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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화 〉 피의 장례식 (220/249)

〈 220화 〉 피의 장례식

* * *

지크프리드의 명령에 따라 식장 밖으로 나온 모험대.

은 등급들이 모여 짧게 의논을 시작했다.

“일단 나는 모험대장님께서 이야기한대로 성으로가 현 사태에 대해 보고하겠네. 그럼 그쪽에서 병사들을 보내주겠지.”

“그럼 코헨 할아범은 그렇게 하고 나는 서쪽 성탑으로 가볼게.”

오르카가 말했고 로렌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럼 우리 파티는 동쪽을 맡도록 하죠. 한유성 씨께서는 북쪽을 맡아주시고 쥬아나는 도시 안을 순찰해주세요.”

“잠깐. 한유성이 북쪽 성탑으로 간다고? 수가 많은 쥬아나 파티가 가는 게 맞지 않아?”

오르카가 로렌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수가 많기에 도시 안을 순찰하는 겁니다. 혹시나 민간에 피해가 있으면 안 되니까요. 또 쥬아나의 활 실력은 민중과 섞인 마족들을 확실히 맞출 수 있어요. 쥬아나가 더 적격일 겁니다.”

“하지만...”

오르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같은 은 등급끼리 뭘 그리 걱정하는 걸까.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전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가도록 하죠.”

“...그래 좋아. 대신 다치지 마. 위험할 것 같으면 곧바로 빠지고.”

오르카가 납득한 후, 우리는 곧바로 헤어졌다.

나와 세리스, 카라는 앞서 상의한 대로 북쪽 성탑을 향해 달려갔다. 남쪽은 내성이 위치한 곳이기에 따로 살필 필요가 없었다.

아침부터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가자 북쪽 성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적의 공격을 알아차리고,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탑은 높고 두꺼웠다.

어떤 위험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이 굳건한 성탑.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입구를 지켜야할 경비병들이 없다.

불안함 예감이 들어 나는 달음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성탑 입구로 들어가 원형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끄아악!

계단을 올라가던 와중 위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오를수록 창칼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고. 성탑의 2층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마족들은 이미 넘어와 있고 경비병들은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성탑 안에서 성벽 위까지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늘어나는 적.

경비병들은 수적 열세에 몰려 점차 밀리는 중이었다.

더 지체할 시간은 없겠다.

“키히힉? 너희는 또 뭐냐!”

날 향해 창날을 세우고 날아오는 임프.

세리스가 끼어들어 임프의 몸을 가로로 갈라버렸다.

“세리스, 카라. 너희 둘은 오른쪽. 난 왼쪽을 맡을게.”

“오빠, 혼자서 괜찮겠어?”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치, 나도 이제 세거든?”

카라는 대검을 든 팔을 휙휙 돌리며 툴툴 거렸다.

“원래 소중한 사람일수록 걱정이 많이 되는 법이야.”

“...뻔뻔하게 잘도 말하네. 언니 얼마 전에 오빠 독차지하려다가 나한테 걸렸던 거 잊었어?”

“어머, 내가 그랬던가?”

“...내가 말을 말지. 가자 언니.”

카라는 바닥에 침을 한 번 찍 뱉고선 오른쪽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세리스는 바로 쫓아가지 않았다. 달려가는 카라를 힐끗 보고선 내게 다가와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조심해요 당신.”

그녀는 미소를 짓고선 뒤돌아 카라가 갔던 길을 따라 달렸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여유가 넘치네.’

코로모어에 다녀온 이후로 눈동자만 붉어졌다하면 저런 식이다. 약간 오만해졌다고 할까? 저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두고 봐야겠지.

나는 왼쪽 성벽을 향해 뛰었다.

성벽 입구를 막고 있는 리자드맨 둘.

단검을 뽑으며 그대로 두 놈의 목을 그었다.

“크헥!”

“카학...!”

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알아서 죽을 테니 굳이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다.

성벽 위의 상황을 살폈다.

입구 바로 앞에는 경비병들과 마족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피의 줄기를 따라 시선을 돌리면 경비병이 한데 모여 마족들과 대치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홉 정도는 될까하는 수.

반면 경비병들과 대치중인 마족들은 스물을 넘었다.

경비병들은 용맹하게 대치중인 것 같지만 떨리는 다리는 숨길 수 없었다. 눈동자에는 명백한 두려움이 담겨있다.

그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인지 마족들은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무기를 휙휙 휘저으며 경비병들에게 겁을 주고 있었다. 경비병들의 몸이 움찔 거릴 때마다 놈들은 크게 비웃었다.

‘저런 상황에서 용케 도망을 안 치네.’

단순한 직업정신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일단 할 일을 해야지.

나는 몸을 낮추고 곧바로 마족들을 향해 달려갔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바닥의 피가 팍팍 튀고 그 소리에 마족들이 뒤를 돌아본다.

은밀하게 가려면 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 녀석들의 수준은 이미 짐작이 가니까.

“크하하! 또 한 놈이 죽으러 오는구나!”

짐승에 가까운 사자 수인이 커다란 전투 도끼를 가로로 휘둘렀다. 나는 살짝 점프해 그것을 피하고 사자 수인의 목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사자 수인의 눈에 당혹감이 담긴다. 잠깐이다. 단검을 살짝 돌리자 이내 탁한 빛을 띠었다.

“켈도스가 당했어?”

“저 놈은 또 뭐야?!”

이놈이 여기선 좀 센 놈이었나?

마족들이 당황하며 우왕좌왕 거렸다. 나는 그 틈을 타 쓰러지는 사자 수인의 어깨를 밟고 위로 뛰었다.

시선을 내리면 마족들과 경비병들이 한 눈에 보인다.

나는 그 상태로 한 바퀴 회전하며 단검들을 흩뿌렸다. 여섯 개의 단검들이 마족들의 머리나 팔, 다리를 꿰뚫었다.

마족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경비병들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경비병들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당신은..?”

“은 등급 모험가 한유성입니다. 곧 있으면 성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할 겁니다.”

“오오...! 드디어..!”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는데 다행이야..!”

경비병들 사이로 희망이 퍼져나갔다.

이건 좋은 현상이다. 저 희망이 높은 사기로 이어질 테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보급형 단검 두 자루를 뽑았다.

“그러니 조금만 버텨봅시다.”

* * *

임프의 뿔을 잡고 정수리에 단검을 꽂는다.

트롤의 눈알을 단검으로 파낸다. 시야를 잃어 방황하는 트롤의 등 뒤로 경비병 셋이 칼을 찔러넣었다.

커다란 돼지 마족은 뱃가죽을 갈라주자 흘러내리는 내장을 주워 담다가 죽었다.

그렇게 성벽 위 마족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갈 때쯤이었다.

콰앙!

성탑 쪽에서 커다란 파괴음이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뭐야?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경비원들의 이목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이끌렸다. 죽어가던 임프가 키히힛 웃었다.

“키히힛! 너희들도 이제 끝이다! 백인대장?人??님께서 오셨다!”

‘백인대장?’

그건 백명의 병사를 이끄는 직위를 말하는 것 아닌가?

지휘관에 가까운 위치니 백인대장이라고 해서 꼭 강할 필요는 없지만...

쾅!

이 심상치 않은 소리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제가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아, 그래! 여긴 이제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

남아있는 마족들도 이젠 얼마 안 됐으므로 경비병들도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장 성탑을 넘어가 반대쪽 성벽으로 향했다.

“...염병. 저건 또 뭐야.”

성벽 위에는 다른 마족들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거인이 있었다. 머리에는 뿔 두 개가 달려있고 하체에 비해 상체가 비대하다.

오른손에는 거대한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녀석은 그걸 경비병들을 향해 내리찍고 있었다.

아까부터 들렸던 심상치 않은 소음은 저것이었던가.

‘저게 말로만 듣던 오우거?’

저딴 걸 알렌은 어떻게 혼자 잡았다는 거야?

구라 아니야?

홀로 중얼거리며 적당한 무기를 찾았다.

내 단검은 저 두꺼운 살집을 뚫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이거 괜찮네.’

경비병이 쓰던 장창을 주워들었다.

이거라면 저 살덩어리를 뚫고 내장에 닿을 수 있겠지.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몸을 맡긴다.

조금씩 흐름에 익숙해져갈 때쯤 천천히 몸을 숙인다.

숨소리를 죽인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모든 기척을 죽여버린다.

그러다보면 느낌이 온다.

나 혼자 다른 세계에 붕 떠있는 느낌이.

‘왔다.’

서서히 눈을 뜨면 그 누구도 날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바로 달리면 안 된다.

기차가 천천히 달아오르듯 나도 점진적으로 속도를 가해야한다.

그래야 위화감이 없으니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점차 걸음 속도가 빨라졌음에도 마족들의 시선에는 내가 담기지 않는다. 당연하다. 놈들은 오우거의 위용을 보며 환호하기 바빴으니까.

나는 조금 더 속도를 가했다.

가벼운 뜀박질.

그리고 오우거와의 거리가 얼마 안 남았을 때 질주해 위로 크게 뛰었다.

“어? 저건?!”

그제야 마족들이 이상함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푸욱.

장창이 오우거의 등의 왼쪽 가슴 부위를 뚫고 들어갔다.

“커헉..! 쿨럭. 쿨럭!”

오우거가 몽둥이질을 멈추고 피 섞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니 혹시 심장이 다른 곳에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반응을 보니 제대로 찌른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놈이 기침을 멈추더니 아까까지 한손으로 휘두르던 몽둥이를 양손으로 붙잡은 것이다.

오우거는 그대로 쇠몽둥이를 휘둘러 경비병 하나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뭐야? 심장이 아니었어?’

아니, 심장이 아니었어도 방금 보인 반응을 보면 급소가 확실할 텐데.

나는 내게 달려드는 마족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오우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새끼 저거, 죽기 전에 발악하는 거다.

아까까지 한 손으로 쓰던 걸 양손으로 쓰는 것도 그렇고, 움직임에 틈도 많다.

“세리스, 카라! 저 오우거를 죽여!”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젠가 죽겠으나 그걸 기다리기엔 피해가 만만치 않다.

내 외침에 세리스와 카라가 오우거를 향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쿨럭... 우어어!!”

오우거가 두 사람을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인지 뭉둥이를 성벽 바닥에 붙이며 긁듯이 휘둘렀다.

드드드득. 돌바닥이 쇠몽둥이에 갈리는 소리.

세리스는 한손으로 카라를 잡아 오우거를 향해 높이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도 높게 점프했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뭉둥이가 지나갔으나, 그녀들은 이미 오우거의 머리 앞에 당도한 이후였다.

매화검법 제 6초식 매화낙락.

세리스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오우거의 머리뼈를 쪼갰다.

거목 가르기 巨??

오우거의 어깨에 안착한 카라는 힘차게 휘둘렀다. 오우거의 거대한 목의 절반이 잘려나갔다.

무너지는 오우거의 신체.

두 사람은 뛰어내려 성벽에 착지했다. 세리스는 계단을 내려오듯 부드럽게. 카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처럼 거칠게.

이윽고 오우거가 쓰러지며 성벽이 크게 흔들렸다.

“배, 백인대장님이 당했다..?!”

마족 잔당들이 쓰러진 오우거를 보고선 조금씩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완전히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놓아줄 생각은 없다.

놈들을 쫓아가려던 그때 성탑으로 넘어가려던 임프의 머리를 창날이 꿰뚫었다.

“뭐야!?”

당황하던 리자드맨의 머리가 잘려 날아간다.

마족들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성탑 안에서는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기사가 검을 들어올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라!”

그것을 신호로 기사들이 마족들에게 달려들었다.

거 참 빨리도 오는구만.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장례식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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