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 143화 (143/201)

〈 143화 〉 143화

* * *

야왕 143화

“이 세상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어요.”

김유빈의 말에 이성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생명이 없는 것들 역시 흐름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어요.”

위스키를 쭉 들이킨 김유빈이 말을 잇는다.

“돈. 돈에도 흐름이 있어요.”

“그런가요?”

“네. 유독 심한 편이죠. 돈의 흐름은 언제나 막힘이 없어야 해요. 돈의 흐름이 막히면 경제가 붕괴하게 되죠. 그리고 한쪽으로 너무 흘러도 안되요. 경제의 불균형이 일어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 거예요.”

“앞의 말과 뒷 말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데요?”

김유빈은 사채업자다. 금융 실명제 이후 지하 금융이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한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요즘은 사채도 법정 이자 준수해요. 정당하게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선량한 사람들이란 말이죠. 다만 차용증에 명시하지 않은 대가가 오가긴하죠.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세게 받죠. 그렇게 번 돈으로 서민들에게 대출을 해 주고 있어요. 물론 이자는 조금 약한 편이죠.”

“좋은 일 하시네요.”

“좋아 봐야 돈놀이죠. 빨간치마. 참 우낀 별명이죠. 할머니가 일수를 시작했을 때 여자라고 무시한 사람들이 돈을 떼 먹어려고 했데요. 그래서 조금 강해 보이려고 빨간색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네요. 빨간치마 때문인지 마음의 다짐 때문인지 그때부터 할머니가 많이 독해지셨어요. 당신 돈 떼 먹는 사람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순간 빨간치마는 악독함의 상징이 되어 버렸죠.”

이성빈이 김유빈의 잔에 위스키를 채워준다. 지금까지 마신 위스키만 해도 다섯 병이나 된다. 그 중 반을 이성빈이 마셨다 해도 상당히 많은 양이다. 그럼에도 김유빈은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세요?”

이성빈이 고개를 흔든다.

“할머니에게 돈을 빌렸다 갚지 못해 회사가 부도난 사람이 집에 불을 질렀어요. 그때 저는 외할머니 댁에 있었고 할머니는 일을 하기 위해 밖에 계셨어요. 결국 부모님만 돌아가시게 되었죠. 그게 4살 때에요.”

이성빈이 앞에 놓인 잔을 비운다. 과일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말을 하던 김유빈이 입을 벌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다. 이성빈이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준다.

“평생 돈놀이만 하던 할머니는 어린아이를 잘 보지 못햇어요. 일년 정도 외할머니에게 절 맡겨 두셨죠. 그런데 외할머니 마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일을 할 때 그 옆에 제가 있었던 것이.”

사성 그룹이 돈을 빌릴 때 김유빈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그런 이유가 있었다.

김유빈의 표정이 좋지 않다. 미간 사이에 수심이 가득하다. 들추기 싫은 과거를 꺼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닌 듯하다.

“근심이 있으세요?”

“돈이라는 녀석이 독기가 아주 세요. 그 독기를 매일 같이 마주하고 있으니 근심이 없을 리가 없죠. 그것보다 저하고 동갑으로 알고 있는데 말 편하게 하면 안 될까요?”

“나쁘지 않지.”

손님에게는 말을 잘 낮추지 않는 편이지만 손님이 원하는 것이니 당연히 받아들인다.

“돈에 독기가 많다고?”

“당연하잖아. 돈이 가진 독기는 너무나도 지독해. 할머니 역시 그 독기 때문에 편안하게 돌아가시지 못했어.”

사물에 원념이 깃든다고 한다. 전생에서 사파의 무리들이 그런 나쁜 기운들을 이용해 술법을 펼치곤 했다. 그러니 돈이라고 해서 그런 것이 깃들지 말라는 법이 없다.

김유빈의 말을 듣고 보니 돈에 그런 원념이 깃들 일이 많을 것 같다. 돈 때문에 우는 이들이 어디 한 둘 이겠는가, 돈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이 한 둘 이겠는가.

“돈이 많아도 걱정이라는 말이네.”

“그래서 어떻게 버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하지. 할머니는 돈을 버는 법은 아셨지만 쓰는 법은 모르셨어. 그덕에 내가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았지만 할머니의 노년은 고통으로 얼룩져 버렸지.”

“그러는 너는 돈을 쓰는 법을 알고 있어?”

“일단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서민들에게 저금리 대출을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돈을 버는 일이야. 돈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전국에 고아원을 짓고, 돈이 없이 꿈을 포기하는 아이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고, 당장 먹을 한끼가 없는 이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도 운영해.”

“와우, 좋은 일 많이 하는구나.”

이성빈이 의외라는 듯 김유빈을 바라본다. 사회의 통념 때문인지 사채업자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성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사채업자들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 알아? 돈을 쓰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돈이 벌려. 고아원을 마치고 나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나를 돕고, 장학재단의 도움을 꿈을 이룬 아이들 역시 나를 도와.”

“당연한 결과잖아.”

“그런가? 최근에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어. 믿고 있던 사람들이 좋은 의미로 운영하는 곳에서 비리를 저지르고 있더라고. 그들 중에는 형제라 부를 수 있는 이들도 몇 명 있거든. 아­, 남들은 사채업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들 끼리는 상당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어. 아무튼 그 문제 때문에 생각이 많네.”

이성빈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떡을 만지는데 콩고물이 묻지 않을 리가 없지.”

“콩고물 정도라면 이해를 하지. 그 정도는 예상하고 일을 맡긴거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더 이상 콩고물이 만족하지 못하더라고.”

“떡까지 먹으려고 하는 구나.”

김유빈이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킨다. 잠시지만 그녀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온다.

‘살기.’

김유빈이 내공을 익혀 살기를 뿜어낼 리가 없다. 오랜시간 사람들을 다루는 높은 자리에 있으며 자연스럽게 몸에 벤 기운일 것이다.

“재산이 어느 정도나 돼?”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 이성빈이 묻는다.

“글쎄. 정확하게 집계를 해 본 적이 없네.”

집계를 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대기업들의 지분, 부동산 등에 투자한 것들이 많아서 정확히 추산하기가 쉽지 않아. 대략적 50조는 넘고 100조는 되지 않을 거야.”

“놀랍네. 개인이 그 정도의 돈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말이야.”

“미국의 명문들은 그 몇 배, 아니 몇 십 배의 재산을 가지고 있을걸.”

“그들은 가문이잖아. 너 정도 재산이라면 포브스지에 상위 랭크가 되어야 하지 않아?”

김유빈이 어깨를 으쓱한다.

“드러난 재산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참고로 나는 벌이가 없는 사람이야. 비영리단체의 수장이긴 하지만 무보수 직책이거든.”

“하하, 너 백조구나.”

“그런건가?”

김유빈과 건배한 후 위스키를 마신다. 조금 전까지 마시던 병이 모두 비어 새로운 병을 오픈했다. 한 병에 이백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위스키지만 김유빈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재산이 조단위로 있으니 몇 억 정도는 푼돈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넌 어때?”

“응?”

“걱정거리 없어?”

“걱정거리라…….”

이성빈이 생각에 잠긴다. 잠시 후, 이성빈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어떻게 사람이 걱정거리가 없을 수 있지? 어느 스님이 그랬잖아 사는 것 자체가 고해라고.”

“글세. 나는 잘 모르겠네. 내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든.”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내게 절대 만족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거든.”

“나와 네가 말하는 만족이 다른 의미일 테니까.”

이성빈은 진정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전생에는 없었던 가족이 생겼고 과거와의 인연도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실컷하며 살고 있다.

분명 이성빈에게도 욕심은 있다. 하지만 그 욕심이라는 것이 김유빈의 욕심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돈을 벌고 쓰는 것 이외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있어?”

“…….”

김유빈이 선뜻 말을 하지 못한다. 그녀에게도 취미생활이라 부르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해외여행을 다니고, 고가의 미술품을 모으고, 명품 쇼핑도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향해 있는 이성빈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말을 할 수 없었다.

“너는?”

“나? 많지. 지금 이렇게 너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도 나는 행복해. 일이 끝난 후 집에가서 휴식을 취할 때도 행복하고.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할 때도 행복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때도 행복하지.”

“그렇구나.”

김유빈의 할머니는 돈을 버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김유빈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김유빈은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산은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고작 5년 사이에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이룬 부를 배 이상 늘렸다는 뜻이다. 김유빈에게는 돈을 버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 재주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지금부터 스스로를 조금씩 바꿔봐. 그저 할머니처럼 되기 싫어서 고아원을 지속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

그녀라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 상황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는다. 재산이 50조가 넘는다. 그 많은 돈들이 여러 루트를 통해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관리하는 일은 하루가 서른 시간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모든 일을 네가 하려고 하지마. 사람을 잘 쓰는 것이 진정한 우두머리의 능력이야.”

“사람을 배신하게 만드는 것이 돈이야.”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짙게 물들어 있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다. 더욱이 가장 믿었던 이들이 자신을 속이고 비리를 저질렀으니 사람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도와줘?”

“응?”

“내가 도와 줄 수 있어.”

이성빈이라면 김유빈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그녀를 돕게 할 수 있다. 이성빈은 말 없이 김유빈의 대답을 기다렸다.

‘왜 이러지?’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처음 보는 이성빈에게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믿음이 갔다. 이성빈의 목소리, 눈빛이 그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김유빈이 갈증이 나는지 위스키를 들이킨 후 말한다.

“도와줘.”

**

하데스 클럽 내 이성빈 전용룸 침대.

이성빈이 김유빈을 안고 있다. 김유빈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관계를 갖은 후 수혈을 눌러 잠들게 한 것이다.

“으음­.”

이성빈의 품 속으로 파고든다.

“50조, 100조를 가지고 있으면 뭐하니?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는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행복한 삶을 사는데 돈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돈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두면 결국 잡아 먹히고 만다.

김유빈의 할머니가 그랬을 것이다.

김유빈을 꼭 안아준다. 봉긋한 가슴을 손으로 부드럽게 주무른다. 기분이 좋은지 김유빈이 가는 신음을 토해낸다. 그녀가 몸을 뒤척일 때 들린 이불 틈 사이로 비릿한 향기가 올라온다.

“처녀라니.”

놀랍게도 김유빈은 남자 경험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성빈이 속삭인다.

“좋은 꿈 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