고통받았던 것들 전부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것에 화가 날 법도 한데. 그 사람이 나였기에 화를 내기도 뭐하다.

세상이 사라져가는 와중 엘리제와 하이네스의 싸움을 중재 하는 남자를 바라본다.

아까의 광기 넘치고 오만하게 말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어설프고 당황스러운 모습.

마치, 카메라가 꺼진 배우의 일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몇 번을 반복해도, 이곳은 내가 만든 세상이었고, 그녀들은 내가...그가 만든 히로인이었다.

망가지고, 무너져 그녀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었어도 마지막에 와서는 결국 저렇게 어쩔줄 몰라 하고있는 것은... 분명, 그가 얼마나 그녀들을 좋아했는지 나타내는 반증이리라.

그렇기에 나는 그가 왜 이런 멍청한 선택을 했는지 원망할 수가 없다.

차라리... 거기서 소설 속 세계와 함께 함께 모조리 죽어버리지. 같은 생각을 하기에는...

나는...너무 많은 히로인들과 정이 들어버렸다.

세상이 전부 검게 물들고 무엇인가 눈앞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모니터.

그리고,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텍스트 문서.

컴퓨터 오른쪽 아래에 나타나 있는 8월 1일이라는 날짜.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보잘것없는 원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한 책상이며, 침대 위에 널브러진 이불.

그리고...

[쾅]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

저 너머에 있는 이는 내가 그렇게나 미워했던 라일라였다.

그의 의도로 날 수도 없이 고문했으며...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는 나에게 매번 미움만을 받아왔다.

결국, 그녀를 용서했음에도 나는 증오와는 다른 의미로 그녀를 멀리했다.

이용은 해야겠고, 용서했으니 미워하는 건 할 수 없으니. 쭉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쿵]

"이 문은 대체 어떻게 여는 거지?"

화장실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에 손을 올린다.

이날 경찰서에 전화하려던 중에 문이 폭발해버려서 코가 깨졌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기억에 남는다.

다시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두고 볼 순 없으니 나는 그녀가 문을 발로 차버리기 전에 빠르게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

문을 열자마자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것인지 한 손을 들고 있는 라일라와 눈이 마주쳤다.

하늘을 떠올릴 법한 푸른빛 동그란 눈동자.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려주듯 검은색 고깔모자가 무척 눈에 띈다.

집에 같이 살 때에는 매번 사복을 입고 있었기에 이렇게 마법사 같은 옷을 입고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이날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 영등포요"

눈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전부 모르는척하며, 도피했다.

"그럼, 주인공이라는 남자에 대해 알아?"

"혹시, 성이 주고 이름이 인공인 사람인가요?"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생긴 분인가요?"

"......."

라일라는 내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짜증을 낸다기보다는 주인공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런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 전까지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이날 나는 그녀에게 주인공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거짓말을 무척이나 잘 간파하는 그녀였으니 내가 주인공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

"나이는요?"

"......"

"얼굴도, 나이도 기억 못 할 정도면 별로 친한 관계는 아닌가 봐요?"

"그건 아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곧이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의 얼굴을 모르는 건 기억이 조작되었기에 그런 것뿐이지... 결코..."

"결코?"

"친하지 않다는 뜻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할 말을 하는 라일라의 모습.

대체 그 새끼는 수도 없이 죽어가면서 구해낸 이 여자를 대체 어떤 식으로 대했길래 선뜻 친하다는 말도 못 하게 된 걸까?

"별로 안 친한 거 맞네요.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거 보니까"

"친한 거 맞... 지금 뭐라고..."

"아빠라고 부르면서 졸졸 따라다녔으면서. 잠깐 안 봤다고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 못 하고, 이제는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데. 친하긴 개뿔"

"거짓말...하지 마라. 애초에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부른 적......"

라일라의 두 눈에 당혹스러움이 물씬 피어오른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했던 말이었는데...

그는 이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일까?

...나름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이겠지만, 내가 굳이 그의 사연을 일일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나를 이용하는 것처럼 나 또한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그의 기억을 이용할 생각이니.

그저, 아주 조금 목적이 같았기에 지금은 이용당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마, 마지막 그 순간까지 목적이 같을 것 같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그와 목적이 같으니...

"왜, 기억 안 나?"

"아니... 모를... 꿈...이었을... 텐데..."

그녀를 그동안 쭉 기다리게 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던 걸까.

그녀가 회귀 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꿈으로 치부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눈을 껌뻑이는 라일라의 얼굴에 천천히 손을 가져간다.

라일라를 처음 봤을 때 무척이나 무서웠다.

그리고... 수도 없이 고문을 당한 이후 그녀를 증오했으며.

용서해달라 나에게 빌었을 때에는 역겨움을 느꼈다.

용서하고 난 이후에는 그저 사용하기 좋은 말이라 여겼는데...

볼을 만지고 있던 손 위로 그녀의 손이 올라왔다.

소중한 듯 내 손을 볼에 꼭 댄 채 눈을 감는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마, 이날 라일라를 보고 이렇게 했더라면, 나는 라일라를 방패로 편안한 인생을 보냈을 것이다.

설득하는데 조금 오래 걸리긴 했어도, 분명 이 여자라면, 나를 선생님이라 여기고 무엇이든 해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 도망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벨라트릭스. 디아나. 샤를.

이 세 명으로 끝이 날까?

아마, 아니겠지...

그녀들은 전부 내가 만든 히로인들이니 얼굴을 보게 된다면... 사정을 듣게 된다면, 나는 아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겠지.

그가 주인공의 것을 전부 빼앗았듯.

나 또한 그의 것을 전부 빼앗게 될 것이다.

그녀들은 애초부터 내가 만든 히로인이었고, 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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