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4화 전화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말을 주고 받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사들이 하루종일 말없이 혼자 다닐거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덤프는 차마다 무전기가 있어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도로나 현장상황을 공유한다. 기사들이 수다떠는 수단도 된다. 다만 수다가 심하면 사장은 싫어한다. 난 대화에 안끼고 주로 듣고 있는 편이다. 입담 좋은 아저씨가 몇분 계셔서 듣고만 있어도 피식거릴 때가 많다.
내가 평소에 말을 잘 안한다지만 오늘은 누군가 옆에서 말동무 해주니 시간이 잘 갔다. 꼭 이쁜 여자라서가 아니였다.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즐거운 퇴근길이었다.
대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조금은 좁아진 길로 들어선 차는 얼마 후 목적지인 남영농원 에 도착했다. 나는 농원 입구에 차를 세우고 말했다.
"자 도착 했습니다 급하시다고 해서 빨리온다고 왔는데"
"예정보다 더 빨리 도착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매니저가 감사인사를 하며 내렸다. 매일 다니는 길이기에 워낙 익숙했다. 신호도 이리저리 잘 피해서 금방 왔다. 저 안에 눈부실 정도로 밝은 조명이 보이는거 보니 뭔가 촬영이 있는것 같았다.
"오빠 고마워요. 내가 다음에 은혜 꼭 갚을게요"
"감사합니다 오빠 덕분에 늦지 않았어요."
티나와 세미가 차례대로 내리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저 손을 흔들어주었다. 세명은 농원안으로 들어갔고 안에 있는 스탶들은 덤프트럭을 타고 나타난 출연자들과 그 매니저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하아...티비에서 보던 연예인과 한차를 탔다니.'
내 인생에 아마 두번 오지 않을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괜한 미련을 떨치고 입구에서 슬슬 차를 돌렸다. 몇번 앞뒤로 왔다갔다 해야했지만 그렇게 좁지 않아서 수월하게 돌릴 수 있었다.
"저기 기사님 잠깐만요"
거의 차를 다 돌려가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내린 매니저가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다.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었다.
"놓고 가신거라도 있어요?"
"아닙니다.그런게 아니라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제가 정신이 없는 나머지 기사님께 사례도 안 드리고 그냥 보낼 뻔 했군요."
"별거 아니에요 어차피 여기 오는 길이였어요"
"그래도 저희는 그러지 않죠. 당장은 뭘 해드릴 수는 없지만 연락처를
알려주신다면 나중에 꼭 사례하겠습니다."
순간 내 머리속에서 기껏만난 연예인에게 싸인을 안 받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으아 싸인받는거 까먹었다. 혹시 싸인시디라도 보내주려나 이왕이면 멤버 5명 싸인 다 들어가면 더 좋을텐데'
어쨌든 혹시 싸인시디를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짐짓 못이기는 척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에이 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싸인시디 부탁 드립니다. 꼭이요'
"아닙니다. 이렇게 큰 도움 주셨는데요. 저희 컴백 앞두고 어렵게 잡은 이 스케쥴이 펑크 났으면 정말 큰일 났을 겁니다. 기사님이 레몬로즈를 구해주신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걸로도 충분한걸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예 그럼 조심히 가세요.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군대 시절을 회상했다
선임 중에 걸그룹 매니아가 있었다. 군인들이 걸그룹 좋아하는거야 당연한건데 이 사람은 좀 달랐다. 보통은 각자 좋아하는 그룹이 있고, 그중에 또 좋아하는 멤버가 있다. 그래서 누가 더 낫네, 누가 더 인기 많네, 누가 더 이쁘네 하는 병림픽이 끊이지 않는다.
이 사람은 아니다 다 똑같이 좋아한다.
다 안다, 공부한다. 외운다.
다가 어느 정도냐고? 말 그대로 다, 전부, 올, 에브리바디.
최소한 음악방송에 나왔던 걸그룹, 그 멤버들은 다 외운다.
신상, 프로필은 기본이고 그외 다른 관련 정보들까지
어느 날 내가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가 대답했다
"그녀들이 각자의 아름다움과 끼와 재주로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데 이 정도는 기본 예의가 아니겠냐고"
대답을 듣고 속으로 '너 참 병신 지랄킹이다' 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병신같아도 선임인지라 대놓고 욕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아무말 없이 엄지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거짓말은 안했다.
어쨌든 그를 통해 하나 배운게 있다면 널리 걸그룹을 골고루 사랑하라는 아름다운 정신이다. 그 정도는 나도 공감했다. 어느새 그에게 감화된 내 자신을 보며 나도 내가 참 병신같다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 병신 맞다.
군대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정말 티비에 나오는 애들 다 이쁘다.
그치? 맞지? 그렇다고 해줘. 제발
군대 전역 후에는 군 생활 내내 그렇게 열심히 걸그룹을 보고 있었던게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방 관심이 사라졌다.위병소 밖의 나와 위병소 안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던 기분이 들었다. 제대를 하고 맞닥드린 현실에서는 먹고 사는게 더 급하고 바빴다.
지금은 형편이 나아졌다니만 인방 게임방송을 즐겨보느라 음악방송은 밀려난지 오래이다. 오늘 만난 티나와 세미도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은군대에서 봤을 때이다.
오랜만에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아 빨리 싸인시디 왔으면 좋겠다"
그 후 연락은 없었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아쉬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잊고 있었다.
물건을 싣기를 30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오늘 다른 현장이 문을 닫아 이쪽으로 차가 몰렸다
평소보다 차가 더 많다.
포크레인이 열심히 실어주고 있지만 오래 걸린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탕수가 얼마 안나온다.
나야 기사입장이니 사장한테 잔소리 좀 들으면 끝이지만 차주들은
할부생각에 속이 탈 것이다.
창문을 열고 담배 한대를 핀다
나 혼자 급해봤자 빨리 되지도 않는다
기다리는거 말고 방법이 없다
하늘이 우중충 하다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해보니 오늘 밤부터 비 예보가 있다
내일저녁까지 계속 비 예보다
내일 일 없을 수도 있겠네
"다음에 들을실 곡은 레몬로즈의 곡입니다. 저번주 레몬로즈가 1년만에 컴백을 해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레몬로즈란 단어에 다시금 그 때 일을 떠올린다.
한달이 지났다.
곧 있으면 컴백이라고 하더니 그때 이후 2주 정도 지나서 컴백을 했다.
라디오에서 레몬로즈라는 단어가 들리면 전보다 더 귀 기울이게 되는건 어쩔 수 없다.
살다보면 듣는 빈말이 참 많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조만간 보자'
'시간 날 때 술한잔 하자'
그때 매니저의 연락준다는 말은 이런 빈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기대를 아예 안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의외로 실망은 크지 않았다.
사실 연락 왔다 쳐도 어차피 매니저랑 몇마디 주고 받고 끝날 거, 까놓고 아쉬울 것도 없는게 사실 아니겠는가
다만 티나 세미가 정말 이뻤기에 또 보고 싶기는 했다.
군대 있을 때는 레몬로즈에게 이 정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
레몬로즈보다 더 좋아한 다른 아이돌도 있었다.
한번 스쳐간 인연이 있었기에 지금은 나도 모르게 뭔가 마음이 가나보다.
[레몬로즈는 피지 엔터테이먼트의 5인조 걸그룹이야. 피지엔터는 그전에 솔로가수, 3인조 남자아이돌을 데뷔시켰지만 둘다 망했어. 레몬로즈는 피지엔터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아이돌인데 덕분에 망하기 직전의 피지엔터가 가까스로 살아났지. 멤버는 니키,티나, 세미, 아인, 제이. 니키가 리더이자 맏이고 본명은....]
걸그룹 매니아 선임, 일명 그 인간이랑 같이 근무를 서면 이런 온갖
연예계 정보를 근무 시간내내 듣고 있어야 했다.
근무가 끝나도 쫓아와서 했다.
도망가면 따라와서 했다.
작업을 나가도, 담배타임에도 했다
나름 눈치는 있어서 훈련 때는 조용했다.
난 훈련이 좋았다
지긋지긋한 인간
이런 일대일 집중주입식 공부를 당하고 티비를 보면 왠지 알던
옆집 사람이 나오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게 된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고보면 정말 잘 보인다
그러니 공부하자
덕질도 공부해야 하는 시대다
♪사랑해 그 말 만큼은, 내 손을 잡은 그대 향해♪
전화가 울린다.
군대 있을 때 듣던 레몬로즈의 두번의 사랑이 내 벨소리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그날 이후 바꾼거 맞다.
사실 히트한 노래는 아니였지만 난 이노래가 좋았다
내 귀에 좋으면 좋은 노래다.
없는 번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땅있어서 전화드렸어요"
"관심 없습니다"
바로 전화를 끊었다.
계속 듣고 있어봐야 나뿐만 아니라 상대 시간도 뺏긴다.
관심 없으면 빨리 끊고 다른데 전화하게 해주는게 그 사람 도와주는거다
오늘도 하루가 끝났다
씻고 나오니 저녁 7시.
오늘은 막탕을 차고지에서 먼 곳으로 가서 평소보다 좀 늦었다
밥먹고 좀 있으면 잘 시간이다
앞자리에 줄을 서려면 새벽 3,4시에는 현장 앞에 가야한다.
그러면 포크레인 기사가 6시에서 7시 사이에 나와 일을 시작한다.
늦게 가면 싣는데 한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하루가 참 긴 직업이다.
요즘은 편의점 도시락들이 참 잘나와서 다행이다.
집에서 한끼 먹는데 해먹기가 참 애매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가 많지도 않다
가끔 쉬는 날에는 찌개도 끓이고 밥도 하고 하지만 보통은 대부분 도시락으로 떼운다
확실히 내가 하는거보다 도시락이 더 맛있다
♪사랑해 그 말 만큼은, 내 손을 잡은 그대 향해♪
배가 부르니 슬슬 졸음이 몰려온다.
자기 위해 불을 끄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전에 레몬로즈 태워주셨던 기사님이시죠?"
응? 이제와서 전화를..
"예 맞는데요"
"전 피지 엔터테인먼트의 나주용이라고 합니다 그때 있던 "
그 남자 매니저구나
"아 네 안녕하세요"
"먼저 연락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별 생각도 없었어요"
정말이다.
"그 때 제가 성함을 못들었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러고보니 내가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구나
괜찮아 나도 저 남자 이름 몰랐어
"신재윤입니다"
"예 신재윤씨. 저희가 늦게 연락드린게죄송하기도 하니 유선상으로만 말씀을 드리는거 보다 자리를 마련하고 얼굴을 뵙고 싶은데 언제쯤 시간이 되시는지요?"
무슨 얼굴을 보자고 해 그냥 싸인시디나 줘
"아이고. 아니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너무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신재윤씨가 도와주셔서 녹화했던 그때 그 방송이 잘되서 이번 활동 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제가 일도 바쁘고 해서.."
"핑계로 들리시겠지만, 전화가 늦어지게 된 것도 직접 얼굴을 뵈려고 했는데 저희쪽에서 시간이 너무 없어 맞추다 보니 이렇게 된거거든요."
"진짜 괜찮은데......"
"언제쯤 시간이 되시는지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 참 끈질긴 사람이다.
평일은 물론 토요일에도 일한다 시간이 없다
쉬는 날은 일요일 혹은 비오는 날이다.
오늘은 목요일. 아직 이번주 일요일 계획은 없다
"정 그러시겠다면 이번주 일요일이 괜찮습니다"
"그럼일요일 오후 1시에 이태원 어떠십니까 정확한 위치는 제가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멀다.
맛있는거 많은 동네라서 기대는 된다.
"뭐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네"
오후 1시면 밥이라도 사주려고 그러나 보다
맛있는거 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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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다.
오늘은 약속이 있다.
회사 단체 회식이후 오랜만의 약속이다.
쉬는 날에도 새벽에 일어난다.
정말 어쩔 수 없다.
좋아 오늘은 이 밤을 불태워 보겠어 하며 다짐해도 저녁 8시가 넘어가면 자동으로 눈이 감긴다.
눈을 떠보니 새벽 3시다.
정말 푹 잤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신다.
차가운 냉수한잔에 정신이 깨어난다.
가볍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매일 운전만하면 운동부족에 시달린다.
그래서 쉬는 날 새벽에는 동네 하천가에 가서 무작정 뛴다.
뛰다가 날이 밝아오면 헤븐김밥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는 가까운 산을 오른다.
높은 산이 아니여서 올랐다 내려오는데 얼마 안걸린다.
산에서 내려오면 찜질방으로 가 일주일간 쌓인 피로를 푼다.
남들은 찜질방에서 하루종일 있을 수 있다는데 난 그렇게는 못한다
그냥 두시간 정도 있다가 온다.
집에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고 낮잠을 한숨 시원하게 잔다.
낮잠에서 일어나면 빨래를 널고, 밥을 먹고,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게임방송을 보거나. 어둠의 경로를 통해 야동을 탐색한다.
그러다 배고파지면 밥 먹는다.
내가 보통의 쉬는 날을 보내는 방법이다.
산에 갔다가 찜질방까지 들리고 돌아오니 10시가 좀 안됐다
평소에는 좀 더 늦지만 오늘은 1시에 약속이라 서둘렀다.
집에 오자마자 세탁기를 돌린다.
나주용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 매니저가 약속장소라고 보내준 주소를 검색해보니 식당이 아니라서 살짝 불안해졌다.
카페도 아니다.
대체 뭐 하려고 보자는걸까
멍하니 세탁기 돌아가는걸 보고 있는데 살짝 배가 고파온다.
이거 뭐라도 먹어야 하나 참아야 하나 애매해다
우유 한잔으로 속을 달래본다
입고 나갈 옷을 고른다.
음 마땅한게 없다. 심각하게 없다.
청바지와 카라 반팔티를 입는다.
그래 이게 최선이다.
아리따운 여인네도 아니고 아저씨 만나러 가는데 꾸밀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꾸미고 살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꾸미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마땅한 신발도 없다.
내가 아무리 꾸미는거에 관심이 없었다지만 좀 심했구나 반성한다.
가장 멀쩡한 신발이 뭔가 찾아보니 운동화이다.
에이 몰라 그냥 신어
차마 그대로 신을 수 없어 걸레로 먼지와 더러운 부분을 닦아낸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 얼른 빨래를 널고 시계를 본다 11시가 좀 넘었다.
"이거 좀 늦을 수도 있겠는데"
서둘러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