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4. 시발 (작가 후기 수정)
"오··· 좀 잘생겼는데?"
난 샤워 후 물에 젖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그렇게 말했다.
"몸도 좋고···"
옷을 입고 있으면 크게 티 나진 않지만, 이렇게 다 벗고 있으니 몸 곳곳에 자리 잡은 근육들이 눈에 띈다.
그렇게 거울을 보고 여러 포즈를 취하며 자뻑에 취하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에라이 시발. 몸은 몰라도 씻고 나서 습기 찬 거울에 비춰보면 안 잘생긴 사람이 어딨다고."
애초에 내가 정말 잘생겼으면, 동성 친구는 몰라도 이성 친구라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성 친구는 류해은, 단 한 명뿐이다.
동성 친구도 한두 명이 끝이다.
그마저도 일면식이 있고, 한 번 같은 조가 됐다는 이유로 연락처를 교환했을 뿐인 동기들.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내 친구는 류해은 한 명으로 끝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자업자득 아닌가?"
난 낯을 겁나게 가려서 운동하고 게임을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동아리도 안 들고,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정말 학교에 다니고 수업을 들을 뿐.
낯을 가리는 정도가 얼마나 심하냐면, 거의 올해 1월부터 가르치고 옆방에 살아서 몇 번이고 마주쳐본 미연이랑 가을이 된 지금에서야 약간 장난도 치고 친해졌다고 느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러니 수업만 듣는 학교에선 친구가 안 생길 수 밖에.
"어쩌다 이렇게 됐다냐···"
원래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언제부터 낯을 가렸더라?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할 때쯤이었나?
그러고 보니 그땐···.
까톡!
"···누구지?"
생각을 하던 와중, 까톡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건으로 대충 몸과 머리를 닦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후배!?"
쿵···.
"···?"
뭐지?
내가 후배라고 외친 순간, 벽이 약간 울린 거 같은데···.
워낙 작게 울려서 잘 모르겠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드디어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후배랑 헤어지고, 해은이랑 이어질 수 있게 된 거다.
"···생각해보니까. 나, 그냥 쓰레기 아냐?"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사귀기 위해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는 남자.
"···고저 고냥 개쓰레긴데?"
아니, 아니다.
애초에 난 후배에게 억지로 덮쳐져서 어쩔 수 없이 사귀게 된 것이다.
"근데 싸기 직전에 후배의 엉덩이를 잡고, 찍어 내려서 질싸한건 내 의지였잖아?"
머릿속이 복잡···
쿠웅···.
"무, 뭐야?"
이번엔 확실하게 벽이 울린 거 같은데···?
어디서 공사라도 하고있나?
아니, 지금 그런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일단 생각은 접어두고, 후배가 무슨 내용의 까톡을 보냈는지나 확인하자.
'선배 단둘이서 데이트해요.'
라는 내용과 함께 날짜와 장소 시간이 적혀있는 간단한 내용의 까톡.
"···???"
갑자기 내일 둘이서만 데이트를 하자고?
단둘이서??
대체 무슨 속셈이지?
난 그 뒤에 몇 번이고 까톡과 전화를 해봤지만, 후배가 받는 일은 없었다.
"하아··· 대체 뭐야···"
괜스레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고, 안 그래도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아주 쓰러질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하지···"
나는 갈지 말지 결정하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천장을 보며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에취!!"
시발.
감기 걸렸다.
이유는 뻔했다.
씻고 나서 머리도 안 말리고, 몸도 대충만 닦고 그대로 침대에 쳐 누워서 잤으니.
오히려 감기에 안 걸리는 게 더 신기했을 것이다.
기침이 나고 머리도 아프고 열까지 나는 게, 조금 독한 녀석에 걸린 모양이다.
"아··· 멍하다··· 약이라도 사러 가야 되는데···"
약한 녀석에 걸렸으면 마스크 쓰고 학교를 갔을 텐데, 독한 녀석이라 나는 자체 휴강을 때렸다.
그리고 멍한 머리로 후배에게 겨우 까톡 하나를 남겼다.
'나 감기 심하게 걸려서 못 갈 것 같아, 미안.'
까톡.
···답장 참 빠르네.
'그럼 데이트는 내일로 미루죠. 약은 드셨어요?'
'아니, 약을 사러 갈 기운도 없어.'
그 뒤로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일어나서 겨우 옷을 입고, 뭘 먹을 기운도 없어서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끔뻑, 끔뻑.
곧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어져서, 그냥 꾹 감아버렸다.
"에취!!"
아, 시발.
족같다.
겨우 잠들어도, 곧 기침을 하면서 잠에서 깼다.
기침을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너무 기침을 많이 해서 목도 아파졌다.
나는 겨우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페트병을 열고 마셨다.
"꿀꺽, 꿀ㄲ··· 에퉤퉷! 씨발!"
안 그래도 아프던 목이 불타오르는 기분이다.
"으아악··· 씨바알··· 나살려···"
내가 꺼낸 페트병엔, 물이 아니라 소주가 들어있었다.
분명 한 번 당하고 나선 잘 피해서 마셨는데,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사리 분별도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물을 마시려고, 다른 페트병을 찾아보니 물이 시발 없었다.
있는 것은 소주가 담긴 페트병과 소주가 담긴 초록색 병, 그리고 맥주가 담긴 갈색 페트병뿐.
"어떻게 집에 물이 없냐···"
아··· 사러 가야 하나···
이 상태로 사러 나갔다간 100% 쓰러져서 뒤질 텐데.
띵동.
침대에 누우려고 한 순간,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지?"
택밴가?
나는 멍하니 현관문으로 걸어가서,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노트와 필기구를 들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으며 교복을 입은 여자애.
"안녕하세요, 선생님. 물어볼 게 있어서··· 어?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미연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연이가 바로 옆방에 살고는 있지만 내 방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 응··· 좀 감기 걸려서··· 미안한데··· 옮을 수도 있으니까, 좀 나으면 다시 물어봐줘···"
재수생한테 감기를 옮기면 큰일이다.
그것도 내가 과외를 맡은 학생한테.
나는 쿵, 하고 문을 닫았다.
"아··· 누워있어야겠다···"
난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띵동.
"···또 누구야?"
나는 다시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는 미연이가 서 있었다.
"···미연아?"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미연이가 손에 든 봉투를 건넸다.
"이건···?"
"그··· 우연히 집에 남아있던 죽이랑, 상비약이에요. 아프다고 굶으면 더 낫지 않으니까. 꼭 드세요. 알았죠?"
"어··· 응··· 고마워···"
내가 봉투를 받자마자, 미연이는 몸을 돌려서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봉투 안에는 상표가 들어간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죽과 열감기에 잘 듣는 약과 작은 물병이 있었다.
집에 우연히 죽이랑 열감기약이 남아있다니.
심지어 종합감기약도 아니고, 딱 열감기에 특화된 약이다.
평소에 열감기에 잘 걸리나?
"하긴, 미연이가 겉에서 봤을 때 말라보이니까 튼튼해 보이진 않지."
쿠웅···.
"···또 공산가?"
어제부터 자꾸 벽이 울리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죽과 약, 그리고 물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죽··· 따뜻하네···"
마치 방금 사 온 것 같다.
설마 진짜 방금 사 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나."
내가 감기에 걸려서 몸져누운걸 어떻게 알고 죽을 사 올까.
그냥 집에 있던 것을 데워서 준거겠지.
"···그런데 물은 왜 있지?"
약이랑 같이 먹으라고 줬나?
마침 집에 물이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보통··· 약이랑 같이 먹으라고 물을 주나?
멍한 머릿속에서 그 의문들은 금방 희미해졌다.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했다.
감사하게 받자.
"꿀꺽, 꿀꺽, 꿀꺽. 푸하아···"
이제 좀 살겠네.
죽은··· 기껏 데워준 게 고맙지만, 지금은 별로 먹고 싶지 않다.
난 미연이에게 받은 약만 삼키고, 바닥에 죽을 가만히 둔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띵동.
"으에?"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옅은 갈색 생머리와 옅은 화장기가 있는 얼굴의 주인.
"후배···?"
후배, 명하린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선배."
"어, 응···"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갑자기 카페에서 사라진 뒤, 전혀 보질 못했으니.
"여기요. 내일은 데이트해야 되니까, 내일까지 꼭 나아요."
간단하게, 약간 차갑기까지 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툭 봉투만 건네준 뒤 후배는 떠났다.
평소의 과한 스킨쉽이라던가, 밝은 목소리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뭐지?"
봉투 안에는 종합감기약이 있었다.
내가 약 안 먹었다고 해서 가져다준 건가?
나는 멍하니 현관문을 닫았다.
···방금 그게 진짜 후배가 맞나?
평소에 보여주던 모습과 너무 괴리감이 크다.
쟤가 정말··· 술을 조금만 마셨는데도 완전히 취해서 멋대로 오해하고, 강렬한 인상이 남을 정도로 나를 유혹하며 강제로 따먹고, 밖에서 대담하게 대딸을 쳐오던.
그 후배랑 동일 인물이라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윽···."
하지만 곧 두통이 일며,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어졌다.
"그런데 감기약은 이미 있는데···"
그것도 종합감기약이 아닌, 열감기에 특화된 약.
"···두면 언젠가는 써먹겠지."
나는 봉투에서 종합 감기약을 꺼내, 책상 위에 둔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띵~
이번엔 초인종 소리가 아닌,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으···"
약을 먹고 하루종일 누워있어서 그런지, 약간 낫다.
두통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고.
"어, 일어났냐?"
익숙한 목소리다.
약간 낮은, 굳이 말하자면 예쁘다기보단 멋있는 목소리.
스윽 일어나보니, 칠흑색에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나보다도 키가 큰 여자가 보였다.
소꿉친구, 류해은이다.
"···뭐야 네가 왜 여깄어?"
턱.
내 어깨에 팔이 걸쳐진다.
"새끼~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학교 빠져? 요즘 좀 잘해준다고 빠졌네?"
언제나처럼 그렇게 장난을 치는 류해은이었지만, 아픈 나를 배려해선지 내 어깨 위에 올린 팔에는 평소보다 힘이 빠져있었다.
"···야. 감기 옮아. 저리 가. 훠이 훠이~"
"옮아? 푸흡. 야, 내가 너처럼 약해 보이냐?"
굳이 말하자면, 건강해 보이긴 하지만···.
"내가 약하다고?"
나는 스윽 내 옷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서는 잘 만들어진 복근이 보였다.
보디빌더 정도는 당연히 못되지만, 일반인치고는 멋진 복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야, 복근은 너만 있냐?"
스윽.
류해은도 위에 입은 옷을 약간 들어 올린다.
그곳에는 잘 만들어진 11자 복근이 있었다.
···저번에 맨몸 봤을 때는 다른 곳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녀석도 생각보다 멋진 복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맨날 술 처먹으러 다니면서, 어떻게 저런 복근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오··· 그··· 만져봐도 되냐?"
나는 내뱉고서야 깨달았다.
이거 약간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무, 뭐라고?"
류해은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아, 그.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니고, 근육이 너무 멋져서 나도 모르게···"
"···괜찮아."
괜찮다고??
스윽.
윗옷을 더 들어 올리는 류해은.
조금만 더 올리면 가슴이 보일 것 같다.
"그··· 보고만 있지 말고. 만질 거면 빨리 만져···"
류해은의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어··· 그··· 그럼 사양 않고···"
나는 슬며시, 손을 뻗었다.
류해은의 잘 만들어진 11자 복근을 향해.
내 손은 서서히 뻗어 나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10cm.
"으···"
5cm.
"하··· 할꺼면··· 빠··· 빨리···"
3cm.
류해은은 두 눈을 꼭 감은 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cm.
그리고 내 손가락이, 복근에 닿으려는 순간.
쿵쿵···.
""!""
울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급하게 손을 치웠다.
류해은도 올리고 있던 옷을 급하게 내렸다.
"아··· 이건 그··· 어제부터 공산지 뭔지 하고 있는거 같아서 가끔 울리던데···"
"하··· 하핫··· 당연히 장난이지! 진짜 만지게 해줄 것 같았냐? 변태새끼!"
어느새 목소리 톤이 원래대로 돌아온 류해은과 나는 서로 횡설수설했다.
류해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있다.
내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죽 데워놨으니까 맛있게 먹고. 빨리 나아라. 그럼 난 간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내 방에서 빠져나갔다.
"···야, 야!"
벌컥.
쾅!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류해은은 방에서 나갔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이제 와서 뭐 이런 거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는지.
내가 생각해도 참 바보 같다.
나는 멍하니 현관문에 손을 뻗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죽이나 먹을까?"
전자레인지에서 죽을 꺼냈다.
죽은 이미 누군가가 한 입 정도 먹은 모양새였다.
···남아있던 거라고 했으니, 미연이가 먹은 건가?
그럼 본인이 먹으려던 거를 갑자기 나한테 줬다고?
아니, 그럴 리가···.
후배는 당연히 먹을 새도 없었고.
그렇다고 류해은이 한 입 먹었을 리는···.
"···없진 않나."
녀석이라면 일단 바닥에 놓인 죽을 보고 한 숟가락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집에 찾아온 사람이 많네."
평소엔 아파도 거의 혼자서 지냈는데.
뭔가 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서럽거나 쓸쓸하진 않았다.
슬픈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약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쓰윽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죽이나 먹자."
최미연과 류해은.
둘 중 누가 한 입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먹겠습니다."
둘 중 누가 먹었든, 나한텐 오히려 이득이었다.
하루종일 굶었던 나는 한 숟가락도 남기지 않고 죽을 다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