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13. 동거 - (5)
“원래 손님 찾아오면 집주인은 그냥 앉아있는 게 맞아요.”
“… 네.”
어머님이 나를 못 일어나게 막으시자,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으로 식탁에 앉았다.
그 때, 지혜가 물과 과일을 몇 개 깎아서 꺼내왔다.
“자, 엄마.”
“아빠나 갖다드려.”
“어. 너무 괴롭히지 말고.”
“얘는.”
지혜가 쟁반을 들고 아버님에게 향하자, 나는 주방의 식탁에 어머님과 단 둘이 남았다.
어머님이 지혜가 깎아든 사과를 건네주시며 말했다.
“좀 들어요.”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조금 드시시죠….”
“나는 괜찮아요.”
“… 네.”
내가 사과를 한 입 베어물자, 어머님이 나를 바라보며 질문하셨다.
“… 그래서 어때요?”
“네?”
“지혜가 잘 해줘요? 난 좀 걱정되던데.”
“아, 네. 엄청 잘해줍니다.”
“애가 많이 안 괴롭히고요? 성격이 좀 요란해서 걱정되던데.”
“아… 아닙니다. 전혀요.”
“혹시나 괴롭히면 말해요. 내가 혼내줄게요.”
“… 네.”
지혜의 어머님은 아까부터 계속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무심결에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어떻게든 견뎌냈다.
“하…,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흘려보기라도 하려고 노력하고 도중도중 목이 타서 물을 마셨지만, 그래도 어머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그냥 미소지은 채 나를 보고 계셨다.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먼저 물었다.
“저…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아니예요. 미안해요. 너무 궁금했거든요.”
“어떤 점이요…?”
“지혜가 하~도 자랑자랑하길래 궁금하더라고요. 어떤 남자애길래 우리 딸 아이가 그렇게 죽고 못 살까 싶어서.”
“엄마! 다 들리거든!”
“들으라고 하는 거거든, 이 년아!”
“…”
지혜와 어머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솔직하고, 과격했다.
등에 식은 땀이 흐를 것만 같던 찰나, 지혜의 손길이 내 어깨에 닿았다.
“그래서 어때? 괜찮지?”
“응, 좋다. 잘 생겼네.”
“히힛, 말했잖아. 정우도 얘기했고.”
“… 감사합니다.”
지혜 어머님이 내 손을 붙잡으시고는 나를 바라보셨다.
“지혜, 많이 사랑해요?”
“네. 많이 사랑합니다.”
“후훗…, 좋네. 그래요. 그거면 됐지, 뭐.”
어머님이 몇 번 내 손을 토닥이고는 다시 입을 여셨다.
“우리 지혜, 잘 부탁할게요.”
“… 네.”
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 인정 받은건가?’
머릿 속에서 이걸 기뻐해야할지말지 고민이 차오르던 와중.
갑자기 등 뒤에서 티비 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 했다, 공주.”
“벌써?”
“별 거 없다. 그냥 선만 연결하면 되지, 뭐.”
“다행이네.”
“자, 카드. 엄마랑 나가서 장 좀 보고 와라.”
“나도 나가라고?”
“그럼 네 앞에서 얘기할까?”
“… 나 나가야 돼, 엄마?”
“아빠가 말하잖아. 따라와.”
“아….”
…
지혜가 어머님의 손에 붙들려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눈이 향했다.
방금까지 전적으로 내 아군이었던 지혜가 사라지고,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흣~차.”
지혜 아버님이 한숨을 내쉬면서 내 앞에 마주 앉으셨다.
그리고 정우가 자연스레 아버님의 옆에 앉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 네.”
나는 뭘 시작한다는 얘긴지도 모르고 그냥 엉겁결에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아버님이 크게 숨을 들이키시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셨다.
“박성준…. 공대 다니고, 올해 졸업한다던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지혜보다는 5살 어리고…, 둘이 어떻게 만났어요?”
“그… 군대에서 아는 사람 통해 건너건너 알게 됐습니다.”
“그렇고…, 취직은 언제 하려고 그럽니까?”
“가능한 올해 내를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자격증 시험도 다 끝나고 이제 취업 면접 돌아다니면서….”
“오케이. 서울 쪽으로 볼라고요?”
“네. 그러려고 합니다.”
“합격할 자신은 있고요?”
“… 무조건 합격하려고 합니다.”
“음….”
아버님이 팔짱을 끼시고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렸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피식 웃으셨다.
“미안합니다. 이게 겁 줄라고 그러는 건 아닌데… 말이 계속 엇나가네요.”
“아…, 괜찮습니다.”
“이게… 그…. 딸 키우는 아버지 입장으로서 예쁘게 잘 키워놨더니만,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따님을 제게 주십쇼.’하면 내가 그냥 ‘예, 가져가십쇼.’ 이럴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 맞습니다.”
“… 우리 애 많이 좋아합니까?”
“… 예.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결혼 생각하는 것도 맞고요? 괜히 우리 애가 혼자 설레발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나는 좀 걱정되기도 합디다.”
“… 아닙니다. 지혜와도 여러번 얘기 나눴고, 저는 언제든지 일자리가 안정되기만 하면 결혼하고 싶습니다.”
“…”
탁. 탁. 탁.
아버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시면서 고민에 빠지셨다.
그리고는 한참을 조용히 침묵하셨다.
그 기나긴 침묵 속에서 나는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췄다.
“… 지혜가 고집이 좀 세요.”
“네?”
“애가 어릴 때부터 지 맘에 드는 게 있으면 정우도 안 줄려고 하고, 아빠인 내한테도 안 주고. 항상 지가 지 손에 꼭 붙잡고 있드라고.”
“…”
“그래서 어차피 내 의견은 안 들을 거지만, 결혼이 또 그리 쉬운게 아니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좀 부탁할게요.”
아버님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시며 말했다.
“… 지혜, 잘 좀 부탁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다시 들자, 아버님이 씨익 웃었다.
“야구 좋아해요?”
“… 예, 관심 있습니다.”
“그래요? 누구 좋아하는데요? 대구 사람이라 그랬죠?”
“… 네.”
“쌍둥이랑 사자가 붙으면 누가 이깁니까?”
“… 쌍둥이가 이깁니다.”
“크크큭…, 지혜한테 미리 듣고 왔어요?”
“아… 아닙니다. 요즘 사자가 잘 못 해서….”
“술은 좀 합니까?”
“… 잘은 못 합니다. 하지만 주시면 다 받겠습니다.”
“그럼 이따 좀만 같이 마시면서 얘기 좀 합시다.”
“예.”
아버님이 일어나시자, 나도 따라 일어났다.
그러자 아버님이 나를 손으로 가로막으셨다.
“아아, 안 일어놔도 돼요. 밑에 가서 담배 좀 태우고 올테니깐, 거 앉아있어요.”
“… 예.”
아버님이 나가신 뒤, 나는 식탁의 의자에 축 늘어져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크크큭, 형. 힘들어요?”
“… 뒤지겠다.”
“아, 크크큭. 울 아버지 무섭죠?”
“… 좀 위엄 있으시네.”
“그럴까봐 내가 옆에 있었는데 별 도움은 안 됐나봐요?”
“너한테 눈이 가겠냐?”
정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버지가 형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얘기도 안 하고 바로 나가겠다 그랬거든요.”
“… 진짜?”
“네. 원래 아버지가 어지간하면 어머니 말 다 잘 들으시는데, 이번에는 어떻게든 둘이 따로 얘기하고 싶다고 내내 그러시더라고요.”
“…”
“그래도 잘 끝난 거 같네요, 매형.”
“하아…,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처남.”
“오~, 이제 진짜 불러도 돼요?”
“… 몰라. 아버님 앞에서나 부르지 마라.”
“크큭, 네.”
잠시 후, 지혜와 어머님이 아버님과 함께 올라왔다.
“고기 좀 사왔는데, 고기 좋아하죠?”
“아, 예. 물론입니다.”
“그럼 잠깐만 앉아있어요. 내가 금방 해줄게.”
그 후로 나는 내내 자리에 앉아, 도중도중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든 도울 일이 생길 때마다 잽싸게 달려나가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혜 어머님이 주시는 음식들을 다 하나씩 받아 먹었고, 가끔씩 아버님이 던지는 질문에 성실히 답하고, 마지막엔 술도 조금 마셨다.
사람이 정말 정신력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는데 종이컵 기준으로 소주 반 잔에 밤새 토했던 박성준은 사라지고, 아버님이 들고 오신 인삼주를 한 잔 마시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술로 정신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끝까지 대답하고, 결국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지혜의 가족은 집으로 돌아갔다.
“안녕히 가십쇼!”
“그래, 다음에 또 봐요.”
“다음에는 정식으로 인사하러 우리 집에 찾아와요, 알았죠?”
“형, 다음에 봐요~.”
“넵!”
멀어져가는 흰색의 SUV를 바라보며, 나는 지혜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마침내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 고생했어, 자기.”
“… 나 질문 잘 대답한 거 맞아?”
“그런 거 같든데? 아빠 되게 기분 좋아보이더라.”
“다행이네….”
“술은 괜찮아? 자기 얼굴 완전 빨간데.”
“… 솔직히 안 괜찮아. 지금도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 들려.”
“빨리 들어가서 좀 쉬어. 그러게 잘 하지도 못 하는 술을 왜 마셨어….”
“아니…, 아버님이 마시자고 하시니깐 거절은 못 하지.”
“아잇 참…, 내가 아빠한테 자기 술 못 마신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냐아냐, 괜찮아. 너무 그러지 마.”
“… 나한테 좀 기대. 자기 다리 흔들린다.”
“어.”
지혜에게 어깨를 빌리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참 폭풍 같은 하루였다.
홀린듯이 매트리스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자, 지혜가 내 옆에서 손으로 부채질하며 걱정해주었다.
“… 진짜 괜찮아? 얼굴 많이 빨간데.”
“응. 괜찮아…. 진짜로….”
“… 어땠어? 우리 가족?”
“음… 좋았어.”
술을 마셔서 그런지 웃음이 멎지 않았다.
나는 지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느꼈던 바를 그대로 얘기했다.
“아버님은 멋지시네…. 완전 상남자셔. 몸도 좋으시고, 말도 직선적이시고. 되게 멋있으시더라.”
“그래?”
“응. 어머님은 너랑 많이 닮았드라. 눈매도 되게 똑같고, 웃으시는 모습도 비슷하고, 요리 잘 하시고, 손길이 따스하고.”
“히힛, 자기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 좋네.”
“… 지혜야.”
“응?”
“근데 왜 비밀로 했어?”
“뭘?”
나는 내내 신경쓰이던 질문을 그제서야 꺼냈다.
“아버님이 너 ‘공주’라고 부르던데?”
“… 어릴 때부터 그냥 그렇게 부르셨어.”
“크크큭, 예쁘네. 나도 앞으로 그렇게 불러줄까? 공주~.”
“야이씨…. 너 취했어, 어서 자.”
“안 취했는데에~.”
“뭐래, 혀도 풀리는 거 같다. 어서 누워.”
지혜가 베개를 받쳐주고는 나를 눕혔다.
“공주.”
“… 왜.”
“자기 전에 뽀뽀해줘.”
“공주의 뽀뽀는 원래 받으면 잠에서 깨는 거거든.”
지혜가 입술 대신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해줄게. 알았지?”
“… 약속이다?”
“응, 약속.”
“… 어.”
그제서야 한 시름 놓고, 나는 눈을 감았다.
꿈에서 공주님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지혜가 나왔다.
참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