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지긋지긋한 악연
* * *
일본에 일이 터져서, 그쪽에서 내 도움을 절실히 바라는 것도 알겠고.
그 요청을 KMU나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쌩까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없는 동안 KMU나 다른 길드가 잠잠하게 기다려줄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이 틈을 타서, 뭔 짓을 벌여도 벌이겠지, 이 더러운 씹새끼들.
“그렇군, 그래서 우리를 찾아온 거로군.”
그래서,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여기, 단대 패밀리에 찾아온 것이다.
내가 찾아온 걸 알자마자, 딱히 별다른 말 없이 안으로 들여 보내준 박아정은, 내게 자초지종을 듣더니 슬쩍 다리를 꼬면서,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 일단 회장이 없는 동안, 내가 이 조직의 결정권을 임시로 맡긴 했다만, 함부로 판단을 내리긴 힘든 일이다.”
뭐, 그렇겠죠.
내가 없는 동안, 우리 길드 하우스를 좀 보호해달라는, 그런 막연한 부탁을 함부로 들어줄 수 있을 리가 없죠.
아쉽지만,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냐, 깔끔하게 물러나야지.
“그런가요. 그럼 뭐 하는 수 없죠. 실례했습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가졌던 일은 아니라, 미련 없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돌아나가려는 나에게, 박아정이 담담하게 물어왔다.
“하나만 묻지.”
그 목소리에, 내가 다시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리저리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앉아 있던 다른 주단대 패밀리의 일원들 전부가, 내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발, 이 사람들 갑자기 왜 이래.
평소에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인간들이 갑자기 이러니까, 존나 팔에 소름 돋잖냐.
“너는 일본에 있다는 그 아이가, 지금 네가 있는 이곳보다 더 중요한 건가?”
아니, 씨발.
존나 진지하길래 뭔 질문인가 했더니, 왜 그런 좆같은 질문을 하고 난리십니까.
“그렇게 물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겠죠.”
“그런데 어째서? 너는 이곳에 남을 이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지 않나. 그걸 알면서도 굳이 가겠다?”
그야 당연히, 나에게는 내 여자들이 있는 템페스트가 가장 중요하지.
만약 히요리를 구하는 대신, 이곳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당연히 히요리가 아니라 여기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 히요리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 히요리 역시 내 사람이니까.
그런 그녀가 지금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아예 구하러 가지 않을 수는 또 없지 않냐.
말이 조금 장황하게 흘러나와서, 제대로 이해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잘 알아들었다는 듯, 박아정이 입을 꾹 닫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이쪽을 주시하던 다른 세 명 또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금세 관심을 거두고, 하던 일로 분주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처럼 이상향을 꿈꾸는 군주들은 꽤 많이 봐왔지.”
“예...?”
“그중,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그런 이들을 꽤 좋아했다.”
‘아마 회장이었어도, 이와 똑같이 말했겠지.’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박아정이, 굳혔던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뒤이어 내가 기다리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도와주도록 하지.”
“오우 쒯!”
도통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아무튼 도와주신다는 말만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감사, 압도적 감사!
“너는 성공해보도록.”
“당근빳따죠, 쒸바!”
대답만큼이나 행동력 또한 아주 화끈하신 그녀는, 나를 도와준다는 결정을 내리자마자, 곧바로 주변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패밀리에게 짐을 싸라고 명령을 내렸다.
좀 의외였던 건.
제일 말을 안 들어 처먹을 것 같이 생긴, 더벅머리의 게임 폐인 츄리닝 남자가, 그 말을 듣자마자 순순히 짐을 싸러 가더라.
중증 오타쿠처럼 생긴 하얀 가운의 파오후 새끼도, 귀찮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곧바로 명령에 따랐고.
오히려, 제일 말 잘 들을 것처럼 생긴, 지 스스로 인공지능이라고 주장하는, 가슴 큰 여중생이 그 말에 따지고 들었다.
“반발, 회장이 알게 되면, 질타할 것입니다.”
어째, 얘는 상태가 저번보다 더 안 좋아졌냐, 씨발.
“음, 이 아이는 신경 쓸 것 없다. 그냥 박아연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나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딱히 혈연이나 그런 관계는 아니고...”
“역정, 쓸데없는 말로 상황을 회피하지 말기를 요청합니다.”
진심으로 대가리 상태를 걱정하게 만드는 그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 박아정을 향하던 불똥이 나에게도 튀기 시작했다.
“마왕, 당신은 민폐 덩어리라고 생각됩니다.”
“씨발, 갑자기?”
니네 보스 대행이 허가한 걸, 왜 나한테 지랄이냐, 진짜.
아니, 그리고 뭐?
“마왕? 야, 내가 왜 마왕이냐?”
“....., 마왕의 이미지와 찰떡이기 때문에, 마왕입니다.”
이 쌍년, 니 방금 머뭇거리는 거 다 봤다.
그냥 따지려고 물어봤던 질문에, 저런 반응을 해 오니까, 이게 또, 합리적 의심이라는 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야, 내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에서 나를 보고 다들 마왕이라 부르더라고.”
근데, 그게 처음 나를 그렇게 부른 새끼가 분명히 있었거든.
아마도, 그 이후로 내 호칭이 마왕으로 정착된 모양이고.
“그 스타트를 끊은 게, 설마...? 에이, 설마? 니가 그랬을라고? 응? 아니제?”
“.......”
이 씨발년, 인공지능이라던 년이!
요새는 인공지능도 식은땀을 흘리냐, 씨발!
니는 미성년자 아니었으면 나한테 메챠쿠챠 혼났다, 진짜!
“뭐,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 그 아이를 너무 괴롭히지 마라.”
박아연의 말은, 내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마왕이라 불러도 될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고.
그렇다면 박아연은 내가 마왕이라고 불릴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었지만.
우릴 도와주시겠다는 분이,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하셨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 맞지, 음!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전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그래, 네 출국 날짜에 맞춰, 우리도 템페스트 길드에 들어가도록 하지.”
그렇게 주단대 패밀리의 도움을 확실히 장담 받은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박아정의 방에서 나와, 1층 버튼을 누르며 신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어째선지 그런 내 뒤를 박아연이 졸졸 따라오는 게 아니겠냐.
“뭐냐?”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어서, 퉁명스럽게 이유를 물었더니.
상상도 못 했던 말과 함께, 그녀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히 가십시오.”
아니, 뭐라고?
이걸 공손하게 배웅까지 해준다고?
“어... 어, 그래...”
어쩌면, 이년도 그렇게 나쁜 년은 아니었던 걸까...!
촤아아아악!!
라고 생각했던, 나의 말랑한 정신머리를 꾸짖었다.
“그리고, 다신 오지 마십시오, 마왕! 소금이나 먹어라!”
씨발년이, 엘리베이터 다시 못 여는 타이밍까지 계산해서, 문틈 사이로 소금을 처뿌리고 튀었다.
나쁜 년은 아니었고.
그냥 싹 바가지 없는 년이더라.
* * *
그 뒤로 며칠이 지나고, KMU에서 보내온 일본 사태에 대한 자료까지 받아, 드디어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이 되었다.
얼마간 집을 비워야 한다고 말했더니, 하빈이가 아주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서.
울지 말고, 엄마들 말 잘 듣고 있으면, 아빠가 갔다 와서 하빈이 원하는 소원, 무조건 하나 들어준다고 말했더니.
겨우 울음을 그치며,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빠아... 다녀오째요...”
그렇게 말해주었다.
씨발, 내가 우리 딸내미 보고 싶어서라도, 일주일 내로 전부 정리하고 돌아온다!
일주일도 좀 긴 것 같지만, 최대로 잡아서 일주일이라는 말이니까.
뭐, 나라면, 당장 내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그대, 준비 끝났으면 얼른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아, 그래. 그럼, 갔다 올게.”
원래는 단일 전력으로는 가장 강한 레이를 한국에 남기려고 했었지만.
주단대 패밀리가 도와주기로 한 덕분에, 이 사태에 가장 도움이 될만한 레이를 데려갈 수가 있게 되었다.
일하러 가는 건데, 어딘가 들뜬 것처럼 보이는 레이를 데리고 공항에 도착했더니, 일본에서 보낸 전세기가 있다며, 스튜어디스 눈나가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신분도 뭣도 없는 레이를 어떻게 출국시킬까 고민했던 것도 무색하게, 일본 측에서 무제한 환영을 외쳤다는 것 같고.
“그럼, 훌륭히 사건을 해결한 뒤, 무사 귀환하길 바라겠습니다.”
KMU 직원 한 명의,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들은 후에.
나와 레이는, 일본으로 출발한 것이다.
* * *
“앗, 주 상! 여기입니다!”
일본에 도착했더니, 저번 중국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 쪽에서 준비한 여자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고, 조금 세련된 느낌의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사실, 내가 그녀를 이렇게 자세히 쳐다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처음 멀리서 봤을 때, 이 가이드의 모습이 영락없는 히요리처럼 보여서, 시발.
히요리인 줄 알고 존나 놀래서 뛰어갔었거든.
“차를 준비해놨습니다, 주 상! 앗, 옆에 계신 분은...?”
“레이라고 부르거라.”
“네, 넷! 레이 상도 같이 가십시다!”
물론, 가까이서 보니 기척부터가 히요리와는 달랐고, 얼굴도 많이 달라서, 히요리가 아니라는 건 바로 알아챘다만.
진짜, 그 히요리의 귀염귀염한 강아지상과 아주 판박이라는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도, 최대한 분위기를 밝혀 보려고 떠드는 모양새가, 꼭 히요리를 따라 하려는 것 같아 보였는데.
설마, 이 새끼들.
내 여자 취향이 히요리라고 생각해서, 최대한 걔랑 비슷한 여자를 보낸 건 아니겠지, 시발.
“주 상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
“야, 됐고. 얼른 일 얘기나 하자.”
그래서 그냥, 괜히 심통을 좀 부려봤다.
나는 히요리가 무사한지조차 모르고 있는데, 꼭 나한테 그녀의 대체품을 던져주려는 것 같아, 그게 너무 괘씸해서.
“히요리는 어딨냐? 일단 그것부터.”
먼저 내 용건부터 우다다 쏘아붙였는데, 어째 그녀의 반응이 영 탐탁지 않았다.
“저, 그게...”
“아 좀, 빨리 말해라, 좀!”
한국인은 빨리빨리! 모르냐?
“그... 쿠노 양은... 처음 사건이 터진 현장에서... 실종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그녀의 말을 듣고.
이곳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