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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 31. 역공 ­ 3 (93/102)

〈 93화 〉 31. 역공 ­ 3

* * *

“당신은…… 엘펜리드…… 사제…….”

“조금 전까진 그랬죠.”

“지금은…… 아니란…… 건가요?”

“계속 사제 흉내를 내다간, 테이니즈 씨 정액을 더 얻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요.”

8번 단원 클로에는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적혼여단을 위해…… 일하는 사제…… 아니었습니까?”

“아아, 전부터 느꼈지만 듣고 있기 답답할 정도로 느릿한 화법이네. 제정신이 아닌 건 그쪽 같은데요.”

루이너의 말에 발끈한 건지 어떤지는 모른다. 여전히 동이 트려면 멀었고, 어둠 속의 얼굴은 몇 걸음만 떨어져있어도 표정 구분이 힘들다.

하지만 루이너를 향해 날아드는 철퇴는 잘 보였다.

휘릭…… 휘릭…….

파칵­!

가볍게 빙빙 돌리던 철퇴의 무게추가 순간 엄청난 속도로 루이너 옆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언젠가 그녀 철퇴에 가격당한 매춘 주점 점장이 희멀건 뇌수를 흩뿌리며 쓰러지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다시피 했지만…… 정작 루이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 가시가 듬성듬성 박힌 무거운 추에 세게 얻어맞고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고?

“이게…… 대체……?”

평소 말버릇이 아닌 어처구니 없는 어조가 클로에 입에서 튀어나온다.

“음, 근데 확실히 기분은 좀 나쁘네요. 인간 머리라 그런가?”

루이너는 강타당한 머리만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그렇게 중얼거리곤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 손이 철퇴 자루와 추를 잇는 쇠사슬을 붙잡더니, 뒤로 확 끌어당겼다.

클로에는 예상치 못한 힘에 앞으로 넘어질 듯 몸이 기울어졌다. 루이너는 자신의 품에 안기듯 쓰러지는 그녀의 목 뒤를 손날로 내리쳤다.

탁­!

“엇…….”

외마디 소리와 함께 클로에는 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적혼여단 단원이 저렇게 쉽게…….

“뭐 하고 있어요, 테이니즈 씨? 어서 와이번을 타고 세니아를 쫓아가자구요.”

나는 너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에 입을 뻐끔거렸다. 일견 금붕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너…… 와이번 조종은 할 줄 알아?”

“제가 왜 그런 걸 배워야 하죠?”

“그럼 라이더 없이 어떻게 쫓아가려고 그래?”

루이너도 깜빡했다는 듯 자기 머리를 탁 치며 하하하 웃었다.

“제가 와이번을 탈 일이 없으니 그걸 간과했네요. 뭐 아까 코피 흘리고 자빠진 라이더 엘프를 깨우면 되죠.”

나는 루이너가 일반 사제이기에 와이번을 탈 일이 없다고 하나 싶었다. 그렇다고 보기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어조였지만.

그녀한테 안면을 강타 당했던 라이더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드물게 남자 엘프로군. 하이엘프들은 여자가 주를 이루고 극소수인 남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렇기에 외견은 일견 비슷해 보일지언정 겁도 많을 수밖에 없다.

루이너에게 뺨을 찰싹찰싹 얻어맞고 정신이 든 그는 생긋 웃는 여사제 모습에 기겁했다.

“으…… 으햐햑! 사…… 살려주십시오!”

평범한 인간처럼 보일 때나 검을 들고 덤벼들었지만, 힘의 차이를 느낀 그는 대번에 꼬리를 내린다. 루이너는 좀 전에 그가 떨어뜨렸던 검을 쥐어 반대로 목에 겨누고는 협박했다.

“우릴 태우고 날아. 와이번을 조종해. 니네 여단장을 쫓아가는 거야.”

“하…… 하지만 그분들은 이미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멀어져서…….”

“니들보다 내 시력이 좋거든? 방향을 알려줄 테니 지금 당장 출발하자고♪”

라이더 엘프 입장에선 루이너가 시력이 좋은 쪽을 반대로 잘못 말한 게 아닌가 싶을 것이다. 멍청한 얼굴을 하던 그는 허둥지둥 와이번쪽으로 달려가서 앞안장에 탔다.

루이너도 그의 뒤에 얼른 올라타고는 내게 손짓했다.

“빨리 와요. 기절한 엘프들이 깨어나면 귀찮아진단 말이에요.”

“아…… 알았어.”

나는 굳어있던 다리를 겨우 움직여 와이번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내가 루이너 손을 잡고 낑낑거리며 높다란 와이번 등에 올라탈 즈음, 비척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당신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8번 단원 클로에라고 했던가? 과연 적혼여단이군. 내가 힘조절이 좀 어설프긴 해도 확실히 기절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인간이…… 아니지요? 내 철퇴를…… 얻어맞은 자들은…… 예외없이 뇌수를 뿌렸는데.”

“알았으면 더 덤비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구♪”

“그렇겐…… 안 되지요…… 나는…… 죽음을 각오한…… 적혼여단 단원…….”

말을 잇던 클로에는 문득 비틀거렸다. 그녀는 자세를 가다듬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하지만 내가 와이번에 완전히 올라탈 때까지도 그녀는 제대로 서있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으응……? 어째 주변이…… 흔들흔들…….”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루이너는 낄낄거리며 그렇게 말했고, 클로에는 계속 비틀대다가 뭔가를 감지한 듯 옆을 보았다.

그러곤 경악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이번 라이더도 이륙하는 데 신경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 깜짝 놀랐을 것이다.

투둑…… 투두둑…….

바닥이 낙하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탑 꼭대기 옥상 바닥이 부서저내리는 것이었지만.

“어…… 어? 이게 대체…….”

클로에는 그 말을 끝으로 중력의 힘에 의해 떨어지고 말았다.

콰드드드득­!

여전히 기절해서 누워있는 관리자 엘프도 함께. 물론 탑의 바깥을 향한 게 아닌, 안쪽으로 움푹 파여지듯 부서져내렸기에…… 기껏해야 두세 층 정도가 원통처럼 바닥이 없어진 정도였지만.

하필 아래에 위치해있는 층이 키르나 집무실이었다. 내려앉는 석조더미와는 반대로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던 문서들은 바람에 흩날렸다.

수많은 종이가 공중으로 비산했다. 그것들은 안쪽에서 어둠을 밝히는 연금술사의 등불에 비추어지며 반짝이는 색종이를 연상케 한다.

마치 위반 출정을 배웅하는 것처럼.

키르나 역시 엘프기에 무너지는 잔해들로부터 큰 부상은 없었으나…… 당연하게도 그녀는 다른 의미로 경악한 모습이다.

“너…… 너희들 기어코…….”

곁에 쓰러진 클로에와 관리자들 사이에서, 이륙한 우리를 올려다보는 키르나에게 나는 힘껏 외쳤다.

“죄송합니다, 총지휘관님! 징계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꼭 세니아 곁으로 가야 합니다! 제 먼 운조모의 입장에서 헤아려주십시오!”

키르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뭐라고 다그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미 날아오른 와이번 날갯짓과 바람소리 때문에 순식간에 멀어지며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여느 때고 변함 없이 활기찬 루이너의 외침이 귓가에 꽂혔다.

“어때요, 테이니즈 씨! 내 솜씨가?”

“…….”

“그 건방진 세니아 마법보다 한 수 위지요! 그 언니는 탑 최상층을 날려버리는 데 그쳤지만, 저는 마나를 더욱 정교하게 깔아서 안쪽으로 무너뜨렸다구요? 아마 페르제이거 대마법사도 이렇게는 못 할 걸요?”

당연하지만 앞쪽에서 불어오는 풍압 때문에 일반 인간에 가까운 나는 대답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못 쉰다. 앞에 앉은 와이번 라이더 엘프와 루이너가 상당 부분 바람을 대신 맞아주고 있었지만…… 매춘 주점을 털 때와는 달리 별다른 비행 준비도 안 했기에 더욱 견디기 힘들다.

나는 급한 대로 루이너 등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꽉 감았다. 이 짓궂은 여사제는 내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장난질에 여념이 없다.

“아앙……♡ 갑자기 그렇게 목을 핥으시면…….”

수십 미터 상공 아래로 허허벌판 대륙이 펼쳐져있었다. 손가락에 집힐 듯한 조그만 나무들과 물가, 바위 등이 휙휙 지나간다.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 옆쪽을 바라보니, 먼 산맥 너머로 희끄무레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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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득…… 퍼득…….

“테이니즈 씨.”

퍼득, 퍼득…… 후우웅­!

“테이니즈 씨!”

루이너의 부름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을 끔뻑이며 앞을 보니 루이너가 인상을 쓰곤 툴툴거리고 있었다.

“기절한 줄 알았잖아요. 뭐 하는 거예요?”

“……기절한 거 맞아.”

잠조차 거의 자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울렁거리는 와이번을 타고 있자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상하다. 나는 방금 전까지 졸았는지 정신을 잃었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어렵사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질주하는 와이번은 이제 완연히 리도스마이티 수도 상공을 날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대륙 벌판은 수많은 집과 석조 건물, 도로 등 시내의 전경으로 바뀌어있었다.

“세니아는? 아직 이 와이번은 적혼여단을 따라잡지 못했나?”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와이번라이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잠깐 돌아본다. 루이너도 황당하다는 듯 검지를 들어 설명한다.

“우린 그 8번 단원 클로에의 방해 때문에 엄청 늦게 출발했어요. 따라잡으려면 속도를 두세 배로 늘려야 하는데, 테이니즈 씨 때문에 오히려 더 느리게 비행 중이죠. 지금도 풍압을 견디기 힘들어하잖아요?”

“……힘들어.”

“그러니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이 거리에서도 적혼여단의 위치를 다 볼 수 있으니까요.”

와이번의 날갯짓과 바람소리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라면 대화 자체가 힘들겠지만, 인간이 아닌 루이너는 내 목소리를 경이로우리만큼 다 듣고 크게 답해주고 있다. 도대체 이 사제의 정체가 뭘까 새삼 다시 돌이켜보던 나는 문득 루이너의 행동에 의아해졌다.

그녀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흐음……. 역시나 테이니즈 씨 추측이 맞았어요.”

“무슨 뜻이지?”

“전에 안트완 씨가 보고한 내용에 따라 추측했던 거 있잖아요? 벨릿이 인간들을 적혼화 엘프 제물로 쓸 작정이라면, 최선의 방법은 그런 수를 쓰기 전에 역공하는 거라고…….”

나는 탐색을 마치고 온 안트완과 루이너와 함께 원형 테이블에 앉아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게 지금 상황에 뭐 어쩌길래?”

“적혼여단은 지금 황궁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자신들을 막아서는 다크엘프 무리들과 싸우기 시작했군요.”

“와이번 무리를 이용해 공중에서 급습. 황궁을 장악한 벨릿을 암살한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적혼여단 모토. 당연하지만 내 입장에선 기꺼워하기 어렵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적혼여단은 여기서 다크엘프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끝장날 게 뻔하니까.

“와이번 속도를 좀 더 내! 빨리 가서 세니아를 막아야 해!”

“괜찮겠어요? 지금도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기 힘든 거 같은데.”

“난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빨리…….”

그러곤 풍압을 버티기 위해 겉옷을 벗어서 얼굴과 목을 둘둘 감쌌다. 루이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앞 라이더 목을 슬며시 손으로 붙잡았다.

“속도를 좀 더 내라네요, 라이더 양반?”

“예…… 옙!”

일견 애무하는 손처럼 보이겠지만 그 손가락 힘은 충분히 알고도 남을 것이다. 라이더 엘프는 주저 없이 와이번 머리와 연결된 끈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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