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5화 〉 어느 문지기의 새로운 하루. (185/314)

〈 185화 〉 어느 문지기의 새로운 하루.

* * *

요하네스는 영 찜찜하다는 태도를 숨기지 못한 채로 못마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투자권 계약은 요컨대 한정판매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간부 중 오직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투자권이다.

미래가 유망한 사업의 초기 투자자가 된다는 건 큰 이득이 따라오는 것이다.

포기하기 힘들겠지.

찜찜해 하는 기분은 말 몇 마디로 풀어주면 된다.

“다른 간부들에게도 공평성을 위해 사업에 대한 투자 제안을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제안을 요하네스님께 가장 먼저 했다는 걸 알아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신경을 많이 써드리고 있는 거예요.”

“이해했네. 한데, 자본 투자를 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거 아닌가?”

“그 질문은?”

“나한테만 제안하는 게 아닌 다른 간부들도 껴서 처음부터 규모를 크게 하면 좋지 않냐는 거네.”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방직공장을 늘리면서 투자를 더 받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시작 단계니까 곧장 크게 할 수 없습니다. 만든다고 해도 판매처라던가 그런 게 결정되지 않으면 악성 재고가 될 뿐이니까요. 일단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 초기 투자자가 필요한 거고요.”

“그렇군….”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길게 할 필요 없다. 이미 내가 원하던 약속을 받아냈으니까. 사업에 관한 걸 떠올리지 못하게 화제를 바꿔야 한다. 이제 할 일은 간부들 사이에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과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만, 음, 말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건 보스와 친분이 두터운 요하네스 님이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무슨?”

‘다른 사람이 아닌 보스와 친분이 두터운 당신이니까 특별히 물어본다.’ 이 말은 일종의 주문이다. 요하네스와 우리의 친밀도를 올리고 특별한 관계인 것처럼 포장해서, 다른 간부들과 당신은 다르다는 착각을 심어주게 만든다.

그로 인해 요하네스는 좀 더 우리에게 충직하게 행동할 것이다.

“간부들 중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물론 간부들의 동향을 살핀 적 따위는 없으니까 배신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이건 그냥 블러프다.

진짜로 찾아내면 좋은 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간부들 간의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들어 고립시킬 수 있다. 고립시키고 나면, 그들은 보스인 게르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다.

자기 윗사람이 자기를 배신할 것이란 생각보다는 경쟁자가 배신할 것이란 생각을 더 깊게 할 테니까.

“도대체 어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배은망덕한 녀석이 배신을?”

“아직 확실한 물증을 잡아내지 못해서 누구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조만간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에 나설 겁니다.”

작업이라는 말에 요하네스가 귀를 쫑긋거렸다.

“작업? 어떤?”

“간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할 겁니다. 회의라기보다는 통보가 되겠죠. 간부들에게 상납금을 받겠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상납금이라니, 우리한테?”

상납금이라는 단어에 요하네스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갑자기 돈을 내라 그러면 기분이 나쁘겠지. 하지만 나는 그 불만을 잠재울 방법을 알고 있다.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한 겁니다. 상납금을 내라고 하면 다른 간부들도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내면서 불만이 쌓일 겁니다. 지금 요하네스님도 상납금을 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그, 그렇긴 하지….”

“간부들의 불만이 적절하게 쌓였을 때, 가장 먼저 간부들끼리 동맹을 맺자는 권유를 은밀하게 해오는 녀석이 있을 겁니다. 그놈이 배신자입니다.”

“……그래, 배신자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기 좋게 빌미를 만들어주겠다는 건가?”

“예, 역시 보스의 의형제답습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시는군요.”

“허허허, 별거 아니지.”

요하네스는 내 칭찬에 기분이 좋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조만간 간부들을 소집해서 상납금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신자를 찾기 위한 거니까. 나중에 색출이 끝나면 상납금은 전부 돌려드릴 겁니다.”

물론 돌려줄 생각은 없다. 배신자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까 서로 의심하고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며 매달 상납금을 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벌어지는 자본금의 차이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된다. 돈으로 사병을 구하고 놈들의 측근을 매수한다.

간부들의 행동거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감시하는 거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요하네스 님이니까 이 정보를 사전에 알려드린 겁니다. 저희가 믿을 사람이 요하네스 님 말고는 마땅히 없어요. 다른 간부들은 전부 의심스럽습니다. 배신자를 색출하는 걸 도와주십시오.”

“아! 물론이지! 걱정하지 말게!”

이걸로 요하네스는 매달 상납금을 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좀 더 친근감을 느끼고 다른 간부들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쌓이는 의심은 불신이 되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자신을 고립시킨다.

다른 간부들에게도 이 작업을 반복하면 된다.

*****

“흐아아암….”

요하네스의 호위로 오랜 기간 일해온 필립스는 보스와 대화 중인 요하네스를 방 밖에서 기다리며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을 하며 몸 안에 가득 차오르는 무료함을 달랬다.

남자로 태어나 한 번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조직에 들어왔다. 악착같이 일하며 조직의 고위 간부인 요하네스의 호위가 됐을 때는 자신도 드디어 높은 자리로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자신을 측근으로 두는 요하네스도 자신의 존재를 그냥 따라다니는 떨거지쯤으로 보는 건지 필립스라고 이름을 분명히 말했을 터인데도 요하네스는 자신을 ‘야, 거기, 너.’쯤으로 외우고 있었다.

헤렌달과 자신이나 나이는 비슷할 터인데, 그저 보스의 자식이냐, 평범한 빵집 아들이냐의 차이로 인생의 주연과 조연이 결정되어버렸다.

남은 평생 다른 이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병풍 역할이나 하며 살아갈 인생이 돼버린 걸까. 자신은 왜 주인공이 아닐까.

매일같이 생각해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버릇돼버린 자기 비하를 반복하며 한숨을 내쉬다 복도 멀리서 다가오는 푸른 머리의 미녀를 바라봤다.

‘존나게 예쁘네….’

분명히 새로운 후계자가 된 게르미의 측근으로 있던 여자였을 것이다.

저 여자도 주연이다. 자신 같은 하류 인생과는 엮일 일 없는 상류층의 인간이다. 그러니 눈에 담아두기라도 하자.

필립스는 검은 로브 위로로 알 수 있는 푸른 머리 미녀의 잘록한 몸매를 바라봤다.

‘몸매 좆된다. 내 여자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푸른 머리의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건 아니겠지. 자신 같은 인간과는 접점이 없는 존재다. 아마 지키고 있는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겠지. 문을 지키고 있으니까 다가오는 걸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며 필립스는 말이라도 섞어볼 수 있을까 싶어 푸른 머리의 미녀를 바라봤다.

보통이라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던가 용무를 말하며 지나쳐 들어갈 터인데, 그녀는 필립스의 앞에 똑바로 섰다.

필립스는 당혹스러웠다.

문을 열어주길 원하는 게 아닌가?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너무 빤히 바라봤나?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쯤 푸른 머리의 미녀가 품에서 쪽지를 건네줬다.

“이건?”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읽어봐요. 필립스씨.”

“…….”

푸른 머리의 미녀가 살갑게 윙크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떠나갔다. 오롯이, 자신에게 이 쪽지를 건네주기 위해 저 긴 복도를 지나쳐 온 것이다.

저런 미녀가, 그것도 차기 보스의 최측근인 여자가 자기에게 따로 쪽지를 주다니,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내 이름까지 알고 있잖아. 나한테 반했나? 하, 드디어 내 인생에도 꽃이 피는구나.’

쪽지의 내용은 아직 확인도 해보지 않았지만, 필립스는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뭐로 할지, 몇 명이나 나을지를 상상했다.

‘저런 얼굴에 몸매면 11명도 가능하다. 씨발.’

쪽지가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저 여자의 체온이구나 생각하니 그녀의 몸이 얼마나 포근하고 따듯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끼익.

“이봐, 그만 가지.”

쪽지를 만지작거리던 필립스는 문을 열고 나온 요하네스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쪽지를 품 안에 넣어버렸다.

“예.”

그 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정확히 불러줬는데, 이 영감은 몇 년째 같이 일하는데도 자신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일이 없다.

망할 늙은이.

쪽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있을까.

필립스는 이 지루한 나날이 드디어 끝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

늦은 저녁, 하루 내내 요하네스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퇴근한 필립스는 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소중한 편지를 꺼냈다.

“무슨 내용이 쓰여있을까?! 결혼하자는 거면 어떻게 하지?!”

이런 설렘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아직 철부지였던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애와 함께 놀 때와 같은 설렘에 필립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편지를 조심스레 열어봤다.

­언제나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그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점차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 월동준비는 잘 돼 가고 있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의 바게트 빵이 참으로 맛있더군.

……중략.

앞으로 조직을 이끌어 나갈 자네 같은 젊은 인재가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지. 조직을 이끌어 나갈 중요한 일원인 자네에게 아주! 중요한 부탁이 있네.

최근 요하네스의 거동이 수상쩍다.

필립스 자네는 요하네스의 호위로 오랜 기간 일해왔지. 요하네스의 곁에 가장 오랜 시간 있는 자네라면 나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길 바라네. 지금까지와 같은 호위를 하는 것이지만 자네가 그를 감시하고, 그가 수상하고 불온한 언동을 하면 곧바로 나에게 알려주기를 바라네.

이건 자네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라네.

자네를 믿고 있다네. 앞으로 나와 함께할 조직의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네.

친애하는 필립스에게. 게르미가.

“보스가 직접 적은 편지…!”

필립스는 편지를 읽어보며 무언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빵집을 하는 것도 알 정도로 차기 보스가 자신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간부인 요하네스의 감시를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에 필립스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쾌감을 느꼈다.

평범했던 일상이 바뀌는 것이다. 자신도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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