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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화 〉인간사냥꾼(2) (104/249)



〈 104화 〉인간사냥꾼(2)

“정령이요?”

내 겉옷을 벗겨주던 세리스가 의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떠준 물로 세수를 한 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응. 몰디가르 대우림에 정령 하나가 미쳐 날뛰고 있다더라고. 길드에서 받은 의뢰는아니고 패트릭 씨가 지인한테 들은 거라고 하더라.”

“그렇군요. 그런데 정령이 뭐예요?”

“아, 거기서부터야? 정령이 뭐냐면...”

설명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나는 벨리타가 정령이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크게 신경 쓰지않았다. 지구에서 살았던 나는 여러 창작물들을 보며 정령에 대해 추상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상적인 느낌을 말로 설명하려니 조금 골치 아파졌다.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니 세리스가 픽 웃으며 다가왔다.

“설명하기 힘들면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유성 씨가 고른 일이니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나는 고개를끄덕였다.

벨리타가 말하기를 난동을 피우고 있는 건 불의 하급 정령이라고 한다. 때문에 화력이 강하지도 않고, 속성을 아는 이상 대처할 수도 있다고.

“전 그거면 됐어요. 아, 여기 덜 닦였어요.”

“어디? 여기?”

“아니, 여기... 이리줘봐요.”

세리스는 수건을 낚아채가더니 내 얼굴에대고 문질렀다. 마지막 하나 남은 물기마저 꼼꼼하게 닦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리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남자. 잘생겼어요.”

“아이고,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마님.”

세리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돌쇠야. 내가 네 얼굴까지 닦아줘야 되겠느냐?”

“아이고, 죄송합니다요.”

“흠흠,미안하다면 해야 될 게 있을 텐데...”

팔짱을 낀 세리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 힐끗힐끗 쳐다보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아직은 연기가 조금 어색하네. 그리 생각하며 입을 맞췄다. 그녀와 내 혀가 따뜻하게 얽혔다. 키스가 끝나자 세리스는 내 손에 깍지를 끼며 속삭였다.

“유성 씨, 카라 자요...”

얼씨구.

“일부러 재운거야?”

“따뜻한 스프를 배불리 먹이긴 했죠.”

“너무 치사한데.”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이랍니다?”

세리스는 배시시 웃더니 다시 내 입술을 탐해왔다.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건지.

* * *

나와 세리스 자매, 패트릭 파티는 몰디가르 대우림 인근에 도착했다.

몰디가르 대우림은 대우림이라는말에 걸맞게 녹색으로 점칠 되어 있었다. 거기에 푸른 하늘과 더해지자 그것만으로도 보는 맛이 있다.

허나 정작 그 광경을 보는 나와 세리스 자매의 표정은 칙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차로 일주일은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대우림에 오기위해 우리는 마차를 타고 일주일이나 이동해야했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느라 덜컹거리는 마차를 일주일씩이나.

고급마차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엉덩이와 허리에 쏠리는 부담이 컸고, 걸을 때마다 엉덩이뼈가 욱신거렸다.

나는 허리를 두드리며 벨리타를 노려봤다.  시선을 느낀 그녀는 휘파람을 피우며 딴청을 부렸다. 허나 내 시선이 계속 이어지자 부담스러웠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술에 취해서 말하는 걸 깜빡했다니까?”

깜빡할게 따로 있지  하필이면  부분을 잊어버린단 말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니 패트릭이 허허 웃으며 다가왔다.

“너무 그러지 말게. 애초에 정령의 핵을 팔려면 수도에 있는 마탑까지 가야해. 대우림은 수도로 가는 길에 위치해있으니 오히려 시간을 아낀 게 되지 않겠나?”

“그야 그렇습니다만...”

나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미 도착해버린 거 짜증을 내봐야 변하는 건 없다.

좀 더 생산적인  생각해야지.

“정령의 핵은 값이 꽤 나가는 물건입니까?”

“적어도 우리가  고생을할 만큼은 나올 거라네. 정령이 사람 눈에 띄는 경우는 희박하거든. 우린 운이 아주 좋은 경우야.”

대우림을 향해 걸어가며 패트릭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마부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어쩌면 먼저 도착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예? 그럼 정령을 뺏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벨리타가 끼어들었다.

“이주일짜리 휴가가 되는 거지.”

“...뭐?”

“아, 또 인상 쓴다. 나한테 인상 쓰지 마. 이번 일은 패트릭 아저씨가 꾸민 일이니까.”

벨리타가 턱을 까딱이며 패트릭을 가리켰다. 패트릭이 꾸몄다니 뭔 소리일까. 그를 향해 돌아봤더니 패트릭은 곤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허허, 벨리타 녀석도 참... 바로 말할 줄이야. 크흠! 대답해주기 전에 먼저 몇 가지만 물어보지. 자네 일주일에 의뢰를 몇 개 정도 받나?”

“의뢰 말입니까? 평균적으로 4개 정도 받는  같습니다만.”

하루 만에 끝나는 일만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대답에 패트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과해. 자네들은 필요 이상으로일을 많이 한단 말일세.”

“다른모험가들도 이 정도는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과 자네가 받은 의뢰가 같나? 그들은 매일 일하더라도 대부분 약초 채집이나 순찰과 같은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 있는 의뢰가 전부라네. 토벌의뢰를 자네들처럼 받는 친구들은 빚에 쫓기는 친구들 외에는 거의 없어. 그 친구들도 무리하다가 크게 다치곤 하지.”

“그래도 저희는 위험한 일은 배제하고 하는 편입니다만...”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피로는 계속 쌓이지 않겠나? 그러다 실수라도 해서 크게 다치면? 나중에 후회해봤자 늦는다네.”

패트릭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충고에 나는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피로로 인한 실수라...’

지난 반년 간 그런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일을 하고 나면 대부분 다음날은 쉰다. 가끔 연달아서  때도 있는데 그건 매우 드물었고.

세리스와 카라가 의뢰 중에 실수하는 경우는 있긴 했다. 하지만그건 미숙했던 신참이었을 때, 그리고 새로 배운 무공에 덜 익숙해져서 그랬지 피로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얘네 왜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거지?’

생각해보면 세리스와 카라,  다 피곤에 절어있더라도 아침만 되면 기운차게 일어났다. 마치 모든 피로를 떨쳐낸 것처럼.

잠이 많은 카라야 그렇다 쳐도 세리스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헤윽... 헥... 헥... 하아악.... 유성 씨 자지 좋아요... 하악...

...밤마다 나를 잡아먹어서 그렇구나.

내 생기를 빼앗아 가는데 지칠 수가 없겠지.

‘어쩐지 요즘 좀 피곤하다 싶더라니.’

억울한 마음에 세리스와 카라를 향해 돌아봤다.

“와, 언니 저기 좀 봐! 사슴, 사슴이야!”

“정말이네? 기다려봐 카라, 언니가 이걸로... 에잇!”

빡! 끼잉...

“어? 진짜 맞았네? 유성 씨, 제가 사슴을 잡았어요. 오늘 저녁은 사슴 고기 어때요?”

픽 웃음이 나왔다.

나는 패트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 괜찮네요. 이왕 이렇게  거 좀 쉬다가죠.”

그래, 안 그래도 에이미 일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을 텐데 좀 쉬게 두자.

나는 옅게 웃으며 다시 세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등에 사슴을 메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내 머리를 간질이고 떠났다.

* * *

몰디가르 대우림의 중심부, 그곳에는 바깥부분과는 달리 굵고 높은 거목들이 심겨져 있었다. 그 거목의 꼭대기에 한 여성이 앉아있다.

찰랑거리는 연둣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왔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청초해보였으나 흉부와 골반에서 보이는 곡선미는 그녀가 성숙한 여인임을 알려줬다. 거기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예쁘기까지 하니, 인간이었다면 왕의 첩까지 노릴  있을 듯했다.

허나 아쉽게도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윤기나는 녹발을 뚫고나온 뾰족한 귀는 그녀가 엘프임을 시사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돌아온 친구를 느끼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에아, 이번에는 몇 명이야?”

바람의 하급 정령 에아는 그녀의 주위를 윙윙- 시끄럽게 돌아다니며 알아온 것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두 팀이라... 한 쪽은 넷, 다른 쪽은 일곱? 조금 많네.”

-잉잉~!

“안 무서워하니까 걱정 마. 너희가 있는데 내가 무서워할  어디 있어? 그렇지, 웨리아?”

주먹만 한 물방울이 에아와 함께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물의하급 정령인 웨리아였다. 정령들은 그녀의 곁에서  달라붙어 자기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했다.

녹발의 엘프는 만족스럽다는  후후 웃더니 그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잉?!

-위잉!!

화들짝 놀란 정령들은 급하게 힘을 발휘했다.

물의 정령은 채찍처럼 몸을늘려 엘프의 팔을 붙잡았고, 바람의 정령은 힘껏 바람을 불어 그녀의 하강속도를 늦췄다.

덕분에 엘프는 계단에서 뛰어내리듯 폴짝이며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안정적이네?”

-잉잉!!!

-위잉! 위잉!

정령들이 그녀에게 미쳤냐며 화를 표출했다. 바람의 정령은 강한 바람을 내뿜었고, 물의 정령은 유체인 몸이 길어졌다, 짧아졌다하며 들쭉날쭉 변했다.

“알았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이만 가자. 부족민들 기다릴라.”

녹발의 엘프는 정령들을 데리고 숲 안으로 걸어갔다.그러자 거목들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나무들, 그 나무들 위에 지어진 집들이 드러났다. 동시에 집주변에서 평화로이 앉아있는 다른 엘프들도.

이곳은 그녀가 머무는 부족의 보금자리였다.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마을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목적지는 마을 중앙에 있는 심문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한 엘프 남자와 함께 작은 나무집이 보였다.

엘프 남자가 그녀를 보곤 반갑게 인사했다.

“아리엘, 어디 다녀왔어?”

“잠깐 산책. 나간 김에 다른 인간들이 들어온 것도 확인했어.”

엘프 남자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또 왔다고?”

“애초에 그러려고 둔 덫이었잖아.”

아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지.”

“그보다 저번에 잡은 인간들은?”

“안에. 지금 볼트가 심문중이야.”

“아직도? 어젯밤부터 시작하지 않았어?”

“내가 말했잖아. 저놈은 미친놈이라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리엘은 어이없다는 듯 뺨을 긁적이다가 문을 열고 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상쾌한 바깥공기와는 달리 쾌쾌하고 비릿한 공기가 그녀를 반겼다. 창문 하나 없어 어두운 내부는 촛불  개만이 겨우 비추고 있었는데 심문에 효과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끄, 끄아아악!!!  말했다고, 다 말했다고!!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몰라!”

“거, 거짓말 하지 마. 넌, 넌 아직  알고 있어.”

“뭔 개소리야! 모른다니까아아악!!!”

남성의 끔찍한 비명이 아리엘의 귀를 때렸다. 아리엘은 신경도 쓰지 않고 쭈그려 앉은 엘프에게 다가갔다.

“볼트, 아직도 하는 중이야? 안 지쳐?”

“응?아, 아리엘이구나. 히히, 이, 이렇게 재밌는데지, 지칠 리가.”

즐겁다는  웃는 볼트의 얼굴에는 커다란 화상자국 남아있었다. 아리엘은  흉터가 과거 볼트가 노예로서학대당했을 때 생겼던 거라는 걸 알았다.

“뭐 좀 알아낸 건 있고?”

“트, 특별한 건 없어. 이놈들 머, 멍청이들이야. 다 우리가 알 던 거, 것들만 말할 뿐.”

“그래?”

아리엘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볼트가 고문중이 남자를 바라봤다. 달군 칼로 이곳저곳 휘저었는지 몸이 아주 엉망진창이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불쌍하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인간이잖나?

혐오스러운.

“그, 그런데 저번에 다, 다른 부족한테 보냈던 편지는 대답이 와, 왔어?”

“응? 그거 온 지 꽤 됐는데 못 들었어? 거절당했어. 너무 위험하다고 하더라. 저번에 가봤더니 아예 이 숲을 빠져나간 거 있지?”

“거, 겁쟁이들.”

볼트가 혐오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거기엔 아리엘도 동감이었다.

아무리 보복이 두려워도 그렇지 숲을 버리고 도망치다니. 엘프로서의 자부심도 없는 녀석들. 동족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웠다.

아리엘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이미 고문을 당해 피칠갑을 한 남자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아리엘을 보며 중얼거렸다.

“더러운 악마 새끼들.”

아리엘은 무시했다.

“좆같은 귀쟁이 깐프 새끼들. 니들 언젠가 임자 제대로 만날 거다. 편히 죽지도 못하고 평생을 육노예로 살게 되겠지!”

“다, 닥쳐 인간!”

볼트가 달군 칼을 남자의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끄아아악...!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대체 왜 우리에게 이딴 짓을 벌이는 거냐..!”

아리엘은 이번에도 남자의 처절한 목소리를 무시했다.

“볼트, 슬슬 이 인간들도 처리해. 새로운 인간들이 왔어.”

“저, 정말? 좋다, 좋아!”

볼트가 새로운 장난감이 생간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리엘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미친 새끼들..! 또, 또 우리 같은 피해자를 만들 생각이냐?! 그 같잖은 가짜 소문으로!?”

아리엘은 등을 돌렸다. 볼트와 할 이야기가 끝났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귀쟁이 깐프년아! 대체,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씨바아알!!!”

아리엘은 심문실에서 나와 나무에서 내려갔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만족스러웠다.

헌데 문득  남자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좆같은 귀쟁이 깐프 새끼들. 니들 언젠가 임자 제대로 만날 거다. 편히 죽지도 못하고 평생을 육노예로 살게 되겠지!

아리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급하기는...”

인간이라 그런지 말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아리엘은 고개를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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