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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9화 〉 그 여기사는 무엇을 보고있나? (279/314)

〈 279화 〉 그 여기사는 무엇을 보고있나?

* * *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온 아베일리는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탈리야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이디 나탈리야.”

“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베일리경.”

나탈리야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인사를 건넨 아베일리는 옆에 있던 로인에게도 똑같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레이디 로인, 어제는 온종일 주무시길래 걱정했습니다.”

“크흐흐, 이런 인사는 처음이라 낯간지럽네. 좋은 아침. 아베일리씨.”

“로인양처럼 아름다운 여성에게 정중한 인사를 처음으로 건넨 게 저라니, 기쁜 일이군요.”

만약 아베일리가 평범한 남자 기사였다면, 내 여자들에게 이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큰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고, 게다가 눈독 들이고 있는 여자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세 사람이 제법 친근한 느낌이라 당황스럽다.

분명히 예전에 남부 벌목 캠프에서 본 적이 있다고는 해도 이번으로 고작 세 번째 만남이다.

게다가 이전의 만남에서도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의뢰에 대한 정보 제공만 받는 둥, 비즈니스적인 관계였을 뿐이다.

옆에 있던 나탈리야에게 속삭였다.

“제법 친해 보이네…?”

“아, 어제 한성님이 기절해 계신 동안 대화를 좀 나눴었거든요. 되게 친절하고 좋은 분이시더라고요.”

“그, 그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눈독 들이고 있는 여자가 내 여자들과 친해진다는 건 나쁜 소식만은 아니겠지.

내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면 분명히 내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날 사랑해 마지않는 나탈리야나 로인이 나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했을 리는 결단코 없을 테니 나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여기서는 먼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도록 하자.

“아베일리 경. 제 아내들이 많이 경황이 없었을 텐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아베일리는 나탈리야나 로인을 대할때의 상냥한 미소를 지우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음, 아르파곤의 고아원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혹시 그대가 이야기를 꺼냈나?”

“네? 아, 네.”

뭐지? 아베일리의 태도가 미묘하다. 묘하게 짜증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릴리아나씨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릴리아나양을 알고 있나? 그녀와는 무슨 관계지?”

캐묻는 듯이, 꼬리를 물어오는 아베일리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답한다.

“네? 그냥, 고아원에 원단이 되는 천을 납품할 때 몇 번 마주쳤던 사이입니다.”

“흐음….”

옅은 갈색의 눈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마치 나라는 남자의 가격을 매기듯, 품평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릴리아나양의 이야기는 뭐 때문에 꺼낸 거지?”

“네?”

뭘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걸까.

“릴리아나양의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꺼냈는지 물었다.”

“그냥 아인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대화를 하다 보니 용인족인 릴리아나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뿐입니다.”

“……릴리아나양은 그대가 흥미본위의 화제로 이야기를 꺼낼만한 여자가 아니다.”

“…….”

갑자기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내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야. 나만 나쁜 놈 만드는 건가?

“이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조심하도록 하죠.”

“그래. 그러면 레이디 나탈리야, 레이디 로인. 언젠가 연이 된다면 또 뵙도록 하죠.”

나에게서 관심을 거둔 아베일리는 다시 나탈리야와 로인을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나 혼난 거야?”

“그런 모양이네. 너 아베일리씨한테 뭔가 잘못했어?”

“잘못이고 뭐고, 대화 자체를 몇 번 나눠본 적이 없는데.”

남자 기사였다면 지금의 태도가, 나탈리야와 로인에게 흑심이 있어서 친절하게 굴고, 그 남편인 날 견제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베일리는 여자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베일리가 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까.

나중에 반드시 자빠트려서 혼내주겠다.

아르파곤의 기사단과 헤어져 웨스트웨이로 돌아오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팔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숲길을 걸으려니, 여러 가지로 위화감이 많이 느껴졌다.

몇 번씩, 로인이나 나탈리야의 부축을 받았다.

웨스트웨이에 도착한 건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이 거대한 도시로부터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서 그런 괴물과 우연히 만났었다니, 역시 판타지 세계라는 걸까.

이 세상에 온 지도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은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느낌이다.

그나마 내가 이 세상에 이만큼이나마 적응한 것은 내가 알던 세상과 비슷한 양식의 구조물들 덕일 것이다.

화장실의 구조나, 조금 높은 고층 건물에 존재하는 엘리베이터 등, 어쩌면 이게 수렴진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계통상으로 관련이 전혀 없는 박쥐와 새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 필요한 도구는, 결국에는 비슷한 모양새로 발전한다는 거겠지.

아니, 물건이니까 수렴진화가 아니라 수렴발명인 걸까?

“다들 고생 많았다. 그대들의 보수는 용병 길드를 통해 지급하도록 하지, 이삼일 후에 용병 길드로 가보도록.”

트리시안은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는 경비대원들을 이끌고 본부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나와 내 여자들, 그리고 제머닉과 베크가 남았다.

“한성, 수고 많았어. 두 번이나 만났으니 언젠가 또 인연이 생길 것 같군. 다음에 또 만나길 기원하지.”

남자와의 재회는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제머닉의 인사에 적당히 대답하고는 헤어졌다.

자, 이제 남은 건 나와 나탈리야, 그리고 로인뿐이다. 돌아갈 목적지를 정해야 한다.

“음, 지금 시간이면 다른 사람들은 검은 달에 있겠지?”

“검은 달에 들렀다 가시게요?”

“응? 그야 돌아왔으니까 보고는 해야지.”

“음…. 몸이 안 좋으시니까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셔서 쉬시길 바랐는데.”

나탈리야는 팔을 쓰지 못하는 내가 걱정이라는 듯한 시선을 건네왔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진짜로 팔이 안 움직일 뿐이지. 그걸 제외하면 평소랑 똑같으니까.”

그렇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고는 곧장 검은 달로 향했다.

건물의 입구를 지키던 조직원들은 나를 보자마자 곧장 좌우로 갈라서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음, 고생들이 많아.”

비록, 조직의 우두머리는 게르미이긴 하지만, 그 게르미의 주인이 나니까 조직의 우두머리는 나이기도 하다.

1층 중앙의 홀을 지나쳐 곧장 2층에 있을 게르미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조직원들은 전부 나를 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온다.

아직은 검은 달이라는 조직뿐이긴 하지만, 이것도 확실한 권력이긴 하다. 흐흐.

게르미의 사무실 문 앞에 당당하게 서서 눈앞을 가로막고 선 나무 문을 인상을 쓰며 바라봤다.

눈빛만으로 문을 열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으로 이러고 서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해보니 손을 못 쓰니까 문조차 못 여네.”

“제가 열어드릴게요.”

“고마워. 나탈리야.”

뒤따라오던 나탈리야가 사무실의 문을 열어줬다.

끼익, 문이 열리며 내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 쌓인 서류를 확인하던 게르미는 말도 없이 문이 열리자 인상을 쓰며 바라봤다.

도대체 누가 감히 조직의 우두머리인 자신의 사무실에 허락도 없이 문을 여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그 사납던 눈빛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봄날의 눈 마냥 녹아 사라졌다.

“음? 한성이!”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활짝 펴지며 함박웃음을 짓던 게르미는 이내 헛기침을 하고 평소의 권위 있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크흠, 흠…. 돌아왔나?”

“응. 테르미아씨하고 엘레나씨는?”

“두 분은 지금 공장 확인 때문에 나가 있어.”

“흐음…. 그래?”

게르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 안에 있던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앉았다.

나탈리야와 로인도 게르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소파에 앉은 내 양 옆에 바짝 달라붙듯이 앉았다.

나는 감촉이 희미한 팔너머로 두 사람의 뭉클거리는 가슴의 감촉을 느끼며 게르미에게 물었다.

“공장은 그럼 얼마나 남은 것 같아?”

“거의 다 됐어. 개시가 코앞이랄까.”

“잘됐네. 그보다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응? 뭐가?”

“오랜만에 남편이 돌아왔는데 안아주지도 않고 그렇게 앉아서 대화만 할 거야?”

“엉? 뭐, 뭐래….”

내 능글거리는 말에 게르미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좌우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건대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그래…. 게르미는 별로 날 보고 싶었던 게 아닌 모양이구나?”

“뭣.”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네. 난 게르미가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그, 그러면 네가 와서 날 안아주던가. 왜 나한테만 해달래? 흥….”

게르미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 채 눈을 날 향해 힐끔거리며 어서 자기에게 오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내가 널 안아줄 수는 없어.”

“왜?!”

안아줄 수 없다는 말에 게르미가 순간적으로 격분했다.

“그야, 게르미를 안아줄 팔이 없는걸?”

“어? 뭐?”

내 말에 게르미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크게 뜬 호박색의 두 눈은 내 양팔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축 늘어진 내 팔을 뻔히 바라보다가 말을 더듬었다.

“너, 너 팔이 왜 그래?”

“새 시대에 두고 왔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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