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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9. 유사 상견례 - (3) (84/163)



〈 84화 〉9. 유사 상견례 - (3)

독서실에서 가방을 챙긴 뒤, 학교 정문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조금씩 학교 정문이 보이자,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하며 땀을 식혔다.

“허억…. 허억….”

지혜가  이 곳에 왔는지보다 당장 지혜를 볼 수 있단 생각으로 머리가 온통 가득 차있었다.

조금씩 정문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먼저 나를 발견한 지혜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자~기!!”

“어!”

지혜를 보고 달려가 그녀의 앞에 멈춰서고는 일단 숨부터 골랐다.

“허억…. 허억…. 후우…. 하아….”

혹시 잘못본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 다시 확인했다.

“하아…. 지혜 맞지?”

“응? 그럼 아닌 줄 알았어?”

“아니, 어떻게 왔어?”

“반차 쓰고 내려왔지. 내일 대체휴일이거든.”

“아….”

이번 설날은 주말이 2일이나 끼여있어서 대체 휴일이 있었다.

“아하…. 근데 옷이 왜 그래?”

“왜? 이거 싫어?”

지혜의 옷은 쫙 달라붙는 정장이었다.

OL(Office Lady)의 표본 같았다.

“… 편한 거 입고 오지 그랬어?”

“급하게 오느라고, 히힛.”

나는 잠시 넋이 나가서 지혜의 복장을 살펴봤다.

깔끔하게 묶은 머리, 살색의 스타킹과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 낮은 굽의 구두,  와이셔츠와 대조되는 검은 자켓. 그 위를 덮고 있는 코트.

“… 지혜야.”

“응?”

“너 항상 그렇게 입고 다녀?”

“항상은 아니고 가끔씩?”

“…”

“그래서 어때? 감상평 말해줘.”

지혜가 한 바퀴 쪼르르 돌자 나는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 마음에 안 들어.”

“안 예뻐?”

“아니. 너무 예뻐서.”

“히힛, 으이구. 질투심만 많아가지고 말이야.”

지혜가 내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자기,  이렇게 땀을 흘려?”

“… 뛰어왔어.”

“잠깐만.”

지혜가 가방을 열더니 그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의 땀을 닦아줬다.

“으이구, 천천히 와도 되는데.”

“네가 기다리잖아.”

“다음엔 그냥 걸어와. 힘들어보인다.”

“아냐, 괜찮아.”

지혜가 땀을  닦아준 뒤에 두 팔을 벌렸다.

“인사 안 해?”

“응?”

“땀도 닦았잖아.”

“아아….”

그제서야 지혜가 뭘 의미하는지 깨닫고 나는 웃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어서와. 보고 싶었어.”

“나도.”

조금 땀을 흘렸음에도 지혜가 온 힘을 다해 나를 꾸욱 안아줬다.

“히힛, 자기 냄새다.”

“… 나 냄새 나?”

“땀 냄새 말고. 남자의 냄새, 히힛.”

지혜의 말을 듣고 나도 냄새를 맡기 시작하자, 지혜가 꿈틀거렸다.

“꺄핫! 간지러.”

“너도 좋은 냄새 난다.”

“어떤 냄새 나는데?”

“… 달달하다고 해야하나?”

“잡아먹고 싶은 냄새?”

“응, 그런 냄새.”

“히힛.”

지혜가 품에서 빠져나와 내 손을 잡았다.

“아니, 근데 진짜 어떻게 온 거야? 갑자기?”

“전에 말했잖아. 정 자기 보고 싶어서 못 참을 거 같으면 내가 내려오겠다고.”

“아….”

“… 미안, 자기. 한참 열심히 공부중인데 내가 방해해서.”

“… 아니야. 잘 왔어.”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공부도 도와줄 겸.”

“… 응?”

지혜가 나를 바라보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 한국사 엄청 잘 하거든. 자기 공부 도와주려고 왔어.”

“… 진짜?”

“응, 이것 봐라.”

지혜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하나 더 꺼냈다.

“짜잔.”

“뭐야, 이거?”

“내가 한국사 시험칠 때 공부했던 노트.”

“진짜?”

“응응.”

“잠깐봐도 돼?”

“어, 자기 보여주려고 가져온거야.”

지혜한테서 노트를 넘겨받고  장 넘기면서 보자 입이 벌어졌다.

“… 대박이다, 지혜야. 노트 엄청 깔끔하네.”

“히힛, 안 버리고 놔두길 잘 했네.”

“… 고마워. 진짜로.”

“응응.”

지혜의 노트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보기도 편한데다가 몇몇 도표들이 그려져 있어서 어떤 년도에 무슨 사건이 있는지 한 눈에 들어왔고, 기출 문제들도 따로 오답 노트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지혜가 쓴 거다!

지혜의 글씨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자기….”

“응, 왜?”

“… 이번 아빠일 관련해서 조금 사과도 하고 싶어서….”

“아냐, 괜찮아. 진짜로.”

“… 그래도. 엄청 신경쓰인단 말야….”

“…”

지혜의 마음이 이해갔다.

나도 엄청 당황했는데, 지혜는 오죽할까.

“그러니깐 있지….”

“… 어.”

“내가 오늘,내일 중으로 자기 한국사를 마스터 시켜줄게.”

“… 어?”

뭐지?

이야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렀다.

“내가 잘 생각해봤단 말이야.”

“… 어.”

“어머님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지금 불여시 같은 년이 아닐까? 괜히 젊고 유능한 자기 앞 길을 미리 가로막는 그런 여자처럼 말이야.”

“에이…, 설마.”

“그래서 있지, 내가 옆에서 열심히 자기를 도와줘서 내조할 수 있는 여자라고 미리미리 어필하는거지.”

“… 우리 집에 오게?”

“… 그건 좀 눈치보이지. 아직 막 정식으로 혼담이 오고 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너무 설레발치는  같잖아.”

“그치.”

“… 그래도 혹시 우연히 마주칠 지도 모르니깐 챙겨 입고 오긴 했지.”

지혜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그래서, 자기. 근처에 카페 어딨어? 공부할만한 곳으로.”

“몇 곳 있지.”

“그럼 거기로 가자. 자기 집에 가기 전까지 내가 최대한 이것저것 알려줄게.  간 뒤에도 내 노트랑 같이 이것저것 봐. 자기 혹시 인강도 봤어?”

“어.  개 보는  있어.”

“그럼 그건 그것대로 보고, 내가 하는 얘기는 또 별개의 이야기로 흘러들어. 한 강사 커리큘럼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니깐. 나는 요령 위주로 얘기해줄게.”

“그래.”

“그럼 가자!”

지혜가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안내는 내가 해야하는데….

“… 근데 이거 캐리어는 뭐야?”

“내일도 가르쳐줄거라서? 걱정 마. 내일은 올라갈거야.”

“하루 자고 가게?”

“하루 만에 다 가르쳐줄 수는 없잖아. 그리고 노트가 하나일  알았어?”

“… 어?”

지혜가 방금 건네준 노트를 펼쳐보였다.

“이런   개 더 있어. 이거는 딱 신라시대까지.”

“…”

“조선은  권이다?”

“하아….”

“자기 화이팅!”

“응…, 화이팅.”

*

“흐읍…! 하아….”

“피곤해?”

“조금?”

“여기까지만 할까? 나머지는 내일 볼래?”

“응, 그러자.”

카페에서 지혜와 한 공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유익했다.

처음에는 은근히 카페 데이트 같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들떴지만, 지혜는 진지하게 나에게 여러 팁과 요령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역시 시험을 쳐 본 사람과  본 사람의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본 팁들과 크게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직접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자 그 팁들이 뭘 의미하는지 훨씬  이해됐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할지 막연했던 것들이 머릿 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저녘은?”

“글쎄. 먹고 들어갈거야?”

“그럴까 싶은데.”

펼쳐둔 책들을 정리하며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르고 있자 지혜가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 왜?”

“자기, 안경 다시 써 봐.”

“… 응?”

내가 다시 안경을 쓰자 지혜가 핸드폰으로 내 얼굴을 찍었다.

찰칵.

“히힛.”

“… 말하고 찍어. 나 얼굴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어?”

“뭐래. 자기 맨날 사진 찍자고 하면 웃는 거 엄청 어색하잖아.”

“… 그렇게 이상해?”

“응. 그러니깐 내가 맨날 몰래몰래 찍지.”

“…”

알게 모르게 지혜한테 도촬당하고 있었다.

“짜잔, 봐봐.”

지혜가 안경쓰고 있는 내 얼굴을 그새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 어벙해보이는데.”

“그래서 예쁜건데?”

“… 네가 마음에 들면 나는 상관없어.”

“그래. 히힛. 근데 자기 안경 안 쓰지 않았어?”

“아, 얘기 안 했나? 대학교 합격하고 라식했어. 공부할 때만 눈 나빠질까봐 안경 쓰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왜?”

“안경  자기도 예뻐서?”

“…”

그 말을 듣자, 나는 지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지혜야. 너도 안경 쓰면 예쁠 거 같다.”

“다음에 테만 한 번 써볼까?”

“응. 너는 금테가 어울릴 거 같아.”

“히힛, 그래.”

카페에서 나와 밖으로 나오자 살짝은 쌀쌀했다.

붙잡은 지혜의 손을 내 패딩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래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지혜가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응, 있는데 여기서 먹긴 좀 그렇고.”

“…야.”

“응? 왜에~? 야한 생각했어?”

“…”

오늘은 좀 진지한 거 같더라니 금새 나를 놀려먹기 시작했다.

“기다려 봐. 근처에 맛있는 고기집 있어. 사장님한테 물어볼게.”

“응응.”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 어?”

“왜, 자기?”

“…”

어머니에게 부재중 전화가 3통. 아버지에게 1통 와있었다.

“잠시만. 나 통화 좀.”

“… 어.”

공부에 집중한다고 방해금지모드를 켜놔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미치겠네.’

핸드폰 연결음이 들려올 때마다 속이 탔다.

그 때.

“여보세요?”

“어, 엄마. 전화했었네?”

“… 어. 전화했지.”

“… 왜? 무슨  있어?”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

오늘이 무슨 날이지?

“아니….  모르겠는데.”

“으이구, 내일부터  연휴잖아. 엄마는 할머니 집가서 음식 준비해야지.”

“…아.”

“그래서 가기 전에 너한테 뭐 좀 얘기하려고 전화했는데 내내 전화가  되더라.”

“미안…. 공부하느라 바빠서.”

“연애하느라 바쁜 건 아니고?”

“… 아냐. 진짜 공부했어.”

“그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차에 어머니가 말했다.

“하긴 열심히 공부하는 거 같더라.”

“… 어?”

“카페에서 여자친구랑 알콩~달콩 지낼 줄 알았는데 내내 책만 보더라?”

“…”

 말을 듣고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 왔었어?”

“으이구, 이놈아. 너는 아무리 뛰어봤자 엄마 손바닥 안이야.”

“…”

“여자친구나 바꿔봐. 얼른.”

“…어.”

내가 잠시 핸드폰을 손으로 막고 지혜를 쳐다봤다.

“왜, 자기?”

“… 어머니가 바꿔달라는데?”

“나를? 내가 대구 온 거 아셔?”

“… 보셨나봐.”

“진짜?!”

지혜가 내 옷깃을 붙잡고는 바짝 긴장한듯 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우….”

“…”

지혜가 몇 번 심호흡하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줘. 준비됐어.”

“… 어.”

“여보세요?”

“…”

지혜가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내내 나는 옆에서 불안한 심정으로 지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 성준이 여자친구, 윤  혜 라고 합니다.”

지혜가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나는 옆에서 무슨 얘기인지 듣고 싶어 미칠것만 같았다.

궁금함을 못 참고 휴대폰에 내가 귀를 대는 순간,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소름끼쳤다.

“혹시 성준이가 같이 듣고 있으면 잠시 귀 좀 떼달라고 해줄래요?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

지혜가 내게 눈짓하자 나는 잠시 옆으로 비켜섰다.

“네. 네네. 아니요. 네. … 죄송합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아무래도 제 나이 때문에 좀 기대하시는  있으신 거 같아서…. 네. 네네.”

‘미치겠네….’

지혜가 내 눈치를 보더니 잠시 나랑 좀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혜의 통화 내용도 듣지 못 하고, 그렇게 내 생애 가장 긴 1, 2분을 멀찍이서 기다렸다.

잠시 후, 지혜가 다가오더니 내게 다시 핸드폰을 건넸다.

“다시 바꿔달라 하시네.”

“… 어.”

“하아….”

핸드폰에 귀를 갖다대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어, 엄마.”

“운 좋은  알아. 딴 짓 하는거 봤으면 가만 안 뒀어.”

“…”

“그래도 여자친구가 참하네. 말도 싹싹하게 잘 하고.”

“… 그래?”

“그래. 애가 생전에 여자친구라고는 못 데리고 오더니 어디서 저런 참한 애를 데리고 왔나 싶네.”

“어….”

지혜를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지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꼭 참았다.

“여튼, 기왕 대구까지 내려왔으니깐 잘 멕이고 네가 배웅해줘.”

“… 어.”

“그리고 엄마랑 아빠는 설 준비 때문에 오늘 먼저 경주로 올라가니깐 너는 내일 알아서 올라오고. 용돈 있지?”

“…어. 어? 먼저 간다고?”

“그럼 제사 준비 안 할까?”

“… 그건 아닌데.”

“내일 늦게라도 경주 올라와. 도착 시간 가르쳐주면 네 애비가 가든, 작은 아빠가 가든 누가 데리러 갈 테니깐.”

“어.”

“그리고 괜히 여자친구 밖에서 재우지 말고, 오늘 하루는 집에서 재워.”

“…뭐?”

“얘는. 그럼 넌 여자친구 밖에서 재우려고 했어? 그냥 집에서 재워. 엄마 끊는다.”

“어… 엄마?”

뚝.

어머니가 전화를 끊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았다.

“… 지혜야.”

“응….”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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