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암흑회
* * *
네 사람의 가늘게 뜬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긍정적인 눈동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부터..?”
왜?
“그걸 말이라고 해 오빠?”
“아니... 너희도 록시한테 설명 들었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사업 때문에...”
“사업 때문에 만들어진 연인은 연인이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너희랑은 차이가...”
“오빠 내가 연극에서 봤는데 말이야. 보통 그런 걸 혼인 동맹이라고 하거든? 근데 혼인 동맹이 제대로 유지되려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더라?”
아이라는 단어에 분위기가 싸늘한 정도를 넘어서 서늘해졌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아, 아이라니... 당장은 그런 걸 만들 생각이 없어. 그렇지 록시?”
“그래. 한창 바쁠 시기인데 임신이라도 하면 일에 지장이 가니까.”
“...그래서 당장은 없다?”
카라가 팔짱을 끼며 말꼬리를 잡았다.
젠장.
계속 이렇게 말꼬리를 잡히다간 끝이 없다. 그녀들의 페이스에 쭉 휘말리다가 침몰하는 결말이 다가올 뿐이다.
‘뭔가 화제를 돌릴 만한 게...’
아. 찾았다.
“그보다 아리엘 너는 뭐야? 넌 왜 화를 내는 건데. 이건 너랑은 관계없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뭐?”
“쓰레기 새끼...”
아리엘은 경멸 어린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
저기요 노예님?
당신 저 혐오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죠?
“...오빠, 아리엘에게 뭔가 했어?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왜 절 더 곤란하게 만드시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더 곤란해지리라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할 때였다.
“잠깐 다들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을까요? 록시 씨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네요.”
세리스가 말했다.
“언니? 록시 씨와 둘이서 대화를 나눈다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진지한 대화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리를 비켜줄래? 언니가 부탁할게.”
세리스의 단호한 어조에 카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잠깐 나갔다가 올게.”
“고마워. 아리엘도 데려가 줄래?”
“응. 대신 진짜 그런 대화는 하면 안 된다? 나 언니 믿고 자리 비켜주는 거야. 배신하면 진짜 다시는 언니 못 믿어.”
“알았다니까.”
“후... 그래. 오빠 나갈 준비해. 밖에서 나랑 진득하게 대화 좀 하자.”
“...응.”
인제 어쩌지.
* * *
유성, 카라, 마리아, 아리엘이 떠난 이후 거실에는 세리스와 록시만이 남아 있었다.
‘뭐야... 다들 나간 지 몇 분이나 지났는데도 왜 말 한마디 안 해? 적어도 앉으라는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록시는 그녀와 세리스 사이를 지배하는 이 무거운 분위기가 불편했다.
그녀가 그런 감정을 느끼든 말든, 세리스는 록시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유성 씨가 말했던 여자...’
그는 말했었다.
자신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떨 것 같냐고. 그리고 그날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은 오늘, 그는 록시를 데려왔다.
세리스는 확신했다.
이년이 그년이다.
사업이고 뭐고 말했지만 그건 그냥 명분일 뿐이겠지.
그녀는 록시를 훑어봤다.
분홍색 장발.
예쁜 얼굴.
고고한 분위기.
나쁘지 않은 몸매.
괜찮은 여자다.
웬만한 남자라면 눈이 돌아갈 정도는 되는 여자.
그러나 세리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 여자보다 못난 게 뭐지?’
록시의 분홍 장발은 머릿결이 좋긴 했지만 비단 같은 세리스의 은발보단 못했다.
얼굴이 예쁘긴 하지만 세리스, 그녀만큼은 아니다. 애초에 세리스는 다른 그 어떤 여자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고고한 분위기가 난다고?
세리스의 고아한 분위기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몸매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외모적인 측면으로는 그 어떤 것도 세리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유성은 그를 사랑한다.
외모를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감정적인 교류가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짜증 나...’
천마신공을 사용하며 높아진 그녀의 자존심은 하루하루 높아져만 갔다. 유성이 세리스보다 못한 록시에게 빠졌다는 것이 그 자존심에 흠집을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흥분하려는 자신의 몸이 짜증 났다.
사랑하는 상대를 자신보다 못난 자에게 빼앗긴다. 빼앗기는 취향을 지닌 그녀에게 있어 이보다 더 흥분되는 상황은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빌어먹을 몸뚱이라니까.’
유성 앞에서 품위 떨어지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욕지거리를 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면을 벗었다.
어차피 유성이 데려온 이상 좋으나 싫으나 마주칠 일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 그녀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될 터이니 지금 보여줘도 상관은 없을 것이었다.
...솔직히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줘서 기선제압을 하려던 생각도 있었고.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의도는 잘 먹혔다.
세리스의 민얼굴을 본 록시는 헛숨을 들이켰다.
‘뭐, 뭐야..?! 저게 사람의 얼굴이라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조차 이따금 깜짝 놀라게 만드는 외모다.
처음 보는 록시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커다란 박탈감이 찾아왔다.
‘...나도 꽤 예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해온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왜 대체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걸까?
또 납득했다.
‘저런 얼굴이라면 가면으로 가리고 다니는 게 당연하지. 의문이 풀렸어.’
또 의아해했다.
‘근데 저런 여자가 왜 한유성 같은 놈이랑..? 뭐지? 협박이라도 당한 건가?’
당연하지만 그 모든 사고 전환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상태에서 진행됐다.
세리스에게는 자신이 가면을 벗었음에도 록시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리스에게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조금의 동요도 없어. 이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 정도의 신뢰를 유성 씨와 쌓았다는 건가?’
대체 어느새?
그에게서 그런 낌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 도둑고양이가.’
세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른 다리를 뒤로 빼며 오른 주먹을 허리춤으로 당겼다. 그대로 왼 손바닥을 록시에게로 향하며 자세를 잡았다.
어쩌면 저 여자는 세리스, 그녀보다 유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지 모른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렇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네토라세에 환장하는 그녀라도 그건 정말 싫었다.
“당신 강한가요?”
그래서 자세를 잡았다.
돈은 평생 유복하게 살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 명성 또한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쌓였다.
그럼에도 유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 강해지고자 했고 그녀들 또한 따라와 주길 바랬다.
그리고 그가 간다면 세리스는 무조건 함께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그의 바로 옆자리에서 동등하게.
그렇기에 세리스는 궁금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어느 정도로 강할까.
그가 가는 길을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지금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리스의 생각을 록시는 알 리가 없다. 그녀는 그저 갑자기 자세를 잡은 세리스를 보며 당황할 뿐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자세를 잡아?’
설마 자기 애인을 건드렸다고 두들겨 패려는 걸까?
어... 그건 안 되는데...?
자신은 싸움을 못 한단 말이다.
거기에 여기엔 저 여자를 말려 줄 유성 또한 없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겠다고 하면 봐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괘씸하다고 더 패면 모를까, 안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뒤가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뿐.
“강하다 라... 다른 사람들을 다 물리고서 그걸 묻는 이유를 모르겠네. 싸움이라도 할 생각이야?”
“질문에 대답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당신은 강한가요?”
“강하다라... 궁금하면 직접 시험해보던가?”
록시는 최대한 노력해서 같잖은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렇게 하면 뒷세계에 있던 놈들은 대부분 긴장하면서 제풀에 떨어져 나갔다.
록시는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록시는 오늘만 볼 사이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가 아닌가?
가벼운 기 싸움 정도로만 끝내는 것이 그녀로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것이 록시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물론 좋지 않은 방향의 착각이다.
그녀를 도둑길드의 수장이라는 자리까지 끌어올려 준 행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군요.”
세리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타닥
발 디디는 소리가 들리자마자였다. 허리를 굽힌 세리스의 신형이 록시의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어..?’
이게 아닌데?
“자, 잠..”
그녀는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퍼억!
곧게 뻗은 세리스의 주먹에 록시의 허리가 굽어졌다. 그 순간 록시는 반쯤 정신을 잃어버렸다.
‘...응? 뭐지?’
왜 이렇게 쉽게 맞아주지?
몸도 왜 이리 말랑해?
세리스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이상함을 깨닫는 것보다, 그녀의 후속타가 이어지는 것이 훨씬 빨랐다.
빠악!
거세게 올려 친 주먹이 록시의 턱에 꽂혔다.
콰직.
주먹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록시의 머리가 천장을 뚫고 들어갔다. 그녀의 몸이 천장에 걸린 채로 대롱대롱 흔들렸다.
“어... 어라...?”
이, 이게 아닌데..?
세리스는 무언가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