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14. 가위 메이드 - 3
“……테이니즈.”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감금됐던 별실에 그대로 머무는 중이지만, 이젠 출입이 자유로워져서 탑 여기저길 쏘다니곤 했다. 그러다 복도에서 세니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또 시선이 곱지 않다.
“어제 츠니아를 만났지?”
“그게 왜……?”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뺨을 긁적이다 일단은 시치미를 떼보기로 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저리 기분이 좋아 있냐?”
“그…… 애가 너무 불안해하길래 괜찮다고 위로 좀 했어.”
어떻게 위로했냐고 구체적인 것까진 물어보지 않았다. 참 세니아는 까칠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배려심이 하늘을 찌른다. 어쩐지 예전 쉬프넬보다 더 좋아져버릴 것 같다.
세니아는 백금발의 긴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긁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니가 뭐 할만했으니 했겠지만, 너무 선 넘는 짓은 마.”
“선 넘는 짓이라니?”
“내가 걔한테 신신당부한 게 있거든. 인간이 좆을 들이대면 우리 같은 엘프는 거의 꼼짝없이 당하기에, 미연에 차단하기로.”
“어떻게?”
“누군가 삽입할 거 같으면 가차없이 잘라버리라고 했어.”
나는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세니아는 재밌다는 시선으로 한 손을 허리에 얹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표정이 왜 그러시나?”
“아…… 아니. 근데 걔 무기는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던데.”
“필요할 때만 꺼낼 수 있도록 작은 거니까.”
“단검?”
“비슷해.”
그리고 세니아는 몸을 빙글 돌려 자기 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걔 가위 메이드야.”
“가위…….”
“실용적이면서도 필요할 땐 매우 날카롭지. 봐서 알겠지만 수줍음이 많은 애니까 허둥대다 실수로 니 것도 잘려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내 정액이 엘프에게도 친숙한 향이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음 나도 큰일날 뻔했다.떨떠름한 몸을 간신히 돌려 걸어가려는 나에게 세니아는 깜빡했다는 듯 멀찍이서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특수훈련 들어간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
“그래. 탑 정리도 어느 정도끝났고, 이제 슬슬 매춘 주점을 털어야지?”
“어떻게 터는데?”
“그건 키르나 님이 정한 후 지령을 내려줄 거고. 그동안 니 몸 정도는 스스로 보호할 실력을 익혀야지. 우리 단원들한테 민폐가 되면 안 되잖아?”
나는 그건 그렇단 의미로 또다시 볼을 긁적였다. 세니아는 계단을 내려가며 팔을 위로 흔들었다.
“점심 먹고 한숨 자 둬. 그래야 오후에 잘 구르지.”
“……직접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나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단장님이 몸소 굴려주겠다는데 영광이지, 젠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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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테이니즈 씨! 오랜만이에요!”
“……엥?”
“아, 오랜만은 아닌가? 그래도 열흘 가량은 지난 것 같은데.”
딱히 날짜같은 걸 따질 생각은 없다. 그보다 왜 얘가 탑 중하단부 훈련실에 있지?
이제는 약간 정착이 된 듯 각종 무기들과 훈련용 허수아비, 과녁, 판자 따위가 들어선 드넓은 실내. 거기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루이너는 계단을 내려온 날 발견하곤 반갑게 달려왔다.
나는 그녀를 안으면서도 훈련실 안쪽에 서있는 기다란 백금발의 하이엘프. 세니아를 바라보았다.
“이 여사제도 같이 훈련하나?”
“네 역량에 따라 훈련이 될 수도, 아닐 수도.”
뭔 소리야, 저건? 하지만 잠시 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배틀액스 엘프를 보자 나는 추측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어…… 4번 단원, 하메루스였나?”
“일단 기억력은 합격.”
손뼉을 짝짝 치는 세니아. 물론 그녀의 칭찬에 기꺼워할 여유는 없다.
“크으으으…….”
외형은 일견 시퍼런 도마뱀을 닮았지만 거의 인간급 크기에다 두 다리로 서있는 파충류형 수인. 휴머노이드 몬스터가 기괴한 음성을 읊조리고 있었다.
‘리자드맨?’
하메루스에게 포획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 그 몬스터는 분명 리자드맨이다. 아마도 로시니안 도시 외곽의 늪지대에서 잡아온 모양인데.
“뭐…… 뭐야, 이거? 세니아?”
“뭐긴 뭐야. 훈련이지.”
“이게 훈련이라고?”
“리자드맨을 맨손으로 때려눕혀라. 그게 오늘 훈련의 목표다.”
……저기요? 농담이죠?
리자드맨은 상급 몬스터까진 아니지만, 인간으로선 무기 없이 잡는 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강력한 중급 몬스터다. 비유하자면 호랑이나 사자를 순수 주먹으로만 잡으란 얘기다.
“안심해. 리자드맨 쪽의 무기도 뺏어놨으니.”
“……차라리 서로 무기를 달라고!”
“그러면 니 쪽도 치명상을 입을 위험이 있으니 안 되지. 또한 무기를 뺏겼을 경우 대처도 해야 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세니아는 옆 하메루스에게 눈짓했다. 상관의 의도를 대번에 파악한 그녀는 리자드맨을 꽁꽁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내었다.
이어서 리자드맨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그 몬스터는 훈련실 중앙에 몇 걸음 간격을 두고 나와 마주보게 되었다.
“테이니즈 씨, 힘내요! 상처 입으면 제가 빠르게 회복해줄게요!”
……씨발, 이제 알았다. 루이너가 여기 있는 이유를.
이런 무식한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하면 바로 치료하기 위한 구급대원이었다. 내 역량에 따라 루이너 역시 훈련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건…… 내가 계속 처맞으면 계속 힐링을 시전해야 하니.
‘그런 훈련을 말하는 거였나!’
“크으으……?”
리자드맨은 머리 위 물갈퀴를 부르르 떨며 날 의아한 듯 응시하더니, 공격적 본능에 따라 팍 달려들었다.
나는 평소 습관처럼 허리춤에 손을 갖다댔으나…… 당연히 검이 있을 리가 없다. 내 검은 페르제이거 암살 당시 경비병들에게 압수당했으니.
퍼억-!
리자드맨의 두 손이 내 가슴을 밀치며 날 바닥에 쓰러뜨렸다.나는 내 위에 올라탄 리자드맨을 밀쳐내려 했으나 힘 차이가 압도적이라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조금만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옆을 흘긋 돌아보았다. 하지만세니아는 내겐 눈길도 안 주고 위층으로 계단 쪽으로 걸어간다.
“세…… 세니아! 애초에 전제가 틀려먹었잖아! 완력이라도 비슷해야지, 이건 뭐 힘으로 밀어붙여지면 어쩌라고!”
“내 알 바 아니지.”
“어…… 어디 가는데?”
“다른 단원들도 봐줘야 하는데 너 하나에만 매달릴 순 없잖아? 하메루스!”
“옙.”
“죽을 정도가 아니면 절대 도와주지 마라. 나중에 싸움 과정도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허리를 깍듯이 숙이는 배틀액스 엘프. 세니아가 사라지자 그녀는 은발 앞머리칼에가려지지 않은 다른 한쪽 눈으로 기계 같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여단장이 가장 신뢰하는 엘프라는 건, 내게는 현 상황에서 최악이다. 정말로 죽을 것 같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테니.
“키이이이-!”
리자드맨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할퀴듯 내려찍었다. 무기가 없어도 놈의 손톱은 뾰족해서 잘못 긁히면 피가 흩뿌려질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꺾어 피했다. 리자드맨의 손이 바닥을 치며 적적한 훈련실 안을 울려퍼졌다. 타앙-!
“루…… 루이너, 너라도…….”
“제가 뭘 어떻게 돕겠어요. 전 연약한 여사제라구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째 매사에 태연한 그녀가 스스로 말하니, 자기 좋을 때만 ‘연약’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이이…….”
“키륵…… 키륵…….”
“씨발, 여자도 아닌 게 위에 올라타고 자빠졌네!”
나름 터프한 대사를 지껄이며 밀쳐내려 했지만, 마음먹은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건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다. 리자드맨은 약간 움찔거리만 했을 뿐 날 깔아뭉개는 데 여념이 없다.
도리어 발악하는 내가 귀여워 보였는지 녀석은 두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었다.
‘이런 제길…….’
“키이이이…….”
녀석의 손은 가차없이 죄어들어왔다. 발버둥쳐서 놈의 다리를 때려보지만 그 역시 별 타격은 없는 것 같다.
“꺼꺼…… 꺽…….”
숨통이 막히며 시야가 흐릿해진다. 나는 이번엔 놈의 손목을 붙잡고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역시 힘의 차이가 있을뿐더러, 이젠 숨을 못 쉰 지도 꽤 되어서 더 가망이 없다.
그나마 발악하던 다리 동작도 멎었다. 흘긋 시선을 돌려보니, 여기까진가 싶은 하메루스가 드디어 한 걸음씩 내딛는 게 보인다.
다행이다. 훈련은 망하더라도 일단은 살고 봐야…….
“……?”
그때 난 이상한 걸 보았다. 리자드맨의뻘건 눈이 일그러져있었다. 내가 몬스터 입장이 되어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저건 당혹감에 물든 표정이 맞다.
아마 다가오던 하메루스가 멈춰선 것과, 멀찍이서 관망하던 루이너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겠지.
‘이리 목이 졸리는데…… 버틸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