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 부산 데이트 - (11)
죽을 다 먹고 난 뒤에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숙취로 인해 무거워진 머리가 한결 편해지자 그제서야 내가 한 행동이 얼마나 멍청했나 이해가 갔다.
‘… 바닥에 캐리어도 있었는데 하….’
스스로의 멍청함을 후회하고 있는 와중, 지혜가 내게 물었다.
“다 먹었어, 성준아?”
“어. 내가 치울게.”
“아냐. 자기는 좀 쉬어. 많이 피곤해보인다.”
“…”
지혜가 차근차근 먹은 것들을 정리하자, 나도 옆에서 조금 거들며 입을 열었다.
“… 지혜야.”
“응?”
“… 앞으로 어디갈 때는 꼭 말하고 가. 놀랬어.”
“히힛, 자기도 나 없이는 못 사나봐?”
“어. 진짜 놀랬잖아, 자고 일어났는데 옆에 없길래.”
“오구오구, 그래쪄요? 우리 성준이, 완전 애기네.”
“진짜로.”
“알았어. 내가 미안해.”
다 먹은 용기들을 비우고 대충 봉투에 쑤셔넣은 뒤, 지혜가 쓰레기 봉투들을 집어들었다.
“자기, 나는 씼었는데. 나 쓰레기 버리고 오는 동안 씻고 있을래?”
“… 내가 이따 같이 버려도 되는데.”
“됐어. 어서 씻어. 내가 할게.”
“… 미안. 부탁할게.”
“응응.”
지혜는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왠지 그 모습이 두려웠다.
왜지?
분명 삐졌을 거란 생각도 잠시 했고, 아니면 내가 숙취로 고생하는 거 때문에 걱정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생글생글 웃는 지혜를 보며 뭔가 마음에 걸렸다.
‘… 모르겠다.’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샤워실로 들어갔다.
일단 씻고 생각해봐야겠다.
다 씻고 밖으로 나오자 지혜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아, 자기 다 씼었어?”
“어. 고마워. 쓰레기 버려줘서.”
“뭘. 몸은 어때? 괜찮아? 운전 내가 할까?”
“괜찮아. 내가 할게.”
“그래, 히힛.”
지혜가 내 팔에 안겼다.
그를 보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지혜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 화 안 났어?”
“응?”
“… 어제 먼저 잔 거.”
“풉, 야! 너 진짜 나 그렇게 본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안 자고 기다린다고 했는데 먼저 잤잖아….”
“아~. 나한테 거짓말한거?”
“…”
지혜가 거짓말이라고 말하자 조금은 양심에 찔렸다.
아무래도 그런 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지혜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표정 풀어. 그냥 한 말인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
“성준아.”
“응?”
“전에도 말했지. 넌 거짓말 진짜 못 한다고.”
“… 어.”
“그래서 좋은 거야. 항상 솔직하니깐.”
“어?”
“눈에 보이거든. ‘얘가 지금 피곤한데 날 위해서 배려해주고 있구나.’ 하는 것도.”
“…”
“그런데 그게 너무 눈에 보이다 보니깐,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면서도 있지, 좀 서운하다?”
“뭐가?”
지혜가 내 손을 붙잡으며 날 마주보고 말했다.
“피곤하면 그냥 피곤하다고 말해줘. 진짜로.”
“…”
“이런 배려, 하나도 기분 안 좋아.”
“어….”
“나는 자기가 필요하면 나를 거절해주는 남자가 되면 좋겠어.”
지혜가 붙잡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자기 취업 준비하고 하면 더 바빠지겠지…. 자격증 시험도 준비한다매?”
“…어.”
“시험은 대부분 다 주말에 있으니깐. 지금보다 만나는 날도 더 줄어들 거고.”
“그렇…지.”
내가 먼저 얘기했어야할 것들.
내가 먼저 신경써야했을 것들을 지혜가 말하고 있었다.
“… 내가 미안해.”
“왜 네가 미안해….”
“내가 너무 자기한테 기댔나보다….”
“… 아냐. 내가 더 미안해.”
지혜를 껴안자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내가 하려는 일이, 내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힘든지.
20대에 5살의 차이, 대학생과 사회인. 그리고 결혼까지.
하나같이 생각하면 할수록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한 현실이었다.
“… 뭐라도 좀 말해봐. 나 눈물 나오려고 해.”
“미안해, 지혜야.”
“…”
“내가 더 잘할게.”
“어…, 믿을게. 약속.”
“… 약속.”
지혜가 손을 내밀자 거기에 새끼손가락을 걷고 엄지와 엄지를 붙여 도장까지 찍었다.
그녀가 내게 푹 안긴 상태로 웅얼거렸다.
“시험… 빨리 끝내.”
“어, 그럴게.”
“취직도 빨리 하고….”
“어, 한 번에 통과할게.”
“… 로또도 자주 사놔.”
“크큭, 당첨되면 반으로 나눌까?”
“바보야. 자기가 사면 자기꺼지.”
“내가 네 꺼잖아.”
“…”
그 말을 들은 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 그런 말 앞으로 하지 마.”
“응? 왜?”
“… 잘 참고 있는데 또 참기 힘들게 만들잖아.”
“…”
그 말을 듣자 지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시계에 눈이 갔다.
아직 10시.
체크아웃 시간까지 한 시간.
“… 지혜야.”
“응응….”
“나 다다음주에 토익시험 있어.”
“… 응?”
“토익 다음 주에는 설날 연휴라서 못 만날 거고.”
“… 어.”
“그 다음 주 2월에는 한국사 시험도 있어.”
“…”
“오늘 지나면 아마 한 달간은 못 만날 거 같은데.”
“… 알아. 그래서 이번에 4일이나 만난 거 잖아.”
“그러니깐 있지.”
손으로 지혜의 고개를 잡아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금 좀 무리하고 싶은데.”
“… 안 피곤해?”
“피곤해. 엄청 피곤해.”
“… 그럼 그냥….”
“근데 지금 안 하면 한 달 동안 내내 후회할 거 같아.”
“그래도오….”
“내내 후회하면서 자기 생각 때문에 공부도 손에 안 잡힐거 같고.”
“진…짜?”
“어. 그래서 지금 좀 무리하고 싶은데.”
지혜의 귀에 대고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바를 정 자(正)는 다 채워야지?”
“…”
지혜가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 체크아웃까지 시간이 좀… 남았네.”
“그치?”
“…”
지혜가 슬그머니 나를 올려다보곤 말했다.
“한 번만?”
“한 번만.”
“…”
지혜가 패딩의 지퍼에 손을 올려 지퍼를 채 내리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덮쳤다.
“흐읍…!”
인간의 성욕이란 참 무서워서 때로는 체력의 한계도 다 뛰어넘는 다는 것을 경험했다.
결국 지혜와 호텔을 나온 것은 체크아웃 시간을 살짝 지난 11시 10분이었다.
급하게 대충이라도 씻고 나오면서도 나는 잊지 않았다.
지혜의 허벅지에 획을 두 개 추가하는 것을.
*
“히힛.”
“그렇게 좋아?”
“자기는 안 좋아?”
“나도 좋지. 그냥 네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서.”
“응? 처음 아닐텐데?”
“… 나 제외하고.”
“눈치도 빨라, 우리 성준이. 일로와.”
쪼옥.
지혜가 내 볼에 뽀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볼을 빨아당겼다.
“… 야, 사고 난다.”
“자기가 안 나게 조심히 운전해, 히힛.”
“노력할게.”
지혜와 나는 호텔을 나와 오늘 미리 예약해뒀던 데이트 코스로 향했었다.
직접 만들어보는 커플링 공방이었다.
나는 지혜에게 목걸이를, 지혜는 나에게 팔찌를 선물해준 적은 있었지만, 서로 같은 물건을 맞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부산에서 커플링을 직접 만들 수 있는 공방이 있다고 하여 그 곳을 데이트 장소로 골랐다.
공방에 도착한 뒤, 커플링의 재질을 고르고 난 후에는 서로의 커플링을 직접 만들었다.
미리 예약해두었기에 공방에 찾아가 반지 호수를 잰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대부분의 일들은 반지를 만드시는 분들이 다들 했고, 나와 지혜가 한 것이라곤 광택을 내기 위해 계속 다듬고, 다듬고, 다듬기만 했다.
혼자서 했더라면 상당히 고단하고, 지루한 작업이었을 것만 같았음에도 지혜와 쉴새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잘 갔다.
다 완성된 커플링을 서로에게 끼워준 뒤, 마지막 숙소로 향하는 길 내내 지혜는 반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쳐다보기 바빴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지혜가 나를 향해 돌아보며 웃었다.
“… 오길 잘 했다.”
“그렇지?”
“응응.”
그녀의 왼쪽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가 보기 좋았다.
문득 손을 내려 운전대에 올라가 있던 내 반지를 보았다.
“지혜야.”
“응응.”
“너는 나중에 무슨 반지 하고 싶어?”
“음…. 글쎄. 금반지?”
“다이아 말고?”
“… 다이아 너무 비싸.”
“돈 생각 안 하고 기준 잡았을 때는?”
“큰 거? 무조건 큰 게 좋지.”
“옥 반지 같은 거?”
“그런 것도 좋지. 아무튼 큰 게 좋아.”
“크큭, 왜?”
“나 유부녀예요. 남편이 있는 여자예요. 하고 자랑하고 싶어서?”
“…”
지혜의 말을 듣자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근데 자기, 난 이 반지로도 괜찮은데.”
“그래?”
“응. 내가 만들어 준 반지를 자기가 끼고, 자기가 만들어 준 반지를 내가 끼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 너 아까 사포질 열심히하드라.”
“히힛, 자기 줄 거니깐.”
“그래, 예쁘다 우리 지혜.”
네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자 나는 고개를 들어 오늘의 숙소를 확인했다.
마지막 날의 숙소는 모텔이었다.
첫 날은 휘황찬란한 호텔.
둘째 날은 그보다 싼 호텔과 모텔 사이의 무언가.
그리고 마지막 밤은 모텔.
갈수록 더 초라한 숙소가 되었지만, 솔직히 모텔이 훨씬 편했다.
차를 주차하고, 열쇠를 받아 객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들이 보였다.
붉은 색의 살짝 어두운 벽지.
반투명 유리로 막혀있는 화장실벽.
화장대와 붙어있는 컴퓨터.
벽에 걸려 있는 티비.
그리고 둘이 누워도 괜찮은 사이즈의 침대.
“… 이제 좀 살 거 같네.”
“응? 뭐가?”
“지난 며칠 간 너무 좋은데서 잤어. 하아~.”
캐리어를 적당히 세워두고 침대에 엎어지자, 지혜가 나를 따라 내 옆에 엎드렸다.
“매트리스 푹신푹신해?”
“응, 푹신하네. 이따 던져줄게.”
“히힛, 응. 나는 목욕탕 보고 올게.”
“어. 저녘은 뭐 먹을까?”
“다시 나가기도 귀찮은데 그냥 치킨 같은 거 시켜먹을까?”
“그러자.”
지혜가 캐리어를 한 쪽 구석에 몰아두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장을 향해 돌아누웠다.
“…”
왼손을 들어 조명을 가리자 약지의 반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괜히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 별 것 아닌 자그마한 물건인데 이게 뭐라고 사람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성준아! 여기 욕조 대박이야!!”
“어? 왜?!”
“빨리 와 봐!”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욕조를 확인하자, 나도 입이 벌어졌다.
“… 대박이다.”
하트 모양의 욕조에는 파도 기능과 안마 기능이 다 들어있었다.
게다가 욕실용 야시꾸리한 조명도 따로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안 되겠다, 자기.”
지혜가 옷을 벗으며 말했다.
“바로 목욕부터 할까?”
“밥도 안 먹고?”
“목욕 하고 밥 먹으면 되지.”
“목욕만 할 거 아니잖아?”
“히힛….”
지혜가 바지를 벗고 한 쪽 다리를 욕조에 올렸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아직 2획이 남은 ‘바를 정(正)’ 한자가 보였다.
“바를 정 다 채우고 갈 거라매? 피곤해도 조금만 더 노력해, 자기.”
“…”
나도 대충 옷을 벗어두며 말했다.
여기서는 조금 같잖은 자존심을 부려도 괜찮겠지.
“바를 정보다 더 채울 수도 있는데?”
“꺄악. 나 집에 못 걸어가는 거 아냐?”
“택시타고 가야지, 뭐.”
“히힛, 응.”
지혜가 내게 안기며 입술을 핥았다.
“… 오늘은 먼저 자지 마?”
“내일 늦잠 자야겠네.”
“응응, 내가 깨워줄게.”
고개를 숙이자 지혜가 살짝 발을 들어 내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진짜.
내 여자친구가 너무 야하다.
*
“… 다녀왔습니다.”
“왔냐?”
“어, 엄마. 아이고, 피곤하다.”
신발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셨다.
“… 나 얼굴에 뭐 있어?”
“어, 뭐가 있긴 있네.”
“… 뭐?”
“아이고…. 가만히 있어봐.”
어머니는 냉장고를 열더니 안에서 보라색의 무언가를 꺼내줬다.
“앞으로 이거 매일 먹어. 알았지?”
“… 이거 뭔데?”
“복분자 원액. 고모가 준 거야.”
“이걸 왜?”
“… 가서 거울로 네 얼굴 꼬라지나 봐라. 4일 놀다온다 그럴 때부터 알아봤는데 얼굴이 반쪽이 되서 돌아왔네.”
“… 어?”
“아이고, 여자친구를 만나는지 귀신을 만나는지.”
“…”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핸드폰을 켜서 얼굴을 확인했다.
조명이 어두워서 그런지 눈 밑이 시커멓게 보였다.
...
아닌가?
“… 잘 마실게.”
“으이구, 이 화상아.”
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면서도 복분자는 깔끔하게 다 마셨다.
다 마시고 알았는데
이래서 복분자, 복분자 하나 보다.
챕터 8. 부산 데이트 (끝)
-> 챕터 9. 유사 상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