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11. 박성준이 윤지혜를 만났을 때 - (5)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을 쳐다봤다.
[박성준님이 대화를 입력 중입니다.]
아까부터 뭘 쳤다가 삭제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거지?
답답하네.
그냥 확 말하면 안 되나?
데이트 한 번 하자는 말이 그렇게 힘드나?
[뭐야, 아까부터 채팅을 하다 말아? 바빠?]
[박성준 : 아…, 그 갑자기 후임 하나가 사고 쳤다고 그래서요.]
[아…, 바쁘겠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별 수 없겠지.
안 그래도 분대장? 이란 보직이라 후임들 관리를 좀 해야한다고 들었다.
고개를 들어 어디 즈음 왔나 싶어서 창 밖을 바라보자, 익숙한 풍경들이 보였다.
집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하자 나도 성준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 나중에 또 연락하자. 나도 이제 내려야해서 문자하기 힘들어.]
[박성준 : 네, 누나. 내일 또 연락할게요.]
[응, 내일 봐.]
메시지를 전송하기 전에 뭔가 조금 딱딱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조금 더 들이대야하나?’
소개팅 이후에 연락한지 1달이 다 되어가는데 그냥 서로 별 거 아닌 일상 얘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를 노려봐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
핸드폰을 지켜보다가 살짝 용기를 내서 눈 딱 감고 이모티콘을 추가했다.
[응, 내일 봐. (하트)]
“미쳤어, 윤지혜. 미친 년, 으으으….”
재빨리 핸드폰을 껐다가 잠시 후, 다시 앱을 켜보았다.
성준이는 메시지를 읽었지만, 딱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 뭐야.”
용기내서 보냈는데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혹시 내가 괜히 오버했나, 싶기도 했었다.
‘… 하.’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학생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그냥 남녀공학이다보니 자연스레 친해져서 사귀었다.
대학교 때는 새내기 특유의 풋풋함과 MT, OT를 위시로 한 커플이 되기 좋은 이벤트들이 많았고 남자 쪽에서 먼저 고백했고, 내가 그걸 오케이 했던 거라 썸이라 부를 만한 단계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애초에 나랑 성준이의 관계는 뭐지?
그냥 매일 저녘 시간마다 문자 정도 나누는 사이.
통화를 하기엔 뭔가 낯간지럽지만, 문자만 나누기엔 뭔가 아쉬운 느낌.
어렵다.
성준이가 먼저 전화를 걸어주면 그냥 받아줄 수도 있을텐데.
“하아….”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를 켜서, 윤경이에게 연락했다.
“응? 무슨 일?”
“… 윤경아.”
“어, 왜?”
“지금 통화 돼?”
“어.”
“… 전에 얘기했던 걔, 기억나?”
“소개팅에서 만난 군인? 연하?”
“응응. 실은 있잖아….”
나는 윤경이한테 답답한 마음들을 털어놨다.
“… 내가 얘랑 요즘 문자를 하고 있거든.”
“그래, 전에 말했었잖아.”
“응응…. 근데 얘가 반응이 좀… 이상하다?”
“어떤데? 막 시큰둥해?”
“… 차라리 그러면 모르겠는데. 얘가 보면 막 나한테 들이대는 게 좀 느껴지거든? 고기도 먹으러 가자고 하고 그런단 말야.”
“그럼 그냥 같이 먹으러가면 되는 거 아냐?”
“… 근데 얘가 전화는 안 걸어.”
“음…, 그건 좀….”
“그치?”
“왜? 군대에서 전화 못 걸어?”
“아냐. 군대에서도 다 전화되지.”
“그럼 왜 통화 안 하는지는 안 물어봤어?”
“내가 그걸 어떻게 물어봐. 그러면 내가 너무 들이대는 거 같잖아.”
“그것도 그렇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이게 거의 한 달이 넘도록 그냥 일상 얘기만 하니깐 좀 답답해서 오늘 큰 맘 먹고 조금 들이댔거든?”
“뭐라고 했는데?”
“… 하트 이모티콘을 마지막에 붙였어.”
“꺄아! 대박이다, 윤지혜. 그래서그래서?”
“근데 반응이 없어.”
“반응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그냥 아무런 대답도 안 돌아왔어? 아니면 별 반응없이 평소처럼 대화했어?”
“… 대답이 없어.”
“읽긴 읽었고?”
“… 어.”
“밀당 하는 거 아니야?”
“야, 언제적 밀당이냐.”
“요즘도 하는 애들 많~다.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 진짜?”
그 말을 듣자, 성준이의 그 순박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애도 밀당을 한다고?’
그럼 난 지금 밀렸으니깐, 다음에 당겨지는 걸 기대해야하는 건가?
“그럼 난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놔두면 걔가 알아서 당겨줄 걸?”
“… 그런가?”
“아니면… 걔 그냥 너 어장관리 하는 거 아니야?”
“어장관리?!!”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단어가 튀어나와 목소리가 커졌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낸 부끄러움 때문에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휴대폰에 가까이 입을 대 조용히 말했다.
“야. 걔가 그럴 애는 아닌 거 같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 걔랑 몇 번이나 만나봤다고.”
“…”
솔직히 성준이의 순박함에 끌렸다.
쭈뼛거리면서 전화번호 대신 SNS 친구 추가를 해도 되냐는 물음과 숙취해소제를 따로 사오는 착함 때문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개팅에 나오는 남자애였다.
어쩌면 내가 고단수에게 당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 여튼 네가 그런 거 다 신경 안 쓰고 걔가 좋으면 그냥 만나는 거고, 아니면 뭐 다른 좋은 인연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안 그래?”
“… 내가 걔를 언제 좋아한다고 그랬냐?”
“오~. 은근 편들어준다?”
“… 아니야! 끊어!”
“그래.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고~. 전에 말했지? 그냥 가볍게 만나서, 가볍게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
윤경이가 전화를 끊었다.
지는 무슨 연애 도사처럼 얘기하네.
맨날 헤어질 때마다 나 붙잡고 울어대면서 무슨.
“하….”
은경이와 얘기한 뒤에 괜히 속만 복잡해졌다.
성준이가 고단수라고?
그럼 진짜 충격일 거 같은데….
“가볍게 만나서…, 가볍게 헤어지는 거….”
그래도 괜찮을까?
*
[미안해요, 누나. 어제부터 5대기라서 당분간 연락하기 좀 그래요….]
[윤지혜 : 그래?]
[… 네.]
“하아…, 혜성아.”
“일병 윤혜성.”
“무전기 잘 잡고 있지?”
“예, 그렇습니다.”
“혹시 모르니깐 통신 확인해 봐. 왤케 쫄리냐….”
“예, 훅훅.”
혜성이가 무전기로 다른 후임을 부르자, 별 일 없다는 얘기가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분대장인데 다들 5대기 중에 나만 내려와서 싸지방 하는 게 너무나도 눈치가 보였다.
[… 다시 올라가볼게요.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요.]
[윤지혜 : 그래, 알았어. 힘내.]
[네, 누나.]
왠지 모르게 누나가 조금 차갑게 대답하는 게 느껴졌다.
…
내가 군인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나?
[누나,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윤지혜 : 응? 갑자기 왜?]
[아뇨. 누나 좀 힘이 없는 거 같아서요.]
[윤지혜 : ㅋㅋ, 고작 글자로 그런 것도 알아봐?]
[아니면 다행이고요.]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끌려는 찰나, 화면에 무언가 떠올랐다.
[윤지혜 님이 대화를 입력 중입니다.]
[윤지혜 : 그럼 당분간 컴퓨터는 못 하는거지?]
[네, 그럴 거 같아요. 해도 다음 주 쯤은 되야 눈치가 덜 보여요.]
[윤지혜 : 그래, 알았어.고생.]
[네. 미안해요, 누나.]
채팅을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하셨습니까, 박성준 상병님?”
“어. 가자, 미안하다. 괜히 이런 데 쫓아오라고 해서.”
“아닙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군대 개 같은거.
그래도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보니 일단은 주어진 일에 집중해야겠다 싶었다.
그래, GOP 안 들어간 게 어디인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밖으로 나가는 순간, 무전기가 울렸다.
“상황 발생! 상황 발생!”
“시발! 뛰어!”
“예!!”
작전장교는 개새끼였다.
5 대기 도중 TV 볼 때, 탄 띠를 조금 풀고 있었다는 이유로 우리를 미친듯이 돌렸다.
개 같은 방독면부터 시작해서 맨날 별의별 개 지랄맞은 상황을 부여하며, 우리들의 인내심을 시험했고 오죽하면 다른 장교들이 우리의 사정을 봐 줄 정도였다.
“… 에휴. 불쌍한 새끼들아.”
오늘의 작전사령인 정보 장교는 우리가 있던 곳에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 탄띠 풀어. 괜찮아.”
“아닙니다!”
“풀어풀어. 진짜 농담 아니야. 니들 어차피 작전이 미친듯이 굴렸잖아. 나는 상황부여 안 하고 몇 가지만 물어볼게. 통과만 하면 단독 군장으로 싸지방 풀어준다. 오케이?”
“예, 알겠습니다!”
“제일 막내가 누구야?”
“일병 조현우!”
정보장교가 막내에게 질문을 했고, 작전장교에게 험하게 굴러서인지, 아니면 저 놈이 영특해서인지 우리는 별 문제없이 통과했다.
정보장교는 천사였다.
그는 스스로 내뱉은 말을 지키고자 개인정비시간에 우리가 우선해서 싸지방을 할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다.
오랜만에 들린 싸지방에서 다들 웹툰이나 웹서핑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SNS에 접속했다.
[누나, 오늘은 컴퓨터 할 수 있네요 ㅎㅎ.]
지혜 누나는 답변이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어서 큰 기대는 안 하고 있던 와중, 누나에게 답변이 왔다.
[윤지혜 : 오, 이제 5대기인가 그거 끝난거야?]
[그건 아니고요. 곧 끝나긴 해요. 오늘 뭐 시험 같은 거 봤는데 잘 해서 당직이 싸지방해도 된다고 허락해줬어요.]
[윤지혜 : 그래? 되게 오랜만이네, 이렇게 말하는 거.]
[그러게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윤지혜 : 딱히? 그냥 뭐 출근하고, 퇴근하고.]
오랜만에 지혜 누나와 나는 대화는 정말 즐거웠다.
괜히 혼자 들떠서 여자들이 싫어하는 군대 얘기, 축구 얘기를 쉽게 안 하려고 참아가며 한참 즐기고 있던 와중, 갑자기 무전기가 울렸다.
“상황발생! 상황발생!”
“시발!! 없다매!!”
정보 장교는 개새끼였다.
없다고 해놓고 상황 발생은 아니잖아, 시발.
나는 컴퓨터를 끄는 것도 까맣게 잊고 급히 달려나갔다.
나가는 와중, 퇴근하는 광수 형과 마주쳤다.
“뻉이쳐라~.”
퇴근 너무 부럽네.
급하게 올라가서 장구류와 총기를 챙기고 위병소까지 달려나갔다.
“헉…, 헉…. 야, 자리 잡아!”
“예!”
손목 시계를 쳐다보자 아직 5분이 지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 정도면 문제가 되진 않을거다.
아니, 그보다 당직 사령은 왜 안 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무전기가 울렸다.
“… 박성준 상병님.”
“왜?”
“… 위병소가 5대기 발판 잘못 밟았답니다.”
“그 시발 새끼들. 이번 달에 2중대가 서지?”
“… 예.”
“하…, 시발!”
짜증이 물씬 올라왔다.
위병소를 쳐다보자, 한 아저씨가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사과했다.
“하….”
타중대 아저씨라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 때, 소대장님한테 무전이 왔다.
“… 예, 알겠습니다.”
기왕 나온 김에 상황 훈련이나 하고 들어가자고 하신다.
하….
꼬일려고 하면 참 더럽게 꼬이나보다.
상황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싸지방에 살짝 들렸다.
생각해보니 SNS도 제대로 못 꺼놓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디야 뭐 어차피 다음 사람이 쓰면서 로그아웃하겠지만, 그래도 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소대장님, 흡연 좀 하고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네가 애들 잘 인솔해서 올라와라. 고생했다.”
“예, 충성.”
담배를 피는 애들이 모여서 흡연장으로 가는 걸 보며 나는 슬쩍 빠져 싸지방으로 향했다.
내가 컴퓨터를 하던 자리는 아무도 안 앉고, 여전히 비어있었다.
‘… 별일이네.’
하지만 컴퓨터는 이미 꺼져있는 걸 보고, 그냥 뒤돌아섰다.
누나한테 해명이라도 해야할까 싶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 나중에 다시 해명해야지.’
다음에 연락하게 되면 그냥 이거 너무 불편하니깐 전화하면 안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그 때, 내가 조금 멍청했다.
밖으로 나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alt + f4 한 번 누를 시간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 내 SNS 채팅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그냥 알아서 꺼줄거라 믿었다.
올라가면서 퇴근하는 광수 형을 마주쳤을 때도 그냥 집으로 갈 줄 알았다.
설마 하필이면 광수 형이 내 컴퓨터를 꺼주기 위해 싸지방으로 들어갔다가 SNS 메시지를 보고, 지혜와 약속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나.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