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19. 지켜야 할 것 - 3 (57/102)



〈 57화 〉19. 지켜야 할 것 - 3

“히야~. 테이니즈 씨. 오랜만입니다.”

“……안트완 씨도요. 어쩌다 보니 우리 일행은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있군요.”

“루이너 씨도 성격이 여전합디다. 참 신기한 친구죠? 그녀는 어딜 가든 거기에 동화되어 잘만  것 같습니다.”

나는 예전에 세니아가 루이너 면상에 검을 올려 비꼈는데도 여전히 생글생글웃던 그녀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겁대가리를 상실한 멍청이라 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출중한 신성력은 기본이고, 종족 간의 대립 같은 거대한 문제는 두뇌 회전이 이상하리만큼 빨랐다. 츠니아의  속에서 가위를 대번에 찾아 꺼냈던 것도…….

- 걔가 장난으로 정액 달라고 징징대지만, 그것도 웬만하면 들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그녀는 너한테 호감을 가지고 되려 도와줄지도 모르지 -

긍정적으로 여겨보려던 세니아의 말. ……평범한 사제가 아닌, 정말로 루이너의 어떤 알 수 없는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올까.

“뭔가 생각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테이니즈 씨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 같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나는 그렇게 대꾸해주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 고급스러운 별실. 예전에 가트로이드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겨루던 고위 마법사 에르휘의 방이라 짐작된다.

아무리 탑의  주인이라곤 해도 세니아가 최상층을 날려버렸기에, 그가 머물 곳은 이곳으로 배정된 듯하다. 내가 머무는 방보다  배나  고급스럽긴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안트완의 모습이 꽤나 흥미롭다.

“이거 원, 차라도 내드리고 싶은데 제 짐조차 풀지 못한 상태라서요. 보시다시피…… 이해 바랍니다.”

그는 고급 별실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니까 먼지바람을 푹 뒤집어쓴 몰골로 테이블에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다. 여행복을 벗지도 않은 걸로 보아 키르나가 빨리 상황을 전달해주라고 성화를 부린 듯하다.

나는 키르나와의 연애는 잘 되고 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참 윗대의 조상과 사귀는 듯한 다른 남자의 모습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쌉싸름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얘기나 진행하기로 했다.

“총지휘관께서 당신이 록스 헤일그 군단장 암살 작전의 밑작업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게 어떤 겁니까?”

“제가 방금 다녀온 곳이 그곳이죠. 리도스마이티 수도 아리칸 외곽에 지휘 사령부가있습니다. 저는 그곳에 일반 견습 마법사처럼 위장하고 군단장을 만났습니다.”

“당신이 처음 우릴 만났을때처럼?”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엘프 추종자가 아닌, 제 스승 가트로이드의 제자로 말입니다. 가트로이드는 죽었지만 문서 상으론 여전히 전 그분 제자이기 때문에 신분 증명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탑이 주인인 건 여전히 밖에선 모르나보군요.”

“저자신도 탑의 주인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마법 수련에 엄청 골머리를 썩히고 있으니까요. 하하.”

나는 예전에 키르나가 ‘임시라곤 해도 탑의 주인이  이상, 그에 걸맞은 마법 실력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며 엘프 마법사 선생을 하나 붙여줬다는 걸 떠올렸다.

개인 교습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긴 해도, 그는 진정으로 사랑하던 엘프들과 함께 지내는 게 행복한 듯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물론 나도 엘프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끝을 짐작할 수가 없기에 마냥 안트완처럼 편히 있을 수 없다. 당장 츠니아 일만 해결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어쨌든  신분으로 들어가 그쪽 군단장 록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척했습니다. 탑이 엘프들에게 점령당했으니, 반 인질로 붙잡힌 이곳 시민들과 마법사들을 구해달라고.”

“당연히 군단장 입장에선 황실 쪽에서 허가가 나와야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했겠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간보다 엘프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인간들은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는 거죠.”

“예외적인 경우의 수를 두었군요.”

“예. 군단장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한테  보이면 황제께 서신을 보내 허락을 맡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군단장 정도 지위에 있으면 황제가 왜 출전 명령을 안 내리는지도 뻔히  텐데. 하지만 안트완의 비루한 견습 마법사 행세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얼뜨기로 만만히 본 모양이다.

“여튼 저는 그래서 덥석 미끼를 무는 척했습니다. 그곳까지 오는 길에 봐둔 물 좋은 주점이 있는데, 거기 엘프를 하나 이행시켜 드리겠다고.”

“취향이 뭐냐고도 물었겠군요?”

“예. 십대 초반의 어린 외모 엘프라고곁에 있던 부군단장이 알려주더랍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츠니아는 그보다 나이가 좀 더 있어보이는 외모긴 하지만, 인간과는 다른 엘프인 데다……  꾸미면 10대 초중반 정돈보일 수 있다.

설령 그 자식 맘에 안 든다 해도 암살 수행에 지장은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눈을 천천히 뜨곤, 대답 대신 질문으로 되돌려주었다.

“안트완 씨는 그만큼 어린 엘프가 암살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개탄스럽진 않습니까?”

“물론 저도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적혼여단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애초에 탑의 주인이란 것부터가 솔직히 명의상에 불과하다 봐도 무방하니까요.”

실권은 없다라……. 나는 앞으로도 안트완에게 뭔가를 기대하기는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밑작업과 사령부 구조, 보안 상태 등을 마저 전달받은 나는, 간략히 펜으로 메모한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무운을.  참, 그리고 테이니즈 씨.”

방에서 나가려는 나를 잊은 게 있는  불러세우는 안트완. 나는 따라 일어선 그를 돌아보았다.

“다크엘프 쪽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얘긴 들어보셨습니까?”

“예. 황제를 이용해서 쇼를 벌일 거라 하더군요.”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뭐 천천히 듣도록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테이니즈 씨 말처럼 뭔가를 하려는지, 수도에서 다크엘프들이 몇 보이더랍니다.”

“평소에도 하이엘프보다 굉장히 뜸하긴 하지만 가끔 보이긴 했죠.”

“그런데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습니다. 저는 기회를 봐서 사령부 내 병사들에게 몇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츠니아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왔길래 그다지 더 듣고 싶진 않았지만…… 작전 수행 지점의 현상이기에 염두에  필요는 있었다.

“어떤 얘기입니까?”

“다크엘프들에게도 군대를 지휘하는 수뇌부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미 수도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키르나와…… 적혼여단의 단장 세니아 같은?”

“비슷합니다. 저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을 알아냈습니다.”

나는 목 언저리가 근질거리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두 핵심 인물이라 함은…….”

“예. 행동대장 시카우스. 그리고 총지휘관 벨릿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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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장이 거주하는 사령부는 안트완 말대로 수도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리도스마이티 심장을 지키는 군사기지인만큼, 거의 요새급으로 크고 높다랗다.

화창한 햇살을 받는 드넓은 평원과, 뒤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수도 도시 못지 않은 장엄함을 자랑한다.

“…….”

확실히 일개 경비대와는 규모부터가 다르군. 여러 마을을 다녀본 베테랑 이행자인 나조차도 침이 절로 삼켜진다.

나는 그 사령부 건물로 다가가면서, 밧줄에 묶여 따라오는 엘프를 슬쩍 돌아보았다.

‘괜찮나?’

그렇게 묻고 싶을 만큼 츠니아는 꽤나 불안해보였다. 로브와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눈에 보일 정도다.

물론 암살 작전을 진행하는 입장에선 오히려 이 편이 유리하다. 저렇게 잔뜩 겁먹은 엘프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상상조차 못할 테니.

“다……  왔나요, 주인님?”

뻔히 앞에 보일텐데,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묻는 걸 보면 얼마나 심리가 불안한지 알  있다.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면, 서너 명 죽이기도 전에 적혼화되어버릴지도 모르겠군.

“아직 거리가  있긴 해.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널 거칠게 대할거다.”

“예……?”

“엘프 이행자는 원래 그런 직업이거든. 상대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

무슨 뜻인지 알아챈 그녀는 어렵사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츠니아를 많이 좋아하는 나로서도 쉽게  수는 없을 것 같다.

건물 입구에 가까워지니 근무와 작업 등을 하는 병사가 서넛 보였다.

“멈춰라. 어디의 누구냐?”

병사  명이 창대를 세우며 다가왔다.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신분 증명 문서를 꺼내며 말했다.

“엘프 이행자입니다. 안트완 베스톤 씨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안트완? 그 로시니안 가트로이드의 제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뒤에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는 엘프겠군.”

다른 병사들도 이쪽으로 모여들더니 음흉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뒤에 선 츠니아를 응시했다. 두꺼운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지만, 하도 몸매가 빵빵하니 굴곡을 다 감출 수 없다.

“군단장님은 어린애 취향인걸로 아는데.”

“엘프는 발육이 좋다 보니 인간 나이로 환산해서 10살 정도만 되면 저 정도 몸매와 키는 나온다구.”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잖아? 괜히  엘프를 들여보냈다가 우리만 혼날  있다고.”

뻔히 보이는 핑계를 대며 츠니아에게로 손을 뻗는 사내들.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내들에게 만져지는 게 두려운지 흠칫 떨었다. 나는 평소 이행 때처럼 그냥 놔둘까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녀를 막아섰다.

“잠시만요.”

“뭐야, 형씨? 어떤 년인지 확인 좀 해보겠다는데.”

“그…… 이 엘프는 높으신 분께 이행될 엘프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이 닿지 않게 특별히 주의하라더군요.”

“견습 마법사 양반이 그러던?”

물론 안트완에게 그런 얘긴 듣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고지식한 마법사와 이행자라고 투덜댔다. 처음 창대를 들고 다가왔던 병사가 몸을 돌려 앞장섰다.

“하긴 록스 군단장님도 깐깐하신 분이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욘 없겠지. 무기는 여기 두고 따라와!”

그가 안내를 해주려는 듯하다. 나는 차고 있던 검을 병사 한 명에게 넘겨주고 츠니아와 함께 따라갔다. 뒤에 남은 병사들은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사령부 내부는 일반 군사기지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벽에는 쓸데없이 장황한그림과 깃발들이 걸려있었고, 바닥도 유리처럼 매끄럽다.

제국 전쟁이 끝난 후 근 100년 가량 전쟁이 없다시피 했으니, 백성들 혈세를 뜯어다 치장하는  쏟은 듯하다.

‘거기다…….’

복도와 회의실, 내무실 등을 오가는 병사와 지휘관들의 발걸음도 한가하기 그지없다. 로시니안이  인질로 잡혀있지만 평화에 젖어와서인지 상황의 심각성도 모르고 군기가 빠져있다.

대부분 무장조차 거의 안 하고 있다. 투구를 푹 눌러쓰고 면밀하게 움직이는 듯한  병사가 우스꽝스럽게 보일정도다.

“더 윗층이다. 따라와.”

츠니아가 멈칫한  눈치챘는지, 앞장서던 병사가 5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윽박질렀다. 츠니아는 마지못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저기…… 투구를 쓴 병사 말이에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나도 궁금했지만 창을 든 병사가 눈을 부라리고 돌아보자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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