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그녀는 일류 마피아보스예요.
“그러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일단은 널 지지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내겠군?”
“응. 그리고 헤렌달이 보스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녀석들이 뒤에서 수작을 부리겠지. 나를 죽이려 들 거야.”
헤렌달은 수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게르미에 비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조직의 피를 빨아먹고 싶은 기생충들로서는 멍청한 헤렌달이 보스가 되는 것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헤렌달이 걸레짝이 돼서 돌아왔으니 게르미가 보스의 자리를 이어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녀석들에게는 악재다. 게르미가 보스가 되는 것을 막고 싶겠지만 그렇다고 외팔이 병신이 된 헤렌달을 치료하는 건 이 세계의 의료기술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게르미를 제거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배신자를 색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군. 아까말했던 것처럼 의심 간다고 아무나 죽일 수는 없으니까 널 죽이려고 들 때를 노린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잡아야 한다는 거지?”
이왕이면 안전하게 녀석들이 이빨을 보이기 전에 물어 죽이면 좋겠지만 문제는 누가 배신할지 정확히 모르는 데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죽였다간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던 다른 간부들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적어도 누가 배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 정도는 있어야 증거를 잡기가 수월해진다.
“하지만 난 아버지 밑에서 독립한 지 꽤 됐으니까 간부가 몇 명인지 정확히 몰라. 그러니 내부 정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검은 달의 내부사정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야?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무턱대고 웨스트웨이로 온 거야?”
“웨스트웨이에 들어오면 검은 달의 끄나풀들이 접촉해 올 테니까 녀석들을 붙잡아서 간부, 정확히는 요하네스 삼촌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거기까지 말한게르미가 테이크를 바라봤다. 요하네스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은 테이크가 알고 있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내 예상을 확인시켜주듯 게르미가 입을 열었다.
“테이크가 있으니 그 부분은 해결됐어. 테이크는 암살팀의 일원이라 간부들의 위치를 다 알고 있을 테니 요하네스 삼촌을 찾으면 돼. 어릴 때부터날 많이 예뻐해 줬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줄 거야.”
“널 지지해줄 거라는 이야기?”
“지지해주는 것도 있고. 조직에서 가장 오래 일한 간부니까. 내부 상황도 잘 알고 있을 거야. 평소 헤렌달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대던 녀석들이 누군지 정도는 알겠지.”
“그 녀석들이 헤렌달을 지지하는 녀석들이겠군.”
웨스트웨이에 들어가기 위해 마차가 멈춰 서며 흔들렸다.
마차 바깥에서 병사들과 테이크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잠잠해지고마차가 흔들리며 웨스트웨이 내부로 진입했다.
마차의 흔들림에 내 무릎을 베고 곤히 자던 테르미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테르미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게르미와 나눈 대화를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보스의 자리를 이을 정통성은 있지만, 내부사정을 잘 모르고 지지 기반도 없는게르미에게는 정보통과 지지 기반이 필요하다.
지지 기반을 얻으려면 라이벌 관계에 있는 헤렌달을 몰락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달성됐다.
남은 것은 헤렌달의 지지 기반을 박살 내고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뿐이다.
헤렌달의 몰락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조직 내부에 있던 헤렌달과달리 게르미는 실적이 전혀 없다. 빠르게 실적을 올릴 좋은 방법은 배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
배신자들의 피와 살로 발판을 쌓아 올려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내부사정에 능통한 요하네스라는 남자가 필요하다. 테이크도 어느 정도 내부 상황을 알기는 할 테지만 간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
테이크를 길잡이 삼아 요하네스를 만난 뒤 배신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녀석들의 뒤를 캐 증거를 확보하고 죽인다.
외팔이 병신이 돼 무능해져 버린 헤렌달과는 대비되게 조직의 배신자들을 숙청했다는 성과를 보여준다면 후계자의 위치는 떼놓은 당상이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춰 섰다.
“테르미아씨. 잠깐 일어나봐요.”
“으음⋯. 음⋯.”
테르미아의 어깨를 살살 흔드니 테르미아가 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고개를 비비며 어리광부리기 시작했다.
씹, 존나 귀엽네.
테르미아의 귓불을 살살 만지며 뒷덜미를 쓰다듬으니 테르미아가 슬며시 눈을 떴다.
“음,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피곤해서⋯⋯.”
“괜찮아요. 좀 잤어요?”
“네⋯. 한성씨 품이 포근해서 잘 잤네요.”
마차에서 내리자 바로 정면의 정원 건너에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회색빛의 석재를 깎아 만든 듯한 차갑고 무성의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우리 조카!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구나!”
건물쪽 정원을 가로지르며 일련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덩치 큰 어깨 형님들이었는데 그 사내들 사이에 검은 피부의 사내가 보였다. 검은색의 곱슬머리는 그가 먹은 나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흰색의 빛이 언뜻언뜻 보였다.
“삼촌이라더니 수인이 아니네⋯?”
“아, 헤르겔과는 의형제거든.”
“아하⋯⋯.”
한낱 한 시에 같이 죽기로 도원결의한 유비 관우 장비도 결국 서로 다른 장소에서 죽었는데 깡패 새끼들 주제에 의형제는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지.
“웨스트웨이에는 무슨 일로 왔니? 위험할 텐데.”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으려고요.”
“형님은 헤렌달을 밀어주고 계시는데⋯. 아직도 포기 못 했니?”
요하네스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 모습에 게르미가 손가락으로 마차 내부를 가리켰다.
그 손짓에 테이크가 걸레짝이 된 헤렌달을 끌고 나와 마차 밑으로 짐짝 떨어뜨리듯 굴렸다.
“커흑⋯!”
“헤렌달!”
요하네스가 토끼 눈이 돼서 바닥에 떨어져 기침하는 헤렌달에게 달려갔다.
“게르미! 아무리 그래도 네 오빠다! 어떻게 이런⋯!”
“그 자식이 날 죽이려 했어요. 난 내 몸을 지키려 했을 뿐이고요. 그 꼴로 아버지의 뒤를 잇기는 힘들거 아니에요. 그러니 제가 이어받겠다는 거예요.”
“맙소사⋯. 이봐! 헤렌달을 침대로 옮겨!”
요하네스의 지시에 같이 나왔던 어깨 형님들이 걸레짝이 된 헤렌달을 저택으로 옮겼다.
“게르미. 이야기 좀 해야겠구나⋯.”
뒤따라오라는 듯이 저택으로 향하는 요하네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기서 요하네스와 협상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은 게르미의 역할이다. 검은 달의 내부사정을 모르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게르미에게 힘을 빌려주고 과시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 힘도 내 힘이 아니라 나탈리야와 로인의 힘이지만.
아니지. 내 여자의 것은 내 것. 고로 나탈리야와 로인의 힘도 내 힘이다.
아무튼 개 박살이 난 헤렌달의 모습과 내 힘을 보여주면 요하네스는 게르미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차기 보스를 도와주면 자신에게도 이득이 될 테니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요하네스가 널 지지하면 녀석들이 널 죽이려 들까?”
“응?”
“헤렌달을 제압했으니 네가 가진 힘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요하네스라는 든든한 지지대가 있는 널 죽이려는 위험을 무릅쓰려는 녀석이 있을까?”
“아⋯.”
내 질문에 게르미는 눈가를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냥 수그릴 가능성도 있어. 뭐, 그렇게 되면 귀찮게 피를 볼 필요는 없으니 문제 될 것은 없겠다만.”
“으음⋯. 언제 내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녀석들을 밑에 두고 부리는 건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닌데.”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싹은 미리 치고 싶다는 거지?”
“그렇지. 헤렌달을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아니, 아직은 못 죽인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헤렌달을 지지하던 녀석들은 내게 틈이 생기면 날 죽이고헤렌달을 보스로 추대할 가능성이 있어.”
“흠⋯.”
게르미의 말마따나 헤렌달을 섣불리 죽일 수는 없다. 아무리 돈으로 움직이는 깡패 새끼들이라 해도 자기 가족도 죽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보스를 누가 믿고 따르겠나.
“근데 왜 그렇게 보스가 되고 싶어 하는 거야? 지난번에는 결혼하고 싶어서라고 했는데 파라시라는 꼬맹이를 딱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결혼하려 하는 거야?”
“⋯⋯. 결혼은⋯. 내가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
“확인?”
“그런 거 있어. 도착한 모양이다.”
게르미가 내 질문에 급하게 말을 돌리며 걸음을 서둘러 내 옆에서 떨어졌다.
“뭔지 모르겠네.”
“뭐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로인이 내 손을 잡았다.
“놓치고 있는 게 있어⋯.”
“놓치고 있는 거? 뭔데?”
“게르미의 동기를 정확히 모르겠어.”
“동기?”
“응. 게르미가 보스가 되려는 동기. 결혼하고 싶어서라는데 그렇다고 파라시를 딱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결혼하려는 거지?”
내 머릿속에 무언가 큰 공백이 있다. 그 공백을 채우지 못하면게르미를 공략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공백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요즘 들어 점점 내 생각에 확신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