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축제와 고백(2)
나는 토굴 안에서 밤을 지냈다. 네 사람의 시신은 던전에 집어넣었다.
돌아가는 길에 상점의 잡화창에서 포션을 클릭했다.
-최하급 포션 30카르마
-하급 포션 50카르마
-중급 포션 100카르마
-상급 포션 150카르마
‘내가 썼던 건 어떤 거지?’
증폭을 했는데도 효과가 거지같았던 걸 생각하면 최하급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상점 물가가 왜 이래?”
현실의 물가와는 상관이 없는지 아주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혀를 차곤 잡화창을 닫았다.
길을 계속 걸었다.
* * *
-빠바빵!!
밖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붉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나팔을 부는 게 보였다. 그들은 두 줄로 맞춰 행군하고 있었다.
‘벌써 축제네.’
던전에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돌아왔을 때 세리스가 내 옷에묻은 피를 보며 기겁했고, 그 틈을 타 카라가 혼자 나가려고 한 것을 빼면 평범한 일상이었다.
‘사흘 동안 의뢰를 못 했지...’
왼 팔뚝 부분의 핏자국을 본 뒤로 세리스는 내가 혼자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내 피가 아니라고 해도 세리스의 의지는굳건했다.
‘설마 울 줄은...’
내가 설득하려고 드니까 눈물을 흘리더라. 그래서 그냥 잠깐 쉬기로 했다. 겨우 사흘 좀 쉰다고죽는 것도 아니고.
나는 우물가에 내려왔다. 카라가 우물 옆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카라, 잘 잤어?”
“오빠? 응, 엄청 푹 잤어.”
“그래? 축제 기대한다고 못 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나는 그녀의 옆에서 머리를 감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카라는 계속 머리를 감고 있었다.
‘조금 과한데.’
카라와 세리스는 평소에 잘 씻는 편이다. 내가 상점창에서 산 비누로 씻다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깔끔하기도 하고. 그런데 오늘은 유독 과하게 감고 있다.
‘축제 때문인가?’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 같다.
나는 몸을 씻고 방에서 나왔다. 방어구는 입지 않았다. 축제에 누추한 가죽 방어구를 입고 돌아다니긴 좀 그랬으니까.
1층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세리스와 카라가 내려왔다.
‘어?’
두 사람을 본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차림새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세리스는 남색의 두꺼운 천과 하얀색의 얇은 천으로 이루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수수한 것 같으면서도 화려한 드레스는 안 그래도 매력적인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높여줬다.
카라의 경우는 조금 과감한 옷이었다.어깻죽지를 완전히 드러낸 붉은 색의 드레스였다. 안 그래도 예쁜데다가 건강미 넘치는 몸매를 가진 카라다. 거기에 붉은 드레스가 합쳐지니 평소와는 달리 뇌색적인 분위기를 띄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세리스가 드레스를 샀어..? 카라가 치마를 입는다고..?’
상상도 못했던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아, 축제였지.’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세리스와 카라가 내게 다가왔다. 세리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카라는 얼굴이 붉어진 걸 보니 둘 다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빠.”
“응..?”
“어, 어때?”
카라가 입가를 떨면서 물었다. 옆의 세리스도 슬쩍 고개를 들곤 기대하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자꾸 정지하려는 뇌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야, 여자가 어떠냐고 물을 때는 무조건 칭찬하는 거야. 걔가 그거 하나 차려 입으려고 얼마나 고민을 했겠냐. 뭐? 진짜 궁금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건 자기도 긴가민가하니까 빨리괜찮다고 하란 말이잖아! 아오 답답해!!
가슴을두드리며 답답해하던 가출팸 누나, 그녀의 조언이 떠올랐다. 나는 입을 열었다.
“둘 다 엄청 잘 어울려. 옷도 예쁘긴 한데, 입는 사람이 예뻐서 그런가? 빛이 나네.”
“읏..”
“힉..”
두 사람이 얼굴을 획 돌렸다. 세리스는 귀가 빨개졌고, 카라는 입꼬리가 마구 올라가는 중이다.
나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봤다. 여관 주인아주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주문!
-예이~
‘좋을 때다~.’ 아주머니는 분명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 * *
우리는 아침을 먹지 않고 여관에서 나왔다. 이런 날에는 군것질로 배를 채우는 게 당연하니까.
“우와...”
세리스와 카라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며 감탄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축제는 1년 중 얼마 안 되는 휴일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의상은 독특하거나 화려했다.
“신기한 옷이 많... 힉?!”
사람들을 둘러보던 세리스가 흠칫 굳어버렸다.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러나싶어 돌아봤다.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걸어가고 있었다.
‘무대 의상인가 보네. 근데 저거 속옷은 입은 건가?’
반투명이라서 잘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 있자니 내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보, 보면 안 돼요!”
세리스가 손으로 막은 것이다.
“세리스? 왜 보면 안 돼?”
“야하잖아요!”
세리스가 빼액 소리쳤다. 나는 오랜만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녀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야한 건 왜 보면 안 돼?”
“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자잖아. 그런데 야한 걸 보지 말라는 건 너무하지 않아?”
“어, 그, 그건...”
세리스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답변을 내놓을까? 기대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을 더듬던 그녀가 말했다.
“야하잖아요! 야한 건 안 돼요!”
“...뭐야 그게.”
“아무튼 안 돼요!”
논리 따윈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오빠, 언니 안 따라오고 뭐해? 어? 저 사람 옷이 왜 저...”
“꺄악! 카라 보면 안 돼!!”
“어, 언니?! 잠깐만, 답답해!!”
“조금만 참아! 저 사람 안 보일 때까지... 어? 왜, 왜 안 가시는 거지?”
나는 세리스의 손 틈을 살짝 벌려 앞을 쳐다봤다. 그녀의 말대로 하얀 드레스의 여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웃는 거 같은데.’
‘늑대의 맹약’을 켰다.
-후훗, 재밌는 아이들이네.
-엄마, 저 누나들이랑 형 이상해.
-...저 병신들은 저기서 뭐하는 거야.
하얀 드레스녀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중에는 벨리타도 끼어있었다.
“...세리스, 부끄러운데 그냥 가면 안 될까?”
“안 돼요!”
“언니, 나 목 아파...”
“조금만 참아!”
* * *
결국 세리스는 하얀 드레스녀가 떠난 다음에야 우리를 풀어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기에 급하게 빠져나왔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갈 곳은 어딥니까 카라 씨? 절 버려두고 열심히 알아보셨으니 다 정해놨겠죠?”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라가 불만스런 표정이 되었다.
“‘카라 씨’라니. 평소처럼 불러.”
“너 하는 거 봐서.”
“읏..! 좋아, 오늘 하루 기대해!”
카라가 살짝 삐친 표정으로 앞서나갔다. 나는 픽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카라도 엄청 노력했다고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세리스 씨.”
“...”
세리스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를 무시하고 카라에게 물었다.
“카라 씨,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광장! 거기에서 후작 영애님이 연설을 하신데.”
“영애님이?”
흥미가 동했다. 안 그래도 이세계의 귀족은 어떤 느낌일지 쭉 궁금했었는데, 오늘 보면 되겠네.
카라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광장에 도착했다.
“사람이 뭔...”
광장에는 평소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오늘은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단상 위에는 기사들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고, 앞에선 사람들이 미어터지도록 모여 있었다.
‘무슨 아이돌 콘서트 같네.’
하긴 우리 같은 평민들 입장에서는 이런 일 아니면 귀족을 볼 일이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아이돌 이상이다.
“...”
세리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내가 그녀에게 존댓말을 한 이후부터 쭉 이런다. 왠지 호승심이 생겨서 나도 계속 무시하거나, 존댓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영애님이다!”
어디선가 들려온 한마디. 그 한마디로 인해 웅성거림은 더 강해졌다.
그들은 환호하거나, 저들끼리 떠들거나, ‘영애님!’거리며 울부짖었다.
어찌됐든 시끄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상 위로 올라온 후작 영애를 쳐다봤다.
후작 영애는 짙은 군청색 장발과 푸른 눈을 가진, 어딘가 딱딱한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영애라기 보단 기사 같은 느낌이다.
영애는 그 분위기에 알맞게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아닌, 화려한 장식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보여? 저게 풀 플레이트 아머...”
나는 세리스에게 이야기하다가 멈칫했다.
“...”
세리스가 아직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탓이다. 그녀는 환한 눈으로 단상을 보고 있는 카라와는 달리, 단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듯했다.
“...”
“...”
“...”
“...알았어. 세리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네, 유성 씨.”
세리스가 해맑은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갯짓으로 영애를 가리켰다.
“저 갑옷 보이지?”
“네. 엄청 예쁜 갑옷이네요.”
세리스가 감탄했다.
“언젠가 네게 저걸 입힐 거야.”
“...네?”
세리스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는 다시 정확하게 말했다.
“언젠가 네게 저걸 입힐 거라고.”
풀 플레이트 아머.
온갖 대장기술의 집합체이자, 방어구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시대에 있어서 풀 플레이트 아머를입은 기사는 탱크나 마찬가지였다고.
비록 여기가 중세는 아닐지라도 그 방어력은 무시할 게 못 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할 수도 있고.
마법이라는 게 있는 세상이니까. 본 적은 없지만 그걸로 강화 같은 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세리스...’
상상만 해도 든든하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오우거와 싸울 수도 있지 않을까.
피식 웃고선 세리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영애의 갑옷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세리스?”
“네, 네?”
“아니, 멍하니 있길래.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어, 그게, 네...”
세리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언젠가를 기대해.”
“네...”
“아, 그런데 그 옷 있잖아.”
나는 세리스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축제 때문에 산거지? 비싸지 않았어?”
쭉 궁금했던 걸 물었다. 세리스는 제 옷을 한 번 보더니 대답했다.
“음... 조금 비싸긴 했는데, 저희 이번에돈이 많이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큰 맘 먹고 샀어요.”
그렇게 말하는 세리스의 입꼬리는 어색하게 떨렸다.
“솔직히 말해봐. 아깝지?”
“...네, 조금...”
세리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역시나, 카라에게 등 떠밀려 사긴 했는데 막상 사고 나니 아까운 모양이다.
“뭐, 어때? 다음에도 입으면 되잖아.”
“네?”
“다음 축제에 말이야. 이게 마지막 축제도 아니고, 다음 축제 올 때도 입으면 되지.”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세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네요. 다음에 또...”
그녀가 기쁜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남은 축제를 즐기도록. 이상!
세리스와 떠들다보니 후작 영애의 연설이 끝났다. 영애는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꺄아아악! 영애님 절 가져요!!
-영애님 가지 마세요!!
영애가 떠나자 군중들이 더 시끄러워졌다. 더 견디긴 힘들어서 세리스와 카라와 함께 광장에서 빠져나왔다.
“카라, 다음은 어디야?”
“어? 오빠 이제 ‘씨’ 안 붙이는 거야?”
아, 깜빡했다.
“네, 카라 씨. 다음은 어디인가요?”
“하지 마. 원래대로!”
카라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다음은?”
“다음은 연극을 보러 갈 거야. 이번에 유명한 유랑 극단에서 지크하트의 노래와 관련된 공연을 한데.”
우리는 연극을 보려 향했다.
* * *
-에시카!!
-지크하트!!
두 사람이 비통하게 서로의 이름을 외쳤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에 관중들은 점점 빠져들어 갔다.
그러나 여기 연극에 관심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
‘다음은 서커스를 보고...’
카라였다.
원래라면 누구보다 연극에 집중했을 그녀가 그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불꽃놀이를 볼 때 젤라또 아이스크림...!’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하는 중이다.
지난 일주일간 고생해서 세운 계획을!
계획 점검을 끝낸 카라는 유성을 향해 돌아봤다.
‘할 수 있어!’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