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11. 약속 (3)
유명한 어떤 대학의 주변에 있는, 아주 목이 좋은 장소에 있는 한 카페.
안 그래도 주말엔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카페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사람이 많이 모여 음료를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다.
주문을 많이 받는다고 월급을 더 받지 못하는 알바생은 습관적으로 짓고 있는 접객용 스마일엔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피곤함과 슬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 카페의 사장.
중년 남성도 조금 전까지는 이 알바생처럼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있었다.
갑자기 알바생 하나가 펑크를 냈는데, 그 땜빵을 해줄 사람도 찾을 수가 없고.
안 그래도 바쁜 주말에 알바생 하나가 부족하면 카페에 어떤 사달이 날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집에서 누워 편히 쉬고 있다가 억지로 카페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휴일을 반납하게 된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면, 그편이 더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장의 얼굴에선 밝은 미소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랬다.
음료 한 두 잔과 간식 몇 개를 대가로, 돈 복사 버그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있으니.
이 카페의 사장으로써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남녀 커플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의 눈에선 아주 꿀이 떨어지고 있다.
여긴 대학 주변의 카페인 만큼, 종종 사장이 평일에 근무할 때도 저 커플 중 여자 쪽을 몇 번인가 본적이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눈요기가 되는 외모에, 카페에 올 때마다 사람 무리를 우르르 몰고 다녔기에 사장 입장에선 굉장히 고마운 단골이었다.
카운터에서 멍하니 서 있으면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로 추측건대, 그녀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는 사람 무리는 아마 대학 친구인 모양이었다.
단골손님인 그녀는 오늘 11시 30분쯤 혼자 카페에 들어와서 음료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았다.
평일에 그녀는 혼자 카페에 오는 경우가 없기에, 사장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평소에는 친구 무리를 몰고 다니는 그녀가 혼자 카페에 왔을까?
사장은 훔쳐보는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궁금증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녀가 앉은 곳은 언제나처럼 카페 구석에 있는 창가 자리였다.
그녀는 창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
사장은 곧 '헉' 하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쾌활한 그녀였기에, 웃는 것 자체가 이상하진 않았다.
서비스업계 종사자.
그중에서도 이 바닥에서 오래 굴렀고, 이런 목 좋은 곳에 상대적으로 싸게 자리를 잡은 수완 좋으며,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사장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평소 이른바 접객용 미소라고 불리는 종류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지금 짓고 있는 미소에선 그녀가 진심으로 순수하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연예인 뺨을 왕복으로 칠 수 있을 만한 외모에,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복한 미소.
둘의 시너지효과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장면이었지만, 그렇게 순수하게 웃으니 가히 명화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접객용 미소로도 사람을 카페에 불러들이던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자, 철가루에 자석을 댄 것처럼 미친 듯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와는 달리 그녀가 혼자 있었기에, 그 효과가 더욱 뛰어났다.
카페 안은 금방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카페 사장은 기뻤지만, 내심 불안했다.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다 보니,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면 갑자기 어떤 미친놈이 급발진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지금도 주제를 모르는 몇몇 남자가 순수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기에.
걱정될 수 밖에 없었다.
평소의 그녀를 몇 번인가 본 사장은, 그녀가 결코 순수하고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흔히 요즘 말로 인싸라고 하는 무리.
카페 사장이 생각하기에 그 무리에서 리더격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
보통 그런 무리에서 리더란 단순히 인기투표로 뽑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무리에서 리더란,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며 단순히 행동력이 있다고, 착하다고, 중재를 잘한다고, 돈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행동력만 있다면 그냥 좀 나대는 놈이 되어버린다.
착하기만 하다면 호구가 되어버린다.
중재만 한다면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버린다.
돈만 많다면 단순히 물주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한 무리에 리더가 하나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경우도 있다.
누가 그런 무리에게 '리더가 누구냐' 라고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들 한두 명쯤은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카페 사장이 봤을 때, 그 무리의 리더란 그녀 단 한 명이었다.
단순히 겉으로 보기만 할 때는 그녀가 리더란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걸쳐 관찰했고, 여러 인간관계를 맺어본 경험을 토대로 사장은 그녀가 그 무리의 리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멍청한 남자가 혹시라도 그녀를 꼬시려 한다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여러 개 일것이다.
그녀가 평소에 무리에서 하던 것처럼 은근하게 거절할 경우,
보통 그녀가 속한 무리에선, 그렇게 하면 알아듣거나, 일단은 물러났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꼬시려는 남자는 멍청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못 알아들을게 뻔하고.
그 뒤는 어떻게 하면 될지 안 봐도 뻔했다.
그녀가 가끔씩 그러는 것처럼 확실하게 딱 잘라 거절할 경우.
이 역시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남자가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역시 안 봐도 뻔했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겠지만, 상대가 멍청한 게 전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결과가 나빴다.
심지어 조금은 덜 멍청해서 단번에 알아들었다 치더라도.
더 멍청한 사람이 '쟤는 차였지만, 나 정도면 괜찮겠지?'라며 또 꼬실 가능성이 있었다.
카페 사장이 어떻게 그 여러 가지 경우를 다 생각할 수 있냐 하면.
놀랍게도 비슷한 일을 많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겪었던 것은, 한 키 크고 남자 같은 성격의 슬렌더하고 센 누님 같은 여자가 카페에 혼자 왔었을 때였다.
그때 한 멍청한 남자가 그 여자를 꼬시려다가, 얻어맞고 경찰도 오고 난리도 아니었었다.
뭐, 어떻게 어떻게 잘해서 별 큰일은 없이 해결되긴 했었지만.
당일 장사는 날려 먹었었기 때문에, 뼈아픈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한 남자가 나타났다.
가을인데도 옷을 약간 두껍게 입고 있었기에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앉으면서 슬쩍 보이는 옷 사이로 봤을 때, 웬만한 사람에겐 절대 꿇리지 않을 정도의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 또한 잘생겼다.
연예인 뺨을 왕복으로 칠 수 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지만.
꼬시려고 마음만 먹으면, 여자를 몇은 꼬실 수 있을 정도로 잘생긴 건 틀림이 없었다.
그런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사장의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끼어들어서, 명화가 망쳐지기 때문에?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이 더 보기 좋아지면 좋아졌지.
남자가 끼어드는 것으로 망쳐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림일 때의 이야기.
만약 저 남자가 그녀와 일면식이 없고, 그녀를 꼬시려고 하고 있다면?
꼬셔서 성공한다면 또 몰라, 실패하게 된다면?
주제를 모르고 기회를 엿보는 멍청한 하이에나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게 틀림없었다.
그럼 여러모로 피곤해지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사장의 우려와는 달리 애초부터 둘은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아니, 사장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 둘은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썸 내지는 연인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하이에나들이 떨어져 나갔다.
혹시 그 때문에 손님이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오히려 그 둘의 모습을 밖에서 보고 카페로 들어오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커플이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정말 보기 좋은 커플이다.'
처음에 봤을 땐 그렇게 생각했지만.
점점 보면 볼수록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확실히 남자에게 이성으로써의 호의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남자는, 글쎄.
확실하지 않았다.
호의가 있긴 했지만, 사랑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사장 눈에는.
'음··· 저 둘이 잘됐으면 좋겠는데···'
물론 사장의 그런 생각은 단순히 둘이 선남선녀 커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 덕분에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이 잘된다면, 어쩌면 우리 카페에도 자주 찾아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남자가 갑자기 일어섰다.
뒤에 그녀도 웃으며 일어났지만, 어딘가 미묘한 기색이었다.
아직은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기색.
굳이 추측해본다면, 남자와 여기 앉아서 좀 더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안 그래도 둘이 카페에 머무르게 하고 싶던 사장이다.
그럴만한 명분도 생겼으니, 행동하기는 쉬웠다.
"자, 잠시만요. 손님들!"
사장은 남자와 대화를 하며, 그녀에게는 찡긋 눈짓했다.
곧 사장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고개를 숙여 사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급을 받으며 일하고있는 알바는 낭패란 표정을 지었지만.
"오늘 일한 건 적어도 두배는 더 쳐줄테니까. 조금만 고생해줘. 알았지?"
그런 사장의 말에 내내 침울하던 알바의 얼굴엔 사장의 얼굴에 떠있는 미소와 같은 미소가 떠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