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056 퇴마신궁(8) (56/116)



〈 56화 〉056 퇴마신궁(8)

“……”


그의 친구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고기를 뜯고 있었다. 르네는 대답을 미루고 일단 먹는데 집중했다. 추운 지방의 특성상 음식을 구성하는 재료의 가짓수는 르네가 살던 곳에 비해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르네는 꽤 상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적어도 변경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변경백의 밥상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원하면 좀  쉬다 가도 되기는 한데,  가라.”

릴라노르는 그렇게 말하며 넓적한 식빵에 넓적한 스테이크를 얹었다. 소스는 반숙 상태의 계란 노른자를 터쳐 소금을 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맨 위에 빵을 덮자 와일드한 스테이크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


얌전히 숟가락으로 사골국이나 푸고 있던 르네는 그 모습을 보자 뭔가 도발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르네는 릴라노르와 마찬가지로 넓적한 빵에 스테이크를 얹고 계란 대신 크림소스를 듬뿍 얹었다. 그걸 본 릴라노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위에 빵을 얹고 르네는 그것을 큼직하게 깨물었다. 그리고 처절한 신음과 함께 눈물을 쫙쫙 뽑아내고야 말았다.

“매, 매워!!”

코 속을 인정사정없이 찌르는 겨자의 매운 맛 덕분에 르네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느끼하지 말라고 겨자를 갈아넣었는데 그걸 그렇게 잔뜩 처먹냐, 병신..큭큭큭.”

릴라노르는 그렇게 르네를 놀리고는  빵 위에 르네만큼이나 크림소스를 잔뜩 펴발랐다. 르네가 먹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샌드위치를 만든 그녀는 마찬가지로 큼직하게 입에 베어물었다. 그러나 르네와 달리 그런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으으… 넌 왜 멀쩡해?”


“나야 늘 먹는거니까.”

불만있냐? 라는 투로 우쭐거리는 릴라노르를 보며 르네는 다시 숟가락으로 국을 뒤적거렸다. 이곳의 음식이 좀처럼 입에 맞지 않았던 릴라노르가 찾아낸 해결책은 어떻게 해도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요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고기는 철판에 구워낸 것. 국은 넘치는 고기와 뼈를 이용해 무조건 사골국을 끓여냈다. 야채는 샐러드에 올리브 기름과 소금만 뿌렸다. 거기에 추운 지방에서도 구할 수 있는 열매류 조금. 다행히 빵은 처음부터 나쁘지 않았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릴라노르는 진즉에 변경백이고 뭐고 때려쳤으리라. 그리고 릴라노르의 입 안을 찌르는 겨자소스는 유일하게 릴라노르가 처음부터 인정한 현지 음식이었다.

“……”


르네는 남은 샌드위치를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저주저하던 참에 릴라노르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야, 안먹을거면 이리 내.”


“뭐?”


하지만 르네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잽싸게 시종이 샌드위치가 든 접시를 릴라노르의 앞으로 옮겨버렸다.

“잘했어.”


르네가 국물  그릇을 비우기도 전에 릴라노르의 손에서 샌드위치가 두개 반이나 사라졌다. 이곳의 빵은 각각 성인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였으니 그것들을 먹고도 식욕이 왕성한 릴라노르는 가히 대식가라고 부를만 했다.


‘이번에는 조금만..’

르네는 이번에는 스테이크를  조각 썰어서 표면에 매운 크림소스를 얇게 펴발랐다. 겨자의 매운 성분이 기름진 스테이크의 느끼함을 잘 잡아주었다. 르네는 만족했다. 물론 릴라노르는 그런 르네를 가만 두지 않았다.


“야, 그래서 대답 안하냐?”


“진담이야?”


“그럼 농담이냐?”

“여기 있을래.”


“안 돼. 돌아가. 니 위치를 생각해. 그리고 우리 영지는 영지중에서는 사제가 제일 많아. 게다가 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제대로 판단을 하기가 어렵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모르나?  청순한 뇌도 알기 쉽게 설명해주자면 말야..”

단순히 아군 진영에 보호해야 할 VIP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전쟁 수행 난이도는 부쩍 올라간다. 그 VIP가 혼자서 일개 부대 급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 손실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생각한다면 쉽게 활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릴라노르의 사명은 마물들의 진군을 최대한 막아내는 것. 그 수단에는 드넓은 북부 아쿨레우스 영지 전역을 초토화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뼈아픈 손실이지만 감내해야 하는 손실. 릴라노르는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고 왕국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만 르네와 같은 혹시라도 전황을 뒤집어  지도 모를 수단이 존재한다면? 릴라노르는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필요한 결단을 내리지   위험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마왕의 봉인이 풀린다면 결국 마왕을 다시 봉인하거나 혹은 완전히 소멸시켜야 끝나는 전쟁이  터. 용사가 없는 지금 유일하게 용사 파티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것은 르네 뿐이다.


릴라노르는 위와같은 내용을 최대한 군사기밀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설명했다. 르네도 엄연히 기사였으므로 릴라노르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도  알아들었다.


“……”


그러고나니 르네는 차마 릴라노르에게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르네는 잔느를 흘겨보았다. 움찔 하는 것을 보니 사전에 릴라노르에게 약을 쳐주었음이 분명했다.


릴라노르는 거기에 더해 아예 르네에게 명분까지 만들어주었다.


“조만간 성에 있는 비전투인원들을 피난시킬거다. 남쪽 후방으로. 여기는 영지 내에도 마물이 종종 돌아다니니까, 그 호위를 맡아줘.  남편들..아니, 애인들이랑 딸들도 있으니 말야.”

그쯤 되자 르네는 릴라노르의 말을 수긍할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감각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참으로 얄궂게도 말이다.

“…씁. 어쩔 수 없지.”

르네는 속으로 쾌재를 외치고 있을 잔느를 씹듯 고기를 씹어댔다.

**

과연 상시 전투상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피난 준비는 하루만에 끝났다. 이 정도면 거의 유목민에 준하는 속도가 아닐까 싶었다. 피난가는 인원들은 그리 많은 짐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애초에 다들 기본적인 생활거점은 후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행은 대부분 남자와 아이들. 이런 피난행렬을 보는 것은 르네로서도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내심 전생의 상식과 부딪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릴라노르는 일행에게 꽤 좋은 말을 한 필씩 내주었다. 르네는 적당히 행렬을 보호하기 좋은 위치에서 이들을 살피며 똥씹은 표정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어째 릴라노르년과 얽히면 기를 못 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때 누군가가 천천히 말을 몰아 르네에게 다가왔다. 르네는 차림새를 보고 릴라노르의  중 한명임을 알아차렸다. 도저히 그 자신은 맨정신으로 걸치지 못할 것 같은 선정적이고 야릇한 복장. 전신에 숨김없이 피어오르는 마력. 한눈에 보기에도  강력한 마법사로 보였다.

“남작님, 평안하시옵니까? 로긴이라 하옵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말투.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교태는 화자의 전적을 짐작케 했다. 도리어 이 세계에서는 ‘남자’였기에 이처럼 작정하고 상대의 마음을 녹이려 드는 어조를 접한 적이 없는 르네는 무심결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 얼굴이 붉어지시다니, 제가 남작님을 부끄럽게 해드렸나봅니다. 안심하시지요. 그저 변경백님을 대신해 감사의 뜻을 전하러   뿐이옵니다.”

“…감사랄 것 까지야.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것 뿐인데.”

“부탁을 들어주시기 위해  용단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어제는 제 딸에게 축복도 해주셨지요.”

르네는 릴라노르의 부탁을 받아들여 모처럼 성자 행세를 했다. 신과 마물이 실재하는 세상. 마물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교단의 위세는 대단하다. 덕분에 이곳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사제의 축복을 받고 신성력을 쬐면 몸이 튼튼해지고 질병과 재앙이 비껴간다고 믿었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사제를 애인으로 두고  대해주면 여신의 은총을 받아 운이 좋아진다는 속설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상 여신은 권능을 잘 내려주고 교단은 고아 양육  가족 복지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무신론자였던 릴라노르도 실재하는 신의 권능을 눈으로 보고 나니 그런 속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릴라노르는 자신이 지금껏 무사히 변경백으로 지내고 있는 것도 르네와 한번 자서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첫째 아이가 그대의 딸이었나?”

“알아봐주시니 기쁘옵니다.”

르네는 릴라노르가 첫째라고 소개한 딸아이를 이 남성이 소중하게 안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릴라노르는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겠다던데.”

“참.. 남작님도 짖궂으시옵니다.”

로긴은 얼굴을 붉혔다. 그 행색에 르네는 아차 싶었다. 르네 자신에 비해 훨씬 섬세한 이 세계 남성들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발언이었다. 하렘의 일원에게도 그러한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남작님이시니 답변을 드리자면, 저는 미숙하지만 마법을 부릴  압니다. 변경백님과 잠을  때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하지만 릴라노르는 모르고 있던데?”

“그.. 사실.. 제가 밝히기 전에 변경백님께서 먼저 알더라도 밝히지 말라고 하셨사옵니다. 첩들간에 싸움이 난다고.. 그렇다고 첩마다 한 명씩 원하는 대로 아기를 낳아주다가는 당신께서 몸이 망가지거나 죽을 것 같다고도..”

르네는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릴라노르의 뱃속에 사정하는 순간 마력으로 표시를 해두어 착상하는 순간까지 감시하고 있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의 몸 속에 그것도 여인의 음부에 타인의 마력이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도록 내어주었다는 것의 의미는.. 르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 두었다. 그저 릴라노르가 진심으로 여자의 몸으로 노는 것을 즐겼구나 하고만 여기기로 했다.


“……”


그래도 그런 르네의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로긴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참, 그때는 황홀했사옵니다. 변경백님께서는 아무리 애원해도 저희를 놓아주지 않으시고.. 당신께서도 혼절하실 것 같은 와중에 끝까지 저희들을.. 안아주셔서..기꺼이 저희들의 씨앗을 품어주시겠다 말씀하시는 모습은 너무나도 멋지셨..”

“그만.”


르네는 로긴의 말을  듣기 싫었다. 가만 보니 꽤나 건방진 구석이 있었다. 로긴은 르네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즉시 숙이고 들어왔다.

“용서하십시오. 남작님의 심기를 거스를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니라면서도 르네는 그 속에 숨겨진 음습한 질투를 읽어냈다. 필경 자신이 릴라노르의 첫사랑이라고 생각하여 이러는 것이리라. 그런 외부의 인식은 르네와 릴라노르를 둘 다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딱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로긴은 르네가 제대로 긁히지도 않고 도리어 자신이 민망한 기분이 들자 잡다한 말을 몇 마디 더 조잘대다가 다른 곳을 살핀다며 가버렸다.



“……”

어느  성에서 반나절 거리를 왔다. 이제 슬슬 휴식과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호위대의 리더를 찾던 르네의 안색이 돌연 굳어졌다. 무언가가 머리 한 쪽을 쿡쿡 찌르는 듯한 불쾌한 감각.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 허공 어디쯤에서 뭔가가 갈라지는 느낌. 르네는 그 감각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황급히 시야를 돌렸다.

공간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 틈사이로 지독한 마기가 새어나왔다.


“전원 대피! 마왕의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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