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087 예속화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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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예속화신(4)
텔라는 다소 초조한 모습으로 칼자루를 쥐락펴락 했다. 셰리는 잠자코 텔라가 마음을 추스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텔라라면 그녀의 주인을 위해 기꺼이 불속에 뛰어들 용기를 발휘해줄 테니까. 게다가 지금 텔라가 하려는 일은 위험도라는 측면에서는 몇 시간 전에 벌인 싸움보다 훨씬 안전한 것이었다. 채 피로가 풀리기 전이라는 것이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셰리는 자신을 뒤따르는 텔라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 해, 텔라?”
알면서 묻는 말. 텔라는 그런 셰리의 배려를 흘려넘기지 않았다.
“아까 근위대원들. 하나같이 무시무시하구나 싶어서.”
텔라는 얼굴까지 면갑으로 전부 가린 차림새의 근위대를 보며 부르르 떨었다. 굳이 일부러 그런 편집증적이기까지 한 장비로 전신을 감싸는 것은 그녀가 알기로 왕실근위대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얼굴마담이기도 한 부대장이라는 사람만은 얼굴을 내놓고 다녔지만.
“뭘 그리 걱정을 하니. 내가 봤을 때 개개인의 실력은 너랑 크게 차이나지 않아. 1대1로 붙으면 적당히 장비랑 지형의 이점으로 잡을 수 있어. 물론.. 그 근위대장은 조금 힘들겠지만.”
“그 근위.. 부대장. 그 사람은 어딘지 조금 불쌍한 느낌이었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뭔가 이상했어. 어떻게 자신들의 대장이 그런 수모를 겪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가 있지? 그게 훈련으로 가능한거야?”
“물론 아니지.”
“뭐?!”
“농담이야. 애초에 내가 근위대에 대해서 뭘 알겠니.”
셰리는 놀라서 반문하는 텔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둘은 평소 드나든 적 없는 복도로 들어섰다. 텔라는 정작 자신도 사는 저택이면서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복도가 신기했다. 셰리는 텔라를 이끌고 복도의 끝에서 두번째 방에 들어간 뒤 교묘하게 숨겨진 레버를 움직였다. 그러자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입구가 드러났다.
“와… 우리 저택에 이런게 있었다고?”
“애초에 이 왕국에 비밀통로가 없는 저택은 존재하지 않아, 텔라. 너도 이제 정식으로 주인님의 측근이 되었으니까 알려주는거야.”
“그, 그런거야? 그럼 우리 저택에서는 누가 또 여기를 알고 있는데?”
“나, 너, 로메오, 주방장. 지금부터는 목소리 낮춰.”
“으.. 알겠어.”
텔라는 소드벨트의 끈을 조여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죽였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너도 모르지는 않겠지. 왕실에서 주인님을 납치해가려는 참이고 메살렌님과 공작님이 안에 계셔. 주인님만 계셨다면 순순히 저들을 따라가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주인님을 내주려하지는 않겠지. 근위대가 순순히 돌아간다면, 우리가 나설 일은 없어. 하지만 메살렌님이 피를 보고 전부 죽여없애기로 한다면.. 우리는 퇴로를 막을거야.”
하지만 어떻게?
텔라는 머릿속으로 그런 의문을 떠올렸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셰리는 통로 한켠에 붙박이장 형식으로 숨겨진 작은 함을 열더니 그 안에 수납된 각종 마법 기물을 꺼냈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스크롤, 각종 비약 등이었다.
‘우와.. 블랙라벨..’
그것들은 하나같이 마법사협회에서 최고급임을 인증한 것들이었다.
“그, 그런게 저택에 있었어?”
텔라의 좋은 시력은 스크롤에 작게 쓰여진 표식을 하나하나 알아볼 수 있었다. 통로를 아예 흙으로 막아버리거나 일정 범위의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등 그야말로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쓰기에 안성맞춤인 것들이었다. 다만 텔라가 놀란 점은 그 스크롤 하나하나의 가격이 보통 왕국민의 1년치 연봉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꾸 멍청하게 굴어. 애초에 이걸 찍어내는 분이 주인님의 어머님이시잖아.”
“그, 그건 아는데..”
텔라의 소시민적인 경제감각을 잘 아는 셰리는 씨익 웃더니 돌돌 말린 스크롤 하나를 텔라에게 휙 집어던졌다.
“우와앗?!”
강력한 마법기물인 그것은 어지간한 물리적 충격으로 망가질 일이 없는 것이건만 텔라는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황급히 그것을 받았다.
“그런 것에 일일이 놀라면 못 써, 텔라. 여차하면 그것들을 물쓰듯 써서라도 주인님께 도움이 되어야 하니까 말야.”
셰리가 던져준 것은 인지속도를 향상시켜주는 마법이 담긴 것이었다. 그것을 사용하면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도 기사의 반응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되고, 기사가 쓰면 두 세 단계의 실력차도 따라잡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들을 다수 상대해야 하는 텔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하아..”
이걸 쓰면 그래도 길을 막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혹은 발버둥치는 정도라도. 텔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생각을 단순하하려 애썼다. 근위대가 주군에게 해를 끼지면 전부 죽여서 입을 막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자신은 손놓고 있으면 되는 것. 갑작스레 이런 식으로 왕실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의문이었으나, 텔라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은 저만치 미뤄두었다. 애초에 그녀는 설령 그녀의 주군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었거니와 이미 오늘 겪은 사건이 허용한계를 아득히 초과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그녀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심지어 경애해 마지않는 그녀의 주인보다도 지체높으신 분이 두 분이나 와 계셨다. 이미 정치적 판단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찌익
텔라는 스크롤의 라벨을 뜯어냈다. 그러자 스크롤은 활성화되어 사용자의 마력을 요구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텔라가 스크롤에 마력을 흘려넣기만 한다면 스크롤은 언제든지 그녀를 위해 그 속에 새겨진 술식을 발동해 줄 것이었다. 텔라는 그 상태로 그것을 벨트 포켓에 꽂아넣었다.
“우와.. 쓰란다고 바로 써버리네? 어쩌면 안 싸우고 끝날 수도 있는데. 그럼 그거 그냥 버리는건데. 텔라 간 크다아~”
“뭐?!”
텔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텔라는 굳어진 얼굴로 셰리를 쏘아봤으나 셰리는 텔라의 어깨받이를 탕탕 두드라며 장난이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텔라는 셰리가 색적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사용해 통로 저편의 근위대의 기색을 살피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 텔라가 잠시 대기하며 몸을 푸는 사이 통로 너머의 상황을 살피던 셰리는 살짝 표정이 굳어졌다.
**
캉!
불똥이 튀었다. 날카로운 검과 검의 충돌. 칼날을 칼날로 받아내는 활용법은 으레 칼날을 상하게 만들기 마련이었으나, 적어도 두 사람이 쓰는 수준의 무기쯤 되면 그런 조심성은 필요 없었다. 메살렌은 자신의 애검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이가나간 곳 하나 없는 클린트의 검을 보면서 내심 혀를 찼다.
‘이 빌어먹을 년이 어디서 이런 물건을 꼬불쳐둬가지고서는..’
메살렌은 칼날에 마나를 듬뿍 담에 작정하고 후려쳤음에도 상대방의 칼날이 말짱한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었다. 언니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메살렌이 사용한 방법중 하나는 이름난 장인들을 포섭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특히나 메살렌이나 이 저택의 주인이 사용하는 것 같은 명품을 제작하는 장인은 수도에서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 무기를 봉하는 것으로 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되자 메살렌은 조금 대담하게 파고들며 클린트를 몰아붙였다. 양손검의 길이를 이용해 클린트를 벽으로 밀어낸 메살렌은 그대로 찌르기를 날렸다.
휘익!
그러나 벽에 몰린 줄 알았던 클린트는 도리어 벽을 박차고 찌르기를 피하며 메살렌의 허를 찔렀다.
“큭!”
메살렌은 자신의 성급함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클린트를 찔러가던 것을 멈추고 황급히 몸을 굴려 클린트의 반격을 피했다.
“젠장!”
굴욕.
그러나 메살렌이 그것을 곱씹을 틈을 주지 않고 클린트는 연달아 칼을 휘둘렀다. 일단 빼앗은 공격권을 넘겨주지 않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야!”
메살렌은 다시 몸을 굴려 자세를 회복하려는 순간 클린트의 칼날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클린트는 상대방이 왕녀이건 아니건 아랑곳 않고 정말로 살수를 쓴 것이었다.
끼기긱!
메살렌은 기다란 칼날의 한가운데를 손으로 움켜쥐고 하프소딩으로 클린트의 공격을 비껴냈다. 그리고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그녀의 콧등을 이마로 들이받았다.
빠악!
클린트의 고개가 뒤로 홱 꺾였다. 메살렌은 훤히 드러난 클린트의 목줄기에 칼을 꽂아넣었다.
서걱
예리하기 그지없는 칼날은 간단하게 클린트의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메살렌은 칼끝에 뭔가가 막히는 것을 느끼고 다시 칼을 쑥 빼내었다. 거의 한 뼘 가까이 피가 묻어난 칼날. 칼은 충분히 깊숙하게 상대방의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몸을 완전히 관통해 갑옷 뒤편에 막힌 것이었다.
“퉤! 번거롭게 하긴!”
메살렌은 입안을 파고든 머리카락을 불어내며 씹어뱉듯 상대방에 대한 감상을 고했다. 그와 동시에 경추가 완전히 끊어진 클린트는 힘없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입에서 끄륵 하고 피끓는 소리를 내었지만 머잖아 그것도 멈추리라.
“……”
삽시간에 고요함이 찾아온 복도. 메살렌은 매서운 눈으로 근위대를 쏘아보았다. 자신들의 대장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누구 하나 동요함을 보이는 일 없이 메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질적인 차가움. 그러나 메살렌은 그녀를 바라보는 기세가 조금 전보다 더욱 매서워졌음을 느꼈다.
찰박
어느새 클린트의 시체에서 새어나오는 핏줄기가 메살렌의 발치에 닿았다. 메살렌은 다시 칼의 손잡이를 바로 쥐고 근위대를 겨누었다.
“다음은 어느 년이냐!”
자신들의 대장이 당했는데도 미동도 않는 그녀들. 메살렌은 근위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로지 국왕만을 섬기는 그녀들은 제 아무리 메살렌이 왕녀이거나 혹은 왕국군의 총사령관이라 해도 그녀에게 조금도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녀에게 협조하려 들지도 않았고 그녀의 지위를 존중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국왕을 위할 뿐, 주변의 그 무엇과도 상호작용 하지 않는 인형같은 녀석들. 그런 비인간적인 특성은 자신들 내부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로 발휘되는 것일까? 근위대는 여전히 복도에서 진형을 유지한 채 메살렌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것들이..’
메살렌은 그 모습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부하들이었다면 대장이 당하는 순간 너 나 할거없이 분기탱천하여 뛰쳐나오고도 남았을텐데
“이 젖가슴은 장식으로 달고있는 년들아! 그따위로 겁먹고 처박혀있을 바에는 가슴 다 잘라버리고 남자처럼 굴던가!”
“……”
‘이래도 반응이 없는가. 그럼 대체 무엇하러..’
메살렌은 단체로 모욕을 당하고도 근위대가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몇몇 간부들을 제외하면 근무중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녀석들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입이 무겁다 해도 지금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얼굴 표정이 어떤지까지 전부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메살렌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묵묵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인 고기로 된 인형 그 자체였다. 메살렌은 그 이질적인 모습에 노기를 참지 못했다.
“이..!”
막 메살렌이 소리치려던 그때였다.
“제 부하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메살렌님.”
메살렌의 몸이 우뚝 굳어졌다.
“너..”
그녀의 발치에 놓인 시체는 분명 대답하는 목소리의 주인이었으니까.
저벅저벅
근위대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근위대는 자연스레 좌우로 갈라지며 걸어나오는 이를 향해 길을 열어주었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녀석들이니 말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어떻게 된..”
메살렌의 눈앞에는 또 다른 클린트가 넌더리난다는 표정을 지은채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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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화 〉 088 예속화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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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예속화신(5)
메살렌은 굳이 발치의 시체를 확인하는 멋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녀 정도로 기감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마력을 느끼는 감각으로도 상대방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근위대원들을 제치고 메살렌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방금 그녀가 찔러죽인 클린트가 확실했다.
“단순히 날이 잘 드는 칼인줄 알았습니다만, 주인을 가리는 기능도 있는 줄은 몰랐군요. 굳이 다친 손을 배려해 손속을 둘 필요는 없겠습니다.”
클린트는 뭔가 개였다는 듯 조금 전보다 한층 홀가분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이번에는 메살렌이 그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방금 전 자신에게 찔려죽은 주제에 저 여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는 네년은 주인을 제대로 못 가려서 나한테 칼을 들이대냐? 아무렴, 너같은 찌끄래기보다야 내가 고르고 골라 벼려낸 칼이 훨씬 믿음직스럽지.”
“흐흥.”
그러나 클린트는 메살렌의 받아치는 말에 도리어 코웃음 칠 뿐이었다.
“저로서는 ‘진정한’ 주인을 단 한순간도 헷갈린 적이 없는데 말이지요. 조금 전은 그저 같은 혈통에 대한 예우임을 깨달으십시오. 이 ‘모질이 타격인형’ 왕녀님.”
‘씨발년이!’
메살렌은 욕설을 내뱉는 대신 이를 악 물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메살렌은 자제심의 한계를 시험받고 있었다. 클린트가 지적한 점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즉, 현 국왕이 메가엘라를 자극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멘탈을 뒤흔들기 위한 도발로서는 지극히 효과적이었다. 단순히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군 쇠막대로 들쑤신 정도가 되었으니까. 정쟁에는 도무지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주제에 차마 왕이 최측근에게도 밝히지 않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있으니 메살렌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
클린트는 칼자루를 쥔 메살렌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확인했다.
“아, 참. 왕녀님. 제가 칠칠맞게도 칼을 거기에 두고와서 말입니다. 이리로 좀 던져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부웅!
‘죽여버리겠어!’
공간을 가르는 것 같은 깔끔한 일격. 메살렌은 클린트를 어떻게 하겠다고 마음먹기도 전에 이미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머리 끝까지 피가 몰린 주제에 칼을 휘두르는 신경을 관장하는 어느 한 부분만은 이상하리만치 차가워서 메살렌의 동작은 더없이 아름답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클린트의 웃는 낯에 쩌적 하고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갑옷 컬러에 가려지지 않는 귓볼 언저리부터 시작되어 아랫턱을 지나 아예 갑옷째로 어깨와 팔을 가르고 지나간 일격은 클린트를 클린트였던 고깃덩이로 만들었다.
철푸덕!
머리와 팔을 잃은 몸뚱이는 무거운 쪽을 향해 바닥에 붙어버렸다.
“후우…씨발, 씨발, 씨발, 이 씨바아알!!”
“쯧쯧쯧, 여전히 거칠기 짝이 없는 성정이십니다. 저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조금도 느끼는게 없으십니까?”
이걸로 세번째. 또 다시 클린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메살렌은 갑옷 속에 얼음이 들이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명백한 적대감. 조금 전과는 달리 클린트의 기세가 매우 매서웠다. 이제 그녀는 확실하게 메살렌을 적대하고 있었다.
“너.. 설마 일부러 나한테 죽은거냐?”
“그래야 왕녀님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이래저래 불편한 제약이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클린트는 그 말과 함께 메살렌의 뒤켠에 있는 자신의 시체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휘리릭
그러자 클린트의 검이 빨려들듯 날아와 클린트의 손에 쥐어졌다.
“제 것은 주인을 찾아오는 기능이 있지요. 뭐, 그쪽의 것에 비하면 보잘것 없습니다만.”
그 말에 메살렌은 뭔가를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럼.. 네 뒤에 있는 인형들도 나를 죽이고나면 주인을 찾아가겠군?”
“무슨 당연한 말씀을.”
“너 여기에는 본체가 없지?”
“……”
클린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메살렌은 그 말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대체 자신의 어머니와 언니가 매번 자신을 궁 밖으로 돌리면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인가 하고.
왕국은 항상 마물의 위협에 노출되어있다. 마물은 단순히 강력한 전투력과 인간에 적대적인 성향때문에 경계받는 것만은 아니었다. 마왕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마왕이 봉인되고 그 영향력이 희미해진 다음에야 알려진 위험한 특성.
그것은 마물들의 영혼이 어떤 모종의 실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있고(네트워크) 그 실을 타고 움직이는 해당 마물종의 지배자 내지는 우두머리 격이 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당장 마왕의 파편만 해도 매번 등장할 때마다 철저하게 토벌되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다음번에 등장하는 녀석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전의 교전에 대한 피드백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수 차례 그것을 겪은 다음에야 마왕의 파편을 잡을때는 신성결계와 공간결계로 주변을 봉쇄하고 토벌하는 것이 매뉴얼화 되었다.
왕국에서 릴라노르 다음으로 대 마물 지휘경험이 많은 메살렌은 그런 마물의 특성이 얼마나 골치아픈지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물들은 진영을 뚫고 어떻게든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대려 했으니까. 매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나는 유달리 덩치가 크고 강력한 개체가 자신만을 노리고 달려들면 싫어도 알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녀가 아는 한 인간에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일은 들은 적이 없었다.
“더 궁금한 것은 없으십니까? 미련이 남지 않게 좀 더 물어보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클린트의 그 말과 함께 뒷편에 도열해있던 근위대원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전신을 감싼 갑옷에 면갑까지 둘러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형상. 근위대원들이 어처럼 개편된 것은 메살렌이 아직 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 소녀였을 무렵이었다.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이것들이 설마하니 이런 음험한 존재였을 줄이야. 메살렌은 말없이 자세를 바로했다. 대체 자신의 언니와 어머니가 무슨 미친 꿍꿍이를 품고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골치가 아프군.”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입니다. 여차하면 왕녀님의 목을 거두어갈 준비는 언제든 되어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클린트의 발이 움직였다.
‘빌어먹을 년, 감히 선수를 쓰다니!’
조금 전에 메살렌에게 쩔쩔매던 것이 거짓말처럼 클린트는 거침이 없었다. 메살렌이 클린트와 검격을 주고받는 동안 그녀의 빈틈을 노리고 다른 근위대원, 정확히는 클린트의 분신들이 달려들었다. 몇은 메살렌의 뒤로 돌아가 후방을 점하고 두어명은 그리 넓지만은 않은 복도에서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클린트와 함께 메살렌의 사각을 노렸다.
‘씨발!’
메살렌은 피하지 못할 공격은 갑옷으로 받아내고 기다란 양손검을 쥐고 이리저리 공간을 확보해 어떻게든 상황을 버텨내었다. 그러나 클린트의 솜씨는 이미 조금 전보다 훨씬 매서워진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최소 메살렌과 동수거나 조금 더 우위. 그때 메살렌의 감각에 대단히 달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쿵!
메살렌의 뒤로 돌아간 인원들이 저택 심처의 문을 부수려 하는 것이었다.
“멈춰!”
왜 그럴까. 메살렌은 단순히 눈 앞의 적들의 목을 따버리는 것 보다도 그 문이 침범당하는 것이 더 께름칙하게 여겨졌다. 단순히 그녀가 여전히 연심을 품고있는 그가 쉬고 있기 때문일까. 혹은 그녀가 그와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던 장소였기 때문일까. 메살렌이 자리를 이탈하려는 듯 보이자 그 틈을 노리고 날붙이가 뻗어왔다.
사람의 몸으로 하는 모든 동작에 통용되는 것이지만, 어느 한 동작을 취한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빈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메살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근위대원들이 인식한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순식간에 두 명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감탄하는 클린트를 뒤로 한 채 도끼로 방문을 후려치는 대원을 썰어버렸다. 그리고 그 덕분에 메살렌은 기어이 클린트에게 틈을 보이고야 말았다.
쨍그랑!
바로 지척까지 파고든 클린트는 그녀의 칼에 튀어나온 가드로 메살렌의 칼을 엮었다. 그와 동시에 메살렌의 칼이 클린트의 칼에 얽혀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무슨?!”
칼이 날아가는 방향에는 또다른 클린트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메살렌이 다시 당면한 적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근위대의 제식 건틀릿이었다.
쾅!
메살렌의 고개가 휙 꺾였다. 일반인이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갔을 일격. 메살렌은 그 와중에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 맞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조금도 클린트에게 닿지 못했다.
‘어째서?’
고개가 돌아갔어도 메살렌의 감각은 확실히 클린트의 동작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살렌에게 한 가지 운이 없었던 점은, 클린트는 단순히 혼자의 감으로 메살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시야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검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한 그녀는 외부 시야의 도움을 받아도 상대하기 곤란한 실력자였지만, 무기를 잃은 그녀는 클린트 혼자서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큭!”
점멸했던 메살렌의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클린트는 눈앞에 없었다. 그녀의 뇌가 마력의 인식을 따라 클린트가 자세를 낮추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발목이 클린트의 손에 단단히 움켜잡힌 다음이었다.
“그아아아앗!”
클린트는 잠깐 사이에 제자리에서 두 바퀴나 돌아 메살렌을 휘두를 충분한 원심력을 얻은 다음 그녀를 망치 삼아 그대로 문에 때려박았다.
쿵!
“꺼헉!”
메살렌의 입에서 숨이 빠져나가는 비명이 들렸다. 온몸을 파고드는 충격. 그녀가 자랑하는 갑옷마저 찌그러질 정도의 일격에 메살렌의 흉골이 부숴지고 폐가 손상됐다. 클린트는 입에서 피를 침처럼 질질 흘리는 메살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문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 클린트의 주변으로 남은 근위대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호오. 이 문. 보기보다 튼튼하군요? 이만하면 스스로 부서질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메살렌은 막 정신을 잃으려던 참에 그 말을 듣고 퍼뜩 의식이 돌아왔다. 저택 내장재 하나하나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문은 명품이기는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충격을 버틸 물건은 아니었다. 당연히 문이 부서졌으리라 생각했건만.
찌릿
그때 메살렌의 등에 와닿는 어떤 마력의 감촉이 있었다.
‘이미 와 있었군.. 참 성질 고약한 아줌마야.’
등에 와닿는 감촉은 카운트가 되었다. 메살렌은 그것이 임계점에 달한 순간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을 굴렸다.
파츠츠츠츠츠!!!
그와 동시에 문에서부터 막대한 전류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