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연회
* * *
눈을 떴을 때는 모르는 천장이...
‘신전?’
다행히 아는 천장이었다. 예전에 빈민가를 소탕하다가 다구리를 맞고 누웠을 때 봤던 천장이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운 방. 여럿 있는 침대에는 노인이나 다리에 부목을 뗀 사람들이 누워있다.
보아하니 신전의 병실인 듯한데...
‘내가 왜 여기 있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다. 다른 환자들이 깨어나지 않게 조심스레 방에서 나섰다.
월광에 물든 복도는 영롱하면서도 으스스했다.
“아무도 없나?”
꽤 큰 신전인데도 근처에선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못 느끼는 건가? 나는 잠시 동안 ‘늑대의 맹약’을 켜봤다.
하응!
간드러지는 여성의 목소리.
그것은 성적인 것을 할 때 여성이 내는 목소리였다. 누군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못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가려는데 이곳이 신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신성한 신전에서 그런 음탕한 짓을 하다니. 문득 그 정신 나간 커플의 낯짝이 궁금해져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움직였다.
소리를 따라 이동할수록 나는 신전 깊숙한 곳에 가까워졌다.
‘이렇게 안쪽에서 한다고? 무슨 깡이야 대체...’
커플의 대담함에 감탄할 무렵, 나는 신음소리의 진원지에 도착했다.
신전의 중심, 기도실 구석에 박혀있는 고해실.
신음소리는 거기서 흘러나왔다.
흐읏..! 혀, 형제님... 하악...
...아무래도 나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음소리의 주인은 간땡이가 부은 커플이 아니었다. ‘형제님’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로 봐선...
“거기 누구 계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넬라 수녀의 목소리.
나는 황급히 몸을 숙여 기도실 의자 아래에 숨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얼이 타있느라 반응이 조금 늦었다.
“...없으십니까?”
다행히 날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몸을 숙인 채로 발소리의 반대편으로 돌아서 움직였다. 기도실 안은 어둡고, 나는 소음을 내지 않았으니 이대로라면 안 들키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도실 입구와 가까워져 거의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홀리 라이트.”
환한 빛이 피어나더니 기도실 안을 비추었다.
‘젠장, 그림자!’
기도실 안은 빛 하나 없이 어두웠기에 그림자는 생각지 않고 움직였었다. 설마 갑자기 광원을 만들어낼 줄이야.
나는 빠르게 기다란 의자 아래로 몸을 집어넣었다.
봤을까?
아니, 그림자가 나타났던 건 한순간이다. 그 짧은 틈에 발견했을 리가...
“찾았습니다.”
봤구나.
의뭉스러운 마음에 기도실 안을 계속 두리번거렸던 모양이다.
들켰다고 판단되자 내 마음속에서도 갈등이 일었다.
‘자백할까 아니면 도망갈까.’
자백하는 것은 상대가 넬라 수녀이기에 드는 고민이다. 그녀는 항상 서글서글한 미소로 나나 다른 사람들을 대해왔으니까.
지금 나가더라도 분명 조금 곤란하다는 미소로 마주해주겠지.
“당장 나오십시오. 쥐새끼.”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하겠다.
지금 나갔다간 그녀와 생사결을 펼치게 될지도 모른다. 저 서늘한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런 생각밖에 안 든다.
다행히 현재 나와 기도실 입구의 거리는 가깝다. 몇 발자국만 뛰면 되는 거리. 나는 의자에서 튀어나가 그녀가 내 얼굴을 못 보도록 데구르르 굴렀다.
입구에 도달했을 때 튕기듯이 일어나 복도를 달렸다.
“순순히.. 아앗! 거기 서십시오!”
넬라 수녀가 뒤늦게 쫓아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는 마나로 신체를 강화해서 달리고 있었고, 이미 갈림길에서 옆쪽으로 빠진 상태였으니까.
그녀가 달려온들 내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대로 돌아서 나가야겠다.’
처음에 나갔으면 이미 신전에서 빠져나갔을 텐데.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괜히 시간만 날렸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진다. 내가 달려왔던 방향, 그러니까 넬라 수녀 쪽에서 시작된 소리였다.
“비상! 비상! 자매님들 일어나십시오!”
종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지나다녔다. 신전 곳곳에서 수녀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는 커다란 기둥 뒤에 숨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파란 장발의 수녀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물었다. 예전 사교도가 침입한 마을에서 함께 고생했던 수녀중 하나다.
이름은 기억 안 난다.
그 파란 머리 수녀의 귓가에 대고 넬라 수녀가 뭐라 속삭였다. 잠결에 반쯤 닫혀있던 그녀의 눈이 점차 크게 뜨이더니, 종결에는 동그랗게 뜬 채로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두 수녀에게 다른 수녀들이 몰려들었다. 파란 머리 수녀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3 단계...”
“네?”
“경계 수준 3단계입니다. 당장 신전 문 걸어 잠그세요!”
그에 다른 수녀들도 퍼뜩 놀랐다.
“3단계라면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넬라 수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수녀들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문! 문 닫아!”
급박하게 소리치며 흩어졌다.
“신전 입구는 이미 봉쇄되어 있습니다. 창문, 창문을 다 닫으십시오!”
“몇 명은 담벼락에서 대기하십시오! 그곳에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자세히는 못 봤지만 분명 건장한 체격이었습니다! 아마 젊은 남성일 확률이 높습니다.”
“절대 빠져나가게 둬선 안 돼요. 발견하거든 붙잡아서 제게 데려오세요. 제가 직접 기억을 지워버릴 테니까.”
조용했던 신전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수녀들은 제각각 찢어져 복도를 뛰어다녔다.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신전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기도 하다.
수녀가 고해실에서 자위를 하는 신전이라니.
소문이라도 났다간 끝장이다. 적어도 칼리타 내에선 이 신전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처박힐 테지.
‘아무래도 지금 나가는 건 좀 무리겠지?’
수녀들이 광원마법을 쓴 채로 눈을 부릅뜨며 돌아다니고 있다. 잡혔다간 굉장히 귀찮아 지겠지.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수녀들 몰래 병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퀭한 얼굴의 수녀들을 지나쳐 신전 정문을 걸었다.
* * *
“몸은 괜찮은 거 맞죠..?”
“괜찮아.”
“오빠, 뜨거운 거 먹어도 돼? 식혀 먹어야 되는 거 아니야?”
“괜찮다니까.”
나는 손을 휘휘 젓고선 스프를 한 숟갈 먹었다. 따뜻한 충만감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카라가 불안한 눈초리로 다시 물어왔다.
“괜찮다니까.”
대체 몇 번을 묻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걱정이 왜이리 심한지 원... 아침 일찍 여관에 돌아왔을 때도 더 쉬어야 한다느니, 안정을 취해야한다느니 난리였다.
‘그냥 마비독에 취했을 뿐인데 신전에 입원까지 시키고 말이야.’
하여간 유난이 심하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식사나 해. 스프 다 식겠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더니 별 수 없다는 듯이 스프로 시선을 돌린다. 스프를 퍼 먹으면서도 힐끗힐끗 이쪽을 쳐다본다.
그 모습이 답답해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진짜 왜 저러는 거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우물쭈물 거리고만 있으니.
모르겠다. 꼭 하고 싶은 말이면 나중에 알아서 하겠지.
식사를 마친 나는 상태창을 켜 백독불침을 클릭했다.
===============================
<백독불침??不?/>
사용자의 독 저항력을 높여줍니다.
독을 섭취할수록 해당 독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기본 독 저항력 40%
[섭취한 독]
코볼트제 마비독 <20%/>
===============================
어제 먹었던 마비독에 대한 저항력이 올라가 있다.
‘20%라... 그런데 이거 계산법이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내게는 기본 독 저항 40%와 섭취한 독에 대한 추가 저항 20%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가 코볼트제 마비독을 섭취했을 시, 저항력은 어떻게 계산되는 걸까.
40%와 20%를 합쳐서 60%?
먼저 40%를 제하고 그 다음 20%를 제하는 건가?
혹은 20%를 먼저 제하고 40%를 빼는 건가.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실험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나는 상태창을 끄고 단전을 향해 기운을 집중했다. 칙칙한 독기 사이에서 저 혼자 유독 색다른 놈이 있었다. 다른 독기들 보다 작은 기운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어제 먹었던 마비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기운을 펼치면 내 피에 어제의 마비독이 묻어나온다는 거지?’
나는 혈독술을 한 번 펼쳐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아직 이 독에 대해 면역이 생기지도 않았다. 지금 피에 흘려봤자 다시 쓰러지기 밖에 더할까.
나는 고민을 끝마치고 스프나 하나 더 시키기로 했다.
* * *
세리스는 스프를 깨작거렸다. 도저히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동자만 굴리며 유성을 힐끗 쳐다봤다.
아침 일찍 신전으로 향하려고 할 때 그가 온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혹여나 몸이 성치 않은데 고집을 부리고 돌아온 것일까 걱정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걸 보면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
‘그건 다행이지만...’
넬라 수녀는 유성이 먹은 독이 위험한 독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자살용으로 쓸 것이었다면 잘못 고른 것이라고. 애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세리스는 그 사실에 마음속 깊이 감사하면서, 유성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짐작 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삐친 것 때문에 그런가?’
얼굴도 안 보고 말도 안 해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지. 세리스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기쁜 마음과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자살하려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당연하지만 후자가 더 강했다.
그러나 함부로 입을 열어 그를 질책하지는 못했다. 현재 그의 마음은 깨지기 직전의 유리와 같았으니까.
‘아... 그렇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세리스는 깨달았다.
‘내가 삐지기 전에도 마음은 한계였었구나...’
멀쩡해 보이는 겉과는 다르게.
하기사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겪었는데 정상이면 그게 이상하지.
그런 상황에서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인 그녀마저 등을 돌렸으니...
‘읏...’
죄책감이 세리스의 가슴을 따끔하게 찔렀다. 그가 문드러진 내면을 눈치 채지 못하고, 보듬어주기는커녕 비수만 꽂아버리다니.
아내 실격이다.
세리스의 고개가 힘없이 내려갔다. 식탁의 일부를 가리는 커다란 흉부가 눈에 들어왔다.
‘...바깥쪽 가슴만 크면 뭐해? 안쪽 가슴이 작은걸...’
그녀는 외면적인 미(美)에만 신경 쓴 것을 후회하고 또 반성했다.
이제부턴 유성이 힘들어할 때마다 보듬어줄 수 있도록 마음의 크기를 더...
“야! 대체 언제 말해줄 생각이야?”
세리스가 자아성찰을 하고 있을 무렵, 아리엘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다그쳤다.
세리스는 경악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못하고 입만 벙끗거렸다.
‘아, 아, 아, 아리엘..!? 지금 뭐하는 거예요?!’
지금 그를 그렇게 자극해버리면 안 되는데!
세리스는 덜덜 떨리는 눈동자를 돌려 유성을 응시했다. 그런데 유성은 예상외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엉? 뭘 말해?”
“시치미 떼지 말고. 네가 독극물을 먹고 자살하려고 한 거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하마터면 나도 죽을 뻔했잖아! 자살할 거면 나랑 얽힌 계약을 풀고 하란 말이야!”
“뭐? 자살?”
유성은 뭔 개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자살을 왜 해? 밤마다 허벅지 비비며 낑낑 거리더니, 결국 성욕에 돌아버린 거냐?”
유성의 말에 세리스와 카라가 ‘우와...’하는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봤다.
아리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 닥쳐! 말 다른 데로 돌리지 마! 내가 말한 건 어제 네가 쓰러져있던 일을 말하는 거야. 왜 독극물을 먹고 쓰러져있었냐고!”
“아, 그거 말하는 거야? 그건 편지에 써놨... 아, 맞다. 쓰다가 기절했었지.”
유성이 지금 떠올렸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눈 떠보니 신전이더라니. 너희가 오해했더라면 그럴 수도 있지.”
오해?
무슨 오해?
세리스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카라나 아리엘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의문어린 시선을 받으며 유성은 입을 열었다.
“어제 너희들이 없을 때 독과 관련된 무공을 배웠거든. 단전에 독을 담고 필요할 때 피로 흘려내는 무공인데, 사용하려면 먼저 독을 먹을 필요가 있더라고? 그래서 독에 내성을 주는 걸 하나 배우고 독 중에서 가장 약한 걸 먹었지. 위험한 독은 아니었어. 마비독인데 그중에서 가장 싼...”
설명을 이어가던 유성이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는 카라의 얼굴에는 악귀가 깃든 것 같았다.
세리스는 자신은 어떤 표정일까 싶었지만, 카라와 별반 다를 거 없을 것 같았다.
뿌득.
세리스의 손에 쥐어진 스푼이 이등분되었다.
“오, 이런.”
유성은 뛸 준비를 했다.
* * *
마을 광장의 구석.
나는 그곳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추격전을 하게 될 줄이야...’
그나마 신전에서는 나았다. 밤이었고 침대로 몰래 기어들어가 자면 됐으니까. 그러나 방금 세리스와 카라에게 쫓기는 건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눈에서 너 죽고 나죽자는 의지가 느껴졌으니까.
저 화가 풀리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잘못이지.”
정황을 보니 세리스와 카라는 내가 독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오해한 것 같다. 화날 만도 하지.
만약 내가 그녀들 입장이었어도 무척 화가 났을 것이다.
편지를 먼저 써놨어야 했는데...
이제외서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다. 그녀들의 화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아, 여기 계셨군요. 찾고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어깨에 맨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모험가 길드 칼리타 지부의 한유성 맞으시죠? 저번 영지전에 참가하셨던.”
“맞습니다만...”
“여기, 성에서 내려온 겁니다.”
남자가 편지봉투를 건넸다. 가문 문양이 새겨진 붉은 촛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고 안에 있는 편지를 확인했다.
‘연회 초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