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4. 집착 - (3) (26/163)



〈 26화 〉4. 집착 - (3)

“여보세요?”

“뒤에 봐.”

“뒤에?”

전화의 주인공은 지혜였다.

별 생각없이 뒤를 돌자 그 곳엔 지혜가 있었다.




 여깄지?

“… 지혜야?”

“쟤가 다솔이야?”

“…어.”

“딱 기다려.”

지혜가 전화를 끄고는 내게 걸어왔다.

멀리서.


또 다른 악몽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 하아.”

“오빠, 그래서 카페는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거든.”

나는 다가오는 지혜를 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까지 평화로웠던 내 캠퍼스 생활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문득 머리에서 한 단어가 떠올랐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폭탄이 터진 폭심지.

내가 서있는 곳이 곧 그 곳으로 바뀔 것이다.

내 옆에 서있던 동수가 지혜를 발견하자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야…, 저. 저 분, 너….”


“어, 맞아.”


지혜가 내게 다가왔다.


오늘 지혜는 정말 예뻤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 특히  예뻤다.

내가  목걸이를 입고 그 위로 팔랑거리는 소매의 블라우스와 가디건을 걸쳤다.


그녀의 예쁜 다리를 가려주는 약간은 연한 스타킹과 구두를 신고 내게 걸어왔다.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고, 지혜가  앞에 멈춰서자 나는 숨이 멎었다.

뭐라도 말을 꺼내야하겠다 싶었기에 인사라도 하려던 순간,

“안…”

“조용해.”

“…”


지혜가  입을 막았다.


약간은 화난 표정, 하지만 영 귀여워서 그렇게 화나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지혜는 고개를 돌렸다.

동수를 보더니 방금까지의 차가운 모습은 어디가고 생긋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동수 씨 맞죠? 성준이 친구.”


“아…, 네. 김동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누나.”


“저도 반가워요. 성준이한테  많이 들었어요. 나 성준이 좀 빌려가도 되요?”

“네네. 데려가세요.”

“고마워요.”

지혜가 다시  번 웃은 뒤, 내게 팔짱을 꼈다.


그녀가 내 옆구리를 찌르자 나는 자연스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

“…”


다솔이와 지혜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내 심장이 다 철렁했다.

혹시라도 둘이 싸움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서 긴장됐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  같아서 그대로 가려던 차에,


“오빠, 그대로 갈 거예요?”


다솔이가 포문을 열었다.

“…”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지혜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는 순간, 내 하루가 아주 크게 꼬일 것만 같았다.

“어머, 성준아. 아는 사람이였어? 얘기해주지, 몰랐잖아.”


“… 미안.”


“미안은 무슨, 괜찮아. 이제라도 인사하면 되지.”

지혜는 살면서 내가 들어본 목소리 중 가장 나긋나긋했다.

그래서 더 미칠 거 같았다.


차라리 화라도 내주면 좋을텐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에 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혜가 돌아서서 다솔이를 한 번 쳐다본 뒤, 내게 물었다.

“성준아, 누군지 소개시켜줘야지.”

“어…, 권다솔이라고. 같은 과 후배야. 다솔아, 여긴 윤지혜. 내 여자친구.”


잽은 다솔이가 먼저 날렸다.

“아~, 전에 말한 ‘5살 많은’ 여자친구요?”

“… 말한  없지 않나?”

“전에 말했던 거 같은데요, 우리 둘이 카페에서 만났을 때.”

“…”


등에 식은 땀이 났다.

내가 지혜 얘기를 했나?


정말 안 했던 거 같은데 정확히 5살 차이란  알고 있으니 어디선가 듣긴 들은  같다.


순간, 내 눈이 동수에게 향하자 김동수 개새끼가 내 눈을 피했다.


‘십새끼, 나중에 반드시 죽인다. 십새끼.’

정보원을 확인한 나는 슬쩍 눈을 돌려 지혜의 눈치를 살폈다.


지혜는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나한테 ‘누나’라고 불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가끔씩 기분을 타면 얘기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더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의 얼굴은 여전히 생글생글한 미소였다.

그래서  소름끼쳤다.


지혜가 입을 열었다.

“음…, 권다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네. 우리 성준이랑 친해?”

“네, 친한데요.”


“아~,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줘. ‘친구로’.”

“…”

지혜가 멋드러진 반격을 하자, 다솔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혜는 그 기세를 몰아붙여 승리 선언을 했다.

“그럼 나는 성준이랑 약속이 있어서 가볼게. 만나서 반가웠다, 다솔아.”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솔이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였다.


생각보다 질긴 여자였다.

“… 집착이 심하시네요, 연상이면서. 남자들은 그런 여자 별로 안 좋아하던데.”

“글쎄, 성준이는 안 그런  같던데. 여자친구인 내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친구보다?”

“… 모르죠. 붙어다니는 시간은 제가  많은 거 같던데요.”

“글쎄…, 그냥 친구랑 여자친구랑 보내는 시간이 같을까?”


다솔이가 무심결에 입술을 씹었다.


그 모습을  지혜는 승리를 확신한듯이 씨익 웃었다.

“더 할  없으면 가볼게. 지금부터 내내 붙어있어도 24시간이 모자라서.”


“…”


다솔이는 아무 말도 하지  했다.

지혜가 다솔이를 완벽히 제압한듯 했다.

하지만 지혜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굳이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는 상대에게 마지막 확인사살을 날렸다.


“어리네. 풋풋해서 보기 좋다. 앞으로도 성준이랑 잘 지내? 가자, 자기.”


“…어.”

지혜는 내 팔에 바짝 안겨 걸었다.

사실 내가 지혜에게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조금 엉거주춤 걷자 지혜가 이를  문 체로 말했다.

“똑바로 걸어, 똑바로.”


“…넵.”


지혜랑 걸어서 교문을 나가면서까지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긴장해서 지혜의 눈치를 살폈고, 지혜는 생글생글한 미소가 사라진 체 누가봐도 화난 얼굴이었다.


교문을 나가자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솔이도, 동수도 보이지 않았다.

“… 지혜야?”

“짜증나!”


“…”


“어린  어떻게든 이겨먹으려고 바득바득. 뭐? 5살? 어우, 짜증나….”

“지혜야, 내가 미안.”


“자기가 뭐가 미안해?! 쟤도 참 성격 별나다.  임자있는 남자를 노려? 미친 년.”


“…”

지혜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자 내가  쫄았다.


“자기.”


“어.”

“노래방. 빨리. 노래방 가자.”

“그래….”



***


“얼마나 할까?”


“1시간.”


“1시간으로 해주세요.”

“네, 1시간이요. 음료수는 뭐 드실래요?”


“뭐 마실래?”

“이온 음료 아무거나.”


“이온 음료로 두 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12번 방으로 가시면 되요.”


“네.”


나는 화가 난 지혜를 이끌고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노래방의 문을 닫자, 밖에서 다른 방이 부르는 노래 소리로 분명 시끄러웠음에도 적막을 느꼈다.


가장 시끄러운 장소에서, 가장 조용한 아이러니를 느끼며 나는 죄인처럼 자리에 앉아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혜는 여전히 화가 난듯한 표정이었다.

“…”


노래방 리모컨이 그녀의 앞에 있어서 눈치만 보고 있기를 1분.

드디어 지혜가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지혜는 검색 기능도 이용하지 않고, 바로 번호를 눌렀다.


선곡한 노래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여자 락커의 노래였으나, 정작 제목 자체는 처음 봤다.

하지만  여자 락커가 높은 고음으로 유명하니 아마 저 노래도 엄청 높을 거라 생각했다.

강렬한 도입부가 지나고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지혜는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렴구가 시작되자, 스피커가 터질까 걱정되는듯 미친 고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 지혜 노래 존나 잘하네.’

노래방 같이 가면 매번 여자여자한 노래만 부르거나 나한테 마이크를 넘기고 자기가 멋대로 선곡하곤 했다.


지혜가 이런 노래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어느 새, 2절의 후렴구로 향하자 나는 자연스레 손에 탬버린을 들어 열심히 흔들기 시작했다.

문득 지혜와 눈이 마주쳤지만, 지혜는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자기도 손에 탬버린을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가자, 지혜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늘 내게 너뿐이야 와~,  사랑한다 내게 말해줘.”


지혜는 마치 가사를 잘 들으라는듯이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내가 원하는 건 바보같이 너야. 그래서 더 힘든거야.”


그리고 노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향했다.

미친듯이 올리는 고음에 나는 행여나 노래방의 스피커가 찢어질까 걱정될 정도였다.

“후우….”

마지막 샤우팅이 끝나자, 지혜는 리모컨을 던져두고 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내게 안기며 부탁했다.

“… 노래 불러줘.”

“뭘로 할까?”

“내가 좋아하는 걸로 성준이 네가 불러줘.”


“… 나 미성   내는데.”

“노력해.”


“… 그래.”


나는 지혜가 좋아하는 노래 중, 그나마 제일 자신있는 것을 찾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지혜는 계속  품에 안겨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지혜는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 미안해.”


“뭐가?”

“… 원래 오늘 자기한테 깜짝 선물 준비했는데 다 망쳐서.”


“… 아니야, 나도 갑자기 너 봐서 좋았어.”

“그래도…”

지혜는 다시 내게 안겼다.

나는 그냥 지혜가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길 바라며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줬다.


“… 집착하는 여자 싫어해?”

“… 아니, 좋아. 자기가 나 많이 좋아해주는 거 같아서 좋아.”

“나이 많은 여자 별로야?”

“… 우리 부모님은 띠동갑이야.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 어머님이랑 아버님이랑 두 분 중 누가  나이가 많으신데?”

“…”


나는 대답하지  했다.

우리 아버지가 더 많으셨거든.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지혜는 먼저 사과했다.

“… 미안해, 귀찮게 굴어서.”

“하아…, 지혜야. 진짜 괜찮아.  괜찮아. 야,  괜찮아 부르자.”


“… 뭐?”

“네가 아까 말했잖아. 시간이 아까워, 조금이라도 노래 더 부르고 가자. 그리고 여기서 다 털어내고, 밖에 나가자.”

“… 그럴까?”

“그러자.”


내가 지혜의 손에 마이크를 하나 쥐어줬다.


또 다른 마이크를 붙잡고, 리모컨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지혜가 막아섰다.

“선곡은 내가.”

“그래.”

그 날 우리는 둘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남녀듀엣 노래를 다 불렀다.

***

노래방에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조금 어둑해졌다.

들어갈 때는 지혜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다면, 나올 때는 지혜와 함께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문득 지혜가 걱정되서 물어봤다.

“지혜야, 너 그거 스타킹 괜찮아?”

“뭐가?”

“스타킹. 안 추워?”


“바보야, 스타킹이  따듯해.”


“진짜?”

“어. 신어볼래?”

“… 아냐, 됐어. 그보다 오늘 어떻게 온 거야? 주말에 오는  아니였어?”

“반차 썼지. 하루 일찍 내려왔어, 자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크큭, 고마워. 진짜 서프라이즈 선물이네.”


“… 하아, 선물 진짜 많이 준비해왔는데  떄문에 기분을 너무 잡치고 시작했어.”

“…”

저번주의 지혜가 성욕에 가득차 있었다면, 이번 주의 지혜는 좀 거칠었다.


그리고 나는 지혜의 그런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씩 보게 되는 게 좋았다.

“선물은 많이 준비했다더니, 네가 선물이야?”

“그것도 있는데…, 자기 일루 와 봐.”


지혜는 나를 잡아 으슥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슬쩍 보더니 자신의 치마를 살짝 들쳐줬다.


“… 야!”


“주변에 없어. 그리고 빨리, 자기가 부탁한거 잖아.”

“...?”

그녀가 치마를 살짝 들춰올리긴 했지만, 허벅지가 살짝 노출되는 정도였지 팬티까지 노출될 정도는 아니였다.

뭔 선물을 준비해왔는가 싶어서 허벅지를 보는 순간, 하반신에 피가 쏠렸다.

가터벨트.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이 내  앞에 있었다.

실제로 여자가 가터벨트를 입은 걸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혜의 통통하고 늘씬한 허벅지 사이로 파묻힌 가터벨트의 고정줄이 나를 자극했다.

문득 나는 당장이라도 지혜를 벗겨서 치마 속은 어떻게 되어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혜는, 언제나와 같이,  하나의 선물 만을 준비하진 않았다.

“나, 오늘 많이 준비했어.”


“… 생리 중이지 않아?”

“바보야, 여자가 생리 중에 누가 치마를 입냐.”


지혜의 말을 들은 나는 그녀가 입고 온 치마를 바라보았다.

지혜가 큰 비밀을 얘기해주듯 내게 속삭였다.


“나 생리 끝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