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7화 〉047 공허마녀(6) (47/116)



〈 47화 〉047 공허마녀(6)

르네는 반사적으로 잔느를 뒤로 물리고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뭐, 역시 많이들 놀라시네요, 우리 후손분들. 그런데 저도 많이 놀랐어요. 아직까지 저를 이렇게 끄집어내는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눈앞에 있는 그.. 잔느? 잔느 양이 처음이에요. 선조로서 참 기쁘네요.”

“당신이 용사.. 맞습니까?”


“그래요, 맞아요. 여신년한테 운나쁘게 코가 꿰여서 굴려지는 노예를 말하는 거라면 제가 맞네요.”

“선조님, 여신을 모독하시면..”


잔느는 놀라 반문했지만 용사의 얼굴을 보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처연해보이기까지 한, 용사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서려있었다. 그 기분이 어떤지 아는 르네는 눈앞의 상대가 용사임을 확신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각이 용사가 맞다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르네는 칼에서 손을 놓고 자세를 바로했다. 르네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먼저 했다.


“마왕을 봉인하고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곧 그렇게 할 예정이지요.”


“……”

“이야, 그래도  후손이 이렇게 오래 이어지면서 번창하는 걸 보는건 나쁜 기분이 아니네요. 게다가 남자가 여자를 감싸는 건 이 동네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데.. 그쪽이 오빠인가봐요?”


용사는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악수를 하자는 신호. 르네는 약간 어색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용사의 손을 맞잡았다. 용사는 르네를 확 잡아 끌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후손분은.. 여기 사람이 아니네요? 우리 후손분도 지구 출신이에요?”

르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 잔느를 쳐다보았으나 잔느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 했다.

“동생분 한테는 안 들렸어요. 뭐.. 반갑네요. 응원할게요.”


“엑?!”


용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잔느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용사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 세계의 예법에는 남성과 여성은 서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성별끼리 인사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곳은 딱히 악수가 인사하는 관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니까.


‘그걸 그렇게 눈치채나..’

“그러니까, 선조님은 시간도 초월하실 수 있으신 것인가요?”


“그렇게 표현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아, 우리 후손분이 궁금한 것을 풀어주자면, 공간이동에는 제가 간섭했어요. 지금은 여기로 밖에 다닐 수가 없어서 일부러 부른 것이었습니다.”


“왜죠?”


“일단 이걸 받으세요.”

용사는 잔느의 손에 반지 한 쌍을 쥐어주었다. 백금으로 만든 표면에 촘촘한 세공이 되어있는 가느다란 가락지였다. 성인인 르네는  반지에 서려있는 신성한 기운을 느낄  있었다.


“이건..”

“저랑 레나가 쓰던 물건인데요, 짙은 마기 속에서도 지켜줄거에요.”

“그, ‘레나’라면..”

“와이프에요.”

“와이프?”

잔느는 와이프라는 단어의 생소함에 반문했다. 반면 르네는 그 어휘 선택과 발음만으로도 재차 상대방이 자신과 비슷한 문화권의 인물임을 특정할 수 있었다. 애초에 생김새가 비슷하다고는 해도 용사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니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아내라는 뜻이에요. 웬수 말하는 겁니다, 웬수. 뭐만 조금 할라치면 어찌나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풉……”

르네는 잔느의 입술이 마구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용사의 말이 뭔가 그녀의 유머코드를 자극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용사가 언급한 레나는 당대의 레나투스였던 레나 레나투스를 의미했다. 잔느에게 있어서는 신화 속의 영웅이자 가문을 일으켜 세운 까마득한 선조님인데 이렇게 용사를 통해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접하게 되니 더욱 웃음이 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용사도 굉장히 소탈한 성품인 것 같고.


“뭐, 그런 웬수랑 쓰던거니까 이렇게 처분하는거 아니겠어요? 부디 두분이서 소중히 써주기실 바래요.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말고.”


용사는 잔느의 손에 강제로 반지를 쥐어주었다. 살짝 상기된 잔느는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이 꽤 위험해보였다. 하기야 용사와 용사의 유일한 정실인 마법사 레나투스가 서로의 인연을 기념하여 쓰던 반지라면 잔느로서도 군침을 흘릴만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그 용사가 직접 르네와 쓰라며 건네준데다가 확실한 효능도 있는 아이템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요.”


“뭔가요?”

“여기서 야영하지 말고 이동하세요. 그리고.. 오빠분은 이 근처를 지키는 귀족에게 도착하는 대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


“뭐, 내가 시작한 일을 이어받아 줄 여러분이 죽으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짧게 말할게요. 마왕을 완전히 봉인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시간을 벌지 않으면 용사가 이겨도 세계가 망해버릴 지경이에요. 그게 제가 마왕을 봉인하는 이유에요. 뭐.. 레나가 일을  했으면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요.”


용사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당장은  정도만 하지요. 솔직히 봉인 건을 놓고 레나랑 많이 싸웠는데, 여러분을 보니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 것 같아요. 또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저기..”

제대로 인사도 주고 받지 못한 채 용사는 사라졌다. 르네와 잔느는 뭔가에 홀린듯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불이 꺼지는 것처럼 용사는 가버렸다. 하지만 잔느의 손에 남은 반지는 조금 전의 일이 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는데.”

르네는 마왕 봉인의 진실이 피상적으로 알려진 사실보다 훨씬 참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레나투스 가문의 선조는 그 진실을 함구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머니한테 물어보면 알려주시려나?”

“그럴 지도 몰라. 아직 비밀 인계는 시작도 안했으니까.”


“……”


“그, 그보다 오빠. 손 내밀어 봐.”

아무래도 잔느는 다른 일행이 돌아오기전에 서둘러 반지를 건네주고 싶은 것 같았다.


“잔느, 이건..”

“크흠. 그냥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오랜만에 만난 오빠가 반가워서 주는거야. 하도 오빠가 반지건 귀걸이건 안 하고 다니니까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써야 하잖아. 감사히 여기라고.”

“거 참..”

잔느는 르네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도 반지를 끼웠다. 귀족에다가 남성인 르네는 악세사리를 선물받는 일도 많았다. 다만 원체 귀찮은 것을 싫어 하는지라 전부 받아만 놓고 서랍에 보관만 해놓은채 착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장 르네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항상 손에 반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의외로 나쁘지 않네..”


신성력이 깃든 물건이라 그런지 반지는 손가락에 편안했다. 르네는 그런 의미를 담아 중얼거렸다. 잔느는 그것을 반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주인님! 저희 왔어요!”


잠시 뒤 흩어졌던 일행이 저마다 필요한 것을 챙겨 복귀했다. 레이첼은 숲에서 새 둥지를 통째로 털어왔는지 날짐승 여러마리와 새알을 잔뜩 가져왔다.

“……”

르네와 잔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말까?’

‘그러자.’


르네는 용사에 관한 일은 함구하기로 했다. 말한 들 믿지 못할 것이고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일행은 간만에 괜찮은 식사를   있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른 일행에게 르네는 조심스레 다시 움직여야   같다는 뜻을 전했다. 애초에 르네의 말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저 르네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일행은 지친 몸을 채찍질 해가며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슬슬 해가 질 무렵, 완전히 숲을 빠져나오고서도  멀리 지나왔을  일행은 돌연 뒤에서 뭔가 안좋은 느낌을 받았다.


“……”


일제히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고요하기 짝이없던 숲 위로 새떼들이 마구 혼란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서두르자.”

일행은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러기를 약 이틀. 잠깐 휴식을 취하며 눈을 붙이는 외에는 모조리 거리를 주파하는데 사용했다. 슬슬 르네와 텔라를 제외하고는 걷는게 힘들어질 무렵 일행은 겨우 사람이 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쿨레우스 변경백..”

이리저리 가시가 솟은 것 같은 험상궂은 모양의 요새. 잔느가 성벽에 내걸린 깃발을 알아보았다. 이미 르네 일행이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부터 알아차렸는지 성문 앞에는 사절단이 나와있었다.


“내 눈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군, 레나투스 경.”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곱슬곱슬한 갈색머리를 휘날리는 기사였다. 등에는 각종 상감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활을 메고 있었다. 활을 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인지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얇은 가죽갑옷만을 입고 있었다. 덕분에 잘록한 허리라인이 가감없이 드러나있었다.

“릴라노르.”

“르네..?”

르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상대방도 르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 눈에는 황당함과 동시에 살가워하는 느낌이 잔뜩 묻어났다.

“그대들은 지금껏 내 성을 방문했던 그 누구보다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것이오. 어서 드시오.”

릴라노르는 서둘러 르네 일행을 들여보냈다. 릴라노르는 르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작게 덧붙였다.


“사실은 그대들이 첫 방문객이니 어떻게 대접하든 내 말은 진실이 되지.”


“푸훗.”

르네는 생각지도 못한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르네보다 조금 뒤에서 따라가던 잔느는 살짝 고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 왠지 꼰대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위험해보이는데..’

아무래도  자는 르네가 수도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사람으로 보였다. 게다가 단숨에 저만큼 어깨가 닿을락말락 한 거리까지 접근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미 르네와 잠자리까지 같이 한 사이로 보였다. 아마도 르네가 수도에서 지내는 동안 데리고 놀았던 모양. 잔느는 르네가 고향을 떠난 뒤  화려하게 놀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왕국의 최전방에까지 나와있을 줄은 몰랐었다.

‘차라리 마르그리트 그 쌍년만 상대하는게 나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쪽으로 눈을 힐끔거리면서 각을 재는 것이 꽤나 골치아플 상대로 보였다.


‘저 쌍년, 몸 달아서 들러붙는 꼬라지 하고는.’


릴라노르는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성의 북쪽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나타났다. 보고를 받고 놀란 그녀는 혹시나 마물들의 수작인가 하여 직접 성벽에 나와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선두에  두명은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특히나 르네의 경우는 릴라노르가 일생의 은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절대로 그녀가 잊을 수 없고 알아보지   리도 없는 인물이었다. 릴라노르는 오랜만에 만나는 르네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니 동생 맞지? 지금 엄청 예민해보이는데?”

“나랑 너 사이를 조금 오해할 수도 있어. 너무 자극하지 마.”

“오해? 하하, 오해해도 할 말 없는 사이 아냐?”

“나 진짜 진지해, 궁서체야.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일단 가신들 불러. 마물들에 관한 일이야.”

“그래? 그럼 나는 먼저 준비하도록 하지.”

릴라노르는 손가락을 튕겨 집사에게 일행의 편의를 봐주라고 명했다. 그녀는 르네와 짧게 눈인사를 주고받고는 다른 길로 사라졌다.


“먼  오신 손님들. 우선 따끈한 물로 피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잔느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우선은 부츠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도 휴식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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