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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화 〉 검은 달 (200/314)

〈 200화 〉 검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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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으스러진 헤르겔의 옆에는 물어뜯기거나 몸이 절단당한 채 굴러다니는 시체들이 보였다. 몇몇 얼굴은 눈에 익다. 일전에 뒷골목에서 봤던 노숙자들이 틀림없었다.

“이런 씨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습격한다면 무조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도시 바깥의 숲속일 것이라고, 실력 좋은 암살자를 고용해서 조용히 처리하리라 생각했다.

자리를 게르미에게 물려주고 조직에서 손을 뗀 헤르겔을 이런 식으로 요란하게 건드리는 건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행동이니까.

그러니까 요하네스에게 있어서 헤르겔을 죽이기에 가장 최적의 상황은 그가 손쓸 수 없게 멀어지기 전,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미묘한 경계, 즉 도시에서 빠져나간 후가 가장 최적의 타이밍이었을 터이다.

대낮에 이렇게 대놓고 습격해서 죽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생각지 못한 게 아니야…. 안일했어.”

최근 들어 하는 일마다 잘 풀렸으니까. 고작 해봐야 멍청한 깡패 새끼들이니까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방심한 게 문제였다.

요하네스가 들어갔다던 할렘가에는 비루한 노숙자들밖에 없었으니까 무조건 내 예상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만만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흘린 게 잘못이었다. 녀석의 계획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혼자 어림짐작으로 예측하고 오만에 빠져 일 처리를 대충대충 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조금 더 꼼꼼히 살펴야 했다.

깊은 후회와 분노에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도심 속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일을 저지른 것이지?

무슨 생각으로…?

“하, 한성님! 한성님! 아직 죽지 않았어요!!!”

“무, 뭐?”

“죽음의 기운이 아직 느껴지지 않아요! 포션을 쓰면……!”

옆에 있던 나탈리야가 허리춤의 가방에서 붉은 액체가 든 포션을 허겁지겁 꺼내 드는 모습을 보고는 헤르겔의 사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호랑이처럼 주둥이가 길쭉하게 나온 짐승의 얼굴은 한쪽이 함몰됐고, 배 속의 내장은 한가득 쏟아졌으며 하반신은 뼈가 보일 정도로 난도질을 당한 상태다.

처참하게 뭉개진 모습인데, 살아 있다고…?

“뭘 멍하니 있어! 한성아!”

옆에 있던 로인이 다급하게 길을 막던 시티가드를 밀어냈다.

“뭐, 뭐야 너희는!”

“아는 사람이라서요! 잠깐 지나갈게요!”

엉겁결에 나탈리야와 함께 반인 반수 상태인 헤르겔의 옆에 다가섰다. 열어 젖혀진 복부에서는 피가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숨소리에 애간장이 탔다.

다급한 마음은 나탈리야도 마찬가지였는지 포션의 뚜껑을 여는 손이 달달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 이익….”

“가방 안에 한 병 더 있지?”

“네!”

나탈리야의 허리춤에 있던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들고는 코르크 마개의 병뚜껑을 뽑아내 헤르겔의 복부와 하반신에 쏟아부었다.

예전에, 트롤의 주먹에 얻어맞아 팔이 부러졌을 때 한 모금 마시는 것 만으로도 순식간에 뼈가 아물었던 물건이다. 괴물 같은 회복력은 내 몸으로 겪었으니 의심하지는 않지만, 이 꼬락서니가 된 헤르겔을 살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바닥에 쏟아진 내장을 잡아서 배 속에 쑤셔 넣으며 상처를 꽈악 눌러 지혈했다.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상처의 사이로 피가 흘러넘칠 때마다 숨이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장이 졸여졌다. 흘러넘친 피가 로브를 흠뻑 적셨다.

“나오지 마, 들어가…! 들어가!”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치는 피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쏟아진 피를 다시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피가 흐르도록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고는 복부를 지혈하며 포션을 뿌렸던 허벅지를 바라봤다. 천천히, 살이 자라나고 있다. 복부도, 조금씩 아물고 있다.

고개를 돌려 헤르겔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탈리야가 포션을 뿌려준 덕에 함몰됐던 얼굴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지만, 핼쑥한 안색이 마치 시체 같았다.

피를 집어넣을 수 있다면, 피를 집어넣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아, 하아…!”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내장의 물컹거림과 뜨거움이 기분 나빴다. 붉은 내장, 내장, 내장…. 전깃줄에 걸린, 벽에 질척하게 달라붙은….

“정신 차려…!”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때와는 관계없다. 그건 과거의 일이다. 눈앞에 집중해. 집중해! 살려야 한다. 죽으면 안 돼, 살려야 해, 살려야 해…!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드는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눌러 가라앉혔다. 깨끗한 물도 물장구를 치면 바닥에 고여있던 흙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마치 그런 느낌으로 과거의 기억을 쑤셔 박은 가슴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몸 안의 마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명치 부근에서, 술렁이며 일어난 마나의 실이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두근거리며 힘차게 맥동하는 심장으로 흘러 들어간 마나는 빠르게 흐르는 피와 함께 대동맥을 타고 재빠르게 손끝까지 흩어졌다.

마력이, 사신의 로브를 타고 흘러나왔다.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넘어서 헤르겔의 몸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 로브나 낫은 피를 흡수해 마나로 변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마나를 피로, 아니…. 피가 아니다. 생명력? 아무튼 그 비슷한 걸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마력을 헤르겔의 몸에 흘려 넣으면서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헤르겔의 몸에 귀하디귀한 트롤의 피로 만든 포션을 뿌려가며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자니 시티가드들이 다가왔다.

“너희들 뭐냐고?!”

“아는 사람이라서 그래요! 응급처치만 하고요!”

헤르겔의 상처를 보고 있는 나와 나탈리야를 대신해 뒤에 있던 로인이 시티가드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막아섰다.

1L 정도가 들어있던 포션을 전부 쏟아부었다. 나탈리야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하면 2L 정도는 될 것이다.

한모금으로도 부러진 뼈를 바로 붙이는 효과를 가진 물건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쏟아부었지만, 복부와 허벅지의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거기다가 헤르겔의 몸속에 마나까지 흘려 넣었으니 위험한 구간은 지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다소 마음의 여유를 찾고는 몸을 일으켜 시티가드들을 바라봤다.

“나탈리야, 헤르겔 좀 봐줘. 시티가드랑 대화 좀 할게.”

“네.”

“제 장인어른이라서 살리는 게 조금 급했습니다. 위급한 상황은 지났으니까 물어보시는 말에 성실히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노숙자들관 관련이 없는 건가?”

“…….”

질문하는 시티가드를 바라봤다.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전부 알고 있지만 그걸 시티가드들에게 말해줘야 할 이유도 없고 입증하는 것도 귀찮다. 요하네스를 직접 처리하려면 시티가드가 끼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겠지.

“노숙자요? 노숙자들이 제 장인어른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그래, 뒷골목에서 기어 나온 거지새끼들이 이 수인…. 자네의 장인어른을 집단 폭행 중이더군. 우리가 뛰어오니 공격을 멈추고 뒷골목으로 도망쳐 버렸다만…. 돈을 노린 노상강도인 것 같은데, 자네 장인어른이 무슨 일을 하길래 마차에 돈을 저렇게 잔뜩 가지고 다니는 거지?”

“노예상이십니다.”

내 대답에 시티가드가 바닥에 쓰러진 헤르겔의 모습을 바라봤다.

“노예상…. 수인…. 혹시…?”

녀석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날 바라봤다. 길게 상대해 줄 생각은 없다.

“죄송한데, 제 장인어른을 좀 모시고 가도 괜찮을까요? 제대로 된 치료 시설로 모셔가야 할 것 같아서요.”

“……알겠다. 그전에 신분증을 좀 보여주겠나?”

존나 귀찮게 하네.

품에서 4급 용병 패를 꺼내 건네주자 시티가드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봤다.

“4급 용병…. 한성…. 알겠다. 나중에 이 사건에 관련해서 조사를 좀 해야 하는데, 어디서 살고 있지?”

“저는 날개 쉼터라는 여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날개 쉼터…. 알겠다. 이삼일 내로 조사관이 찾아갈 거다. 그 전에 경비대 쪽으로 와도 좋고, 만약 도망가면 현상수배가 걸릴 예정이니까 꼭 조사에 응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좀 모시고 가봐도 될까요?”

“……그래.”

시티가드가 다소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탈리야. 옮길 수 있겠어?”

“머드 골렘이면 충분할 거예요.”

나탈리야가 소환한 머드 골렘이 거대한 덩치의 헤르겔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머드 골렘에 안겨 있는 헤르겔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런 꼴이 됐는데도 죽지 않고 버텼다니, 기적인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죽었겠지만, 혼혈이기는 해도 수인이라서 그럴 거야. 수인의 생명력은 강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니까.”

강인해도 정도가 있지, 난 영락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얼굴은 반쪽이 함몰됐지, 배는 갈라져서 내장을 질질 흘리고 있지, 하반신은 난도질을 당해서 뼈가 보이는 처참한 광경이었는데. 그게 살아있었다니.

“시티가드분들 덕도 컸던 것 같네요.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헤르겔씨가 수인이라 해도 진작 죽었을 거예요.”

나탈리야의 말도 맞다.

헤르겔이 가진 수인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노숙자들을 쫓아낸 시티가드의 활약, 거기에 나탈리야가 가지고 있던 포션까지,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헤르겔은 이미 진작 죽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헤르겔의 몸에 마나를 흘려 넣은 것까지 큰 도움이 됐다.

보란 듯이, 요하네스가 공격할 거란 걸 알고도 당할 뻔했다.

“요하네스가 완전히 내 예상을 깨고 행동했어. 도시 안에서 이렇게 보란 듯이 일을 저지를 줄이야….”

이 빌어먹을 깜둥이 새끼 덕에 아주 피 말리는 경험을 했다. 이걸 어떻게 갚아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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