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위선자인가?
노예상의 목덜미를 찌르려던 순간 페이드가 내 손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거리지?”
“내가 더러운 사람이든 깨끗한 사람이든 사람 목숨 구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잖아.”
“⋯⋯.”
“물론 당신 말대로 위선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기만족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적어도 내 손 닿는 곳에 있는 사람까지 모르는 척할 정도로 매몰차게 살아갈 생각은 없어.”
“이 남자가 깨어나서 네 목숨을 노리거나 뒤통수를 친다면 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 남자를 죽이지 않았던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지금 구해야 할 사람을 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 말이 선량한 사람을 구할 때 하는 말이었다면 퍽이나 멋졌겠군.”
끈질기기 그지없는 여자라서 짜증 난다. 자기도 나랑 똑같이 때 타고 지저분한 인간인 주제에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울화가 치민다.
아집이다. 이 여자는 그저 떼를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떠한 논리도 없고 규칙도 없다.
“구해야 할 대상을 착각하는 거 아닌가? 이 남자는 사회를 갉아먹는 기생충 같은 작자야. 그렇다면 죽이는 게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네가 침몰하는 배에서 선택한 것처럼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지.”
“똑같은 대답을 계속하게 만드는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는 아무도 몰라.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온 사람이 개과천선하고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잖아.”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그랬듯이 이 남자도 자신이 살아온 방법을 고수할 것이다.
페이드의 손이 닿은 곳이 불쾌하다.
“손 치워.”
“하지만.”
“안 죽일 테니까 손 치우라고.”
페이드와 눈싸움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마지못해 손을 풀어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남자가 살아나고 나서도 죄를 짓는다면 그때부터는 넌 이 남자와 공범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너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되겠군.”
“글쎄, 그건 그날이 돼봐야 아는 거지⋯⋯.”
“그날이 찾아오면 네가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정말 기대가 된다. 나탈리야. 로인. 돌아가자.”
네 고집이 그렇게까지 강하다면 확인시켜주마, 네가 틀렸다는 걸. 한번 더러워진 인간은 그 관성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로인에게 단검을 돌려주고는 페이드의 집을 벗어났다.
토마스가 쭈뼛거리며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게르미의 약혼자인 파라시를 감시하러 갈 예정이니까 이 새끼가 따라오면 곤란하다.
“이제 너한테 볼일 없으니까 꺼져봐라.”
“아, 예⋯.”
내 말에 토마스가 몸을 돌려 근처에서 떠났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옆에 있던 나탈리야와 로인을 바라봤다.
지금만큼은 확실한 내 편인 사람들. 내 여자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네?”
“어떤 거?”
“너희도 페이드의 말대로 손 닿는 곳에 있는 사람은 구해야 한다고,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오던 인간이 개과천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 질문에 두 사람이 잠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탈리야였다.
“으음,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제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는 구해주는 게 괜찮지 않을까요? 아, 그렇지만 페이드씨 같은 경우는 본인이 손해를 봐가면서 도와주고 있으니까 평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나도 동감.”
“그렇다면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건?”
“전 변할 수 있다고 봐요.”
나탈리야가 즉답했다. 그 모습이 의외였기에 그녀를 바라보니 내 팔을 껴안고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한성님이죽으려고 생각했던 저를 바꿔주셨듯이 사랑⋯. 이라던가? 그런 게 있다면 바뀔 수 있다고 봐요.”
“⋯⋯.”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내 입맛에 맞게, 내가 이용하기 편하게 나탈리야의 생각을 바꿨을 뿐이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놓으려 했을 때 나에게 의지하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변화라고 한다면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확실하게도 나에 의해 변했다.
⋯⋯.
하지만 나탈리야가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탈리야같이 착한 사람은 쉽게 변하지만 나 같은 나쁜 인간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결국 나쁜 쪽으로 변해간다.
백지는 오물이 묻기 쉬운 법이니까. 이미 묻은 오물이 번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편한 길을, 달콤함을 한 번 맛본 자는 그것을 멀리할 수 없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로인은?”
“음⋯⋯. 글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쉽게 변하는 사람도 있고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아하하, 너무 어려운 이야기네.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로인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는 그렇다면, 날 때부터 범죄자가 될 사람이 정해져 있고 영웅이 될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일까?
개인의 노력으로는 그 운명에 아무리 저항해도 결국 똑같다는 것일까?
계속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쯧, 저 여자 때문에 괜히 기분만 싱숭생숭하네. 게르미의 약점이나 잡으러 가자.”
“응, 이쪽이야.”
요즘 들어 괜히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된다.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해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속이고,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한다.
오직 나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겠다.
그런 다짐을 하고 있자니 도착한 건지 로인이 골목 한쪽으로 들어가더니 비교적 넓은 길목에 있는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게르미의 집이야.”
“파라시는? 둘이 같이 살아?”
“응. 그런 것 같던데.”
“으음⋯.”
저녁에는 엘리나와 약속이 있으니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다. 해가 질 때까지만 보다가 가면 되겠지.
골목 어귀에 숨어서 게르미의 집을 감시하길 한참, 중학생, 15살 정도 돼 보이는 머리를 빡빡 깎은 애새끼 하나가 게르미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거 뭐야? 아들이야?”
“아니,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애새끼가 게르미의 집에 들어가는 거지?? 동생인가? 아니, 수인이 아니었잖아?”
의문을 품고 있기를 잠시 이내 골목의 저편에서 다른 애새끼가 보였다.
방금 게르미의 집안에 들어갔던 소년과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외모⋯⋯. 고급스러운 옷⋯.
저거 테르미아의 아들이잖아!
“테드라잖아? 저 새끼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아는 애야?”
“그, 아는 사람 아들인데.”
“흐음⋯.”
테드라가 뭘 하는지를 조심스레 관찰했다.
문 앞에 서서 숨을 깊게 내쉰 테드라가 문을 똑똑 두들기기 시작했다.
“파라시, 나 왔어.”
파라시! 지금 파라시를 불렀다!
게르미의 집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타난 것은⋯. 아까 들어갔던 빡빡이 새끼다!
저 애새끼가 게르미의 약혼자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나는 게르미의 약혼자가 당연히 성인 남성일 거라고, 구체적인 이미지로는 마르고 키가 큰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내 예상을 시원하게 깨부수고 머리 빡빡 깎은 성질 더럽게 생긴 애새끼가 기어 나왔다.
저런 고블린 상위종처럼 생긴 애새끼가 게르미를 독차지? 그런 꼴은 못 본다.
게르미는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가 가져갈 거다.
“테드라, 준비는 다 됐어?”
“응. 다 모았어. 가서 확인해 볼래?”
“그래, 가보자.”
둘이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청히 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로인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따라가야 하지 않아?”
“아, 응. 그렇네. 한번 따라가 보자.”
너무 황당해서 사고가 정지해버릴 정도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등장하니 놀랄 수밖에 없다.
뭘 준비해놨다는 걸까?
골목골목에 몸을 숨기며 파라시와 테드라를 뒤따라가니 조금 넓은 길목으로 들어갔다.
“저쪽은 제법 넓은 길목이니까 후드를 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한번 따라가 보자.”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는 길목에 들어섰다.
제법 인파가 북적거려 깜짝 놀랐다.
단순히 사람만 많다면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인파들이 어떤 호객행위를 하는 가였다.
헐벗은 여자들과 그 여자들을 품평하듯 구경하며 길거리를 걷는 남자들, 매캐한 싸구려 향초의 냄새.
“여긴⋯.”
“사창가네요⋯⋯.”
북적이는 인파 사이로 파라시와 테드라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기 있다. 뒤따라가자.”
“네.”
저 새끼들이 여기는 왜 왔을까? 여자를 사 먹으려고?
테드라야 돈이 많은 집의 아들이니 올법하다 쳐도 파라시는 게르미도 있는데 왜 이런 데를 오는 거지?
파라시와 테드라가 왼쪽 골목에 들어가는 걸 보고는 길가에서 그 모습을 관찰했다. 수상해 보이지 않게 호객 중인 창녀가 있는 매음굴 앞에 서서 곁눈질로 바라봤다.
“어머~ 잘생긴 오빠. 싸게 해드릴 게~ 놀다가~”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감추려고 화장을 떡칠한 창녀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 씨발 좆같은 할망구년이!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어머? 별꼴이야! 자기가 내 가게 앞에 서 있는 거면서!”
귀찮게 구는 창녀를 무시하고는 골목에 들어선 테드라와 파라시가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
“여기 부탁했던 5골드. 이거면 살 수 있는거지?”
“크크, 당연히 차고 넘치지. 아버님이 힘 좀 쓰셨나 봐?”
“응. 가게에 있던 돈 엄마 몰래 털었다던데.”
“투자하는 감이 있으시네. 이 돈으로 노예상한테서 여자 좀 사서 창관 하나 굴리면 떼돈 벌 수 있을 거야.”
“휴, 다행이네. 아, 혹시 여자 사면 창관에 굴리기 전에 한번 해봐도 되냐?”
“당연하지, 친구 좋은 게 뭐냐? 애당초 너희 집 돈 덕에 살 수 있는 건데. 나도 한번 해볼 생각이었거든.”
“너 좋다고 달라붙는 여자 있다며?”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고 안 시켜주잖아. 하여간 나한테 맡겨만 두라고.”
“돈이 있어도 방법을 모르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방법은 꿈도 못 꿨을 거야. 돈 벌기가 이렇게 쉽다니.”
5골드, 한화로 치면 대략 5천만원. 테르미아의 돈, 즉. 내돈이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피 같은 돈 5골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