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화 너무 익숙해졌어
첫 공식 스케쥴이고, 기자한테 잘 부탁한다고 인사도 할 겸 나도 같이 가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가장 먼저 끝낸 나는 이리저리 바쁘게 준비를 하는 리드레아를 재촉했다.
"빨리빨리 준비해. 밑에서 황 코디 기다려"
"날이 갈수록 잔소리가 늘어!"
니키가 슬쩍 째려본다.
유일하게 나와 동갑이 만큼 불만을 가장 솔직하게 말하는게 니키다.
나한테는 숨기고 있지만, 리더이자 맏언니로서 동생들이 말 못하는걸 대신 말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얘네들과 살다보니 잔소리가 늘어난 건 맞지만 따지고 보면 운동, 다이어트등 다 일과 관려된 잔소리지 사적인거 가지고는 뭐라고 한적이 없다.
사장입장이 다 그런거지 뭐
솔직히 말 가려하라는 것도 포기한 이 마당에 사적으로는 더 이상 할말도 없어
"네가 내 입장 되봐라. 잔소리 안하겠나"
"그만해. 재윤아 너 먼저 내려가. 애들은 내가 빨리 보낼께"
오늘도 누나는 애들을 챙기느라 바쁘다.
누나가 애들과 같이 사는 명목은 사감이지만, 어째 실제 하는 일은 밥 해주고 뒷바라지 해주는 식모살이에 가깝게 되버렸다.
나이 30에 20살 넘은 애들 뒷바라지 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미안하다.
"나 먼저 내려가 있을께"
꼭 같이 내려가야 할 이유는 없기에, 일단 나 부터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가 짧은 복도를 지나면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을 열고 나가야 비로소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내려가 3층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 또 다시 문이 나온다.
3층에서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어락에 지문과패스워드를 찍고 들어가야 한다.
거주자 외에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한 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3층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이곳에 출입 가능한 건 실거주자인 나, 누나, 리드레아, 연습생들 뿐이다.
심지어 나이사님도 혼자서는 이 문을 통과 못한다.
14명의 젊은 여자들이 사는 곳이라 안전을 위해 보안 만큼은 정말 제대로 신경 썼다.
출근하는데 걸린시간 약 30초.
가까운 만큼 아침이 여유롭고 편해서 좋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3층 휴게실을 들어가니 황윤정 코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 머리에 160cm정도의 키. 오밀조밀한 인상의 황윤정은 올해 24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 학원을 다닌 후 다른 기획사에서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로 2년간 일 했던 경험이 있다.
경력도 짧고 나이도 어린편인 황윤정을 코디로 뽑은건 사실상파격적인 인사였지만, 그녀가 보여준 포트폴리오와 면접시 인상이 맘에 들어 뽑았다.
연예계 경력 제로인 내가 사장 노릇하는 마당에 신입, 경력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누차 말하지만,내 감 하나 믿고 이러고 있다.
괜찮다는 느낌이 온다면뽑는게 맞다.
이걸 부정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이 뻘짓, 돈지랄이라는게 되어 버린다.
"좋은 아침입니다. 애들은 아직 안내려왔나요?"
나는 그녀에게 리드레아의 소식을 모른다는 듯 물었다.
공식적, 대외적으로 4층에는 리드레아, 옥탑방에는 내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직원이라도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이기에 이렇게 사소한 데에서도 신경써야 한다.
따로 사는 척하기 참 힘들다.
"방금 내려온다고 연락왔어요"
내가 내려오는동안 연락이 왔는지 황 코디는 그다지 조급한 기색이 아니였다.
시간상으로는 아직 여유가 있기도 하고.
"우리 회사 온지 이제 3주 정도 됐는데 어때요?"
사장이 직원에게 이런 질문하면 답정너 소리 듣겠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억지로 꺼낸 말이었다.
"네 신생 답지 않게 시설도 좋고, 복리후생이 맘에 들어요. 큰데 아니면 교통비 제대로 챙겨주는데도 별로 없거든요."
연예계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력 짧은 코디는 불규칙한 생활과 박봉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우리회사 오기전에 어시스턴트로 일했으니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 회사에서 와서야 비로서 처음으로 책임자가 되었으니 이전 생활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긴 했을거다.
"의상 제작은 어떻게 되가요?"
"이번 주 중으로 나올거에요. 나오는대로 피팅 하고 수선하거나 바꿔야 할 곳 있으면 할거에요."
다음달이면 드디어 자켓사진과 뮤비 촬영에 들어간다.
저번 주에 황 코디의 기획안에 따라 최종 의상안을 내가 승인했고, 바로 의상 제작을 맡겼다.
일정 딜레이 없이 순조로운 편이지만, 모든게 처음인 만큼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네. 저 그리고..."
황 코디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말씀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되요. 제가 더 어리기도 하고.."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직원들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나는 직원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듣고보니 직원들 중 나보다 어린 사람이 황코디 한명이 있긴 했다.
"그럼...그, 그럴까?"
"네"
저렇게 밝게 웃는거 보니 나한테 존댓말 듣는게 많이 불편했나 보네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명절날 귀찮게 하는 친척아저씨처럼 꼬치꼬치 캐물을게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시스턴트 구하는건어떻게 되가?"
"학원 후배들 중에 이쪽에 관심있는 사람들 위주로 알아보고 있어요."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으니 코디 한명 뿐이지만,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한명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시스턴트가 꼭 필요하다.
그래서 황코디에게 같이 일할 사람이니 직접 찾아보라고 말해 놓은 상태이다.
"재촉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빨리 뽑는게 좋을거야. 황 코디 혼자 5명 의상 다 챙기기 쉽지 않잖아."
나는 황 코디가 리드레아가 오늘 입을 옷 5벌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닌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샵에 전화를 하고, 발로 뛰어다니며 협찬을 청해서 저 옷 5벌을 구해 온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은 코디가 자기 능력껏 샵과 딜을 하고, 실제 픽업하고 다시 반납하고 하는 등의 업무들은 어시스턴트가 한다.
"저희 회사가 다른 곳보다 어시스턴트 대우가 좋은 편이라 오고 싶다는 사람이 꽤 있어요. 조만간 결정할거에요"
밖에서 뛰어다닐 일이 많은 어시스턴트는 제대로 대우도 못 받는다.
월급받아 교통비로 다쓴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나는 교통비와 업무로 인해 밖에서 끼니를 해결 할때의 식비 정도는 대준다고 말해 놓았다.
이 정도만 해도 업계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다.
과장 좀 보태면 줄을 서고 서로 들어오려고 할 정도다.
열정페이란 말이 처음 화제가 되었던게 디자인 업계의 열악함 때문이었을 정도로, 이쪽 분야 신입들의 대우는 매우 안 좋은 편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즈음 리드레아가 들어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리드레아는 황코디를 보자마자 오늘 나를 처음 본 냥 인사를 했다.
연예계 짬밥 먹을만큼 먹은 애들이라 눈치와 분위기 파악은 확실하다는거다.
문득 누나랑사귀는거 다른 사람들은 모를거라고 생각한게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내가 혼자 바보짓 한거였지
"이건 니키 언니거고, 이건 아인이거 저기 저쪽이 제이랑 티나, 이건 세미"
황 코디가 휴게실 한켠에 놓여 있는 옷들을 가리키며 각자의 옷을 알려준다.
"사장님.....저기....."
각자가 자기 옷을 살피며, 이리저리 몸에 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나를 황코디가 조용히 불렀다.
"응?"
"이제 옷 갈아 입어야....."
"아! 알았어."
나는 서둘러 휴게실을 나섰다.
문을 닫는 동안 휴게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소라면 저것들이 또! 라고 할 테지만 이번에는 내가 잘못 한거라 할 말이 없다.
"큰일이야. 우리집 생활에 너무 익숙해졌어"
매일 밤낮을 마음대로 만지고 보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애들이 옷 갈아입는 동안 비켜줄 생각을 못했다.
"후우..정신 바싹 차려야겠다. 다른 사람들이 실수할까 걱정했는데 이러다가 내가 먼저 실수하겠어"
나는 찬바람을 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11월도 중순에 접어들어 이제 완연한 겨울 날씨다.
주차장을 가보니 검정색의 리무진 밴이 보인다.
이번에 새로 뽑은 리드레아가 이용할 차다.
밴 주위에는 건장한 남성 한명이 마른 걸레를 들고 차를 닦고 있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다가가자 차를 닦던 이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나에게 인사를 한다.
그의 이름은 최경식, 올해 27살로 이번에 들어온 리드레아의 로드매니저다.
다른 회사에서 로드매니저를 하던 사람을 나이사님이 데려온 것이다.
피지엔터에 있던 시절 나이사님이 방송국을 다닐 때, 다른 회사 사람이었지만 조용히 자기 일을 열심히하는게 인상 깊었다고 한다.
매니저는 싹싹하고 붙임성 있어야 하는 편이 좋긴하지만, 그는 조금은 무뚝뚝한 성격이다.
어차피 당장은 외부와가장많이 이야기를 해야 할 팀장 매니저로 쓰는 것도 아니기에 자기 할 일만 잘해준다면 나야 상관없다.
"차는 어때요? 전에 몰던 차가 아니라서 처음엔 적응 좀 해야 할텐데"
"이사님이랑 가까운 거리 몇번 다녀봤는데 괜찮았어요. 전에 있던 회사에서 몰던 차랑 비슷한데다 최신형이라 그런지 편해요."
그러고 보니 전에 있던 회사에서는 7인조 걸그룹 로드매니저였다고 그랬지.
리드레아는 5인조지만, 코디랑 매니저들까지 생각해서 좀 여유있는 사이즈로 뽑았으니 비슷하긴 하겠네
처음 이 차가 나왔을 때 나도 몰아봤었다.
나 몇달 전까지 덤프 몰던 사람이다.
이런 것 쯤은 식은 죽 먹기지
운전해보니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고, 내부가 넓직한 것이 좋긴 좋았다.
누가 운전만 대신 해준다면 내가 타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큰 차를 사는구나 싶었다.
"곧 애들 나올거에요. 준비는 다 된거죠?"
"네"
부우웅
차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나이사님 차가 주차장을 들어오고 있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나이사님은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지만, 옆에 최경식이 있으니 나에게 깎듯하게 인사를 한다.
나랑 리드레아, 나랑 나이사님.
새삼 다른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달라지는 상황이 많아서 헷갈린다.
스위치가 바로바로 잘 바뀌는 나이사님과 리드레아가 신기하다.
이게 바로 연예계 짬밥의 차이인가 싶다.
남자 셋이서 밖에서 잠시 기다리자 옷을 갈아입은 리드레아가 나왔다.
오랜만의 스케쥴이라 그런지 애들이 무척 신난거 같다.
지난 6월 레몬로즈로서의 마지막 활동 이후 행사 몇개 한거 외에 5개월 째 변변한 스케쥴이 없었다.
애들이 말을 안해서 그렇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쟤네가 섹스에 더 집착하는건가?'
여자들의 너무나도 빠른 진화 속도에 어떻게든 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여전히 정답을 모르겠다.
처음 누나의 경우는 30대의 성욕이라고 생각했는데, 쟤네를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일단은 즐기고 보자'
요즘 내 좌우명이 되어가는 포기하면 편해를 다시 한번 떠올리는 동안 리드레아와 황 코디가 밴에 올라 타는 것을 지켜 본 나이사님이 나에게 말했다.
"사장님은 제 차 타고 가시죠. 어차피 같이 움직이는데 차 두대 갈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래요 그럼"
"경식아 첫 스케쥴이야. 오늘 급한거 없으니까 살살 잘 몰아"
"네 걱정마세요 이사님"
앞서 출발하는 밴을 뒤따라 나이사님과 내가 출발했다.
출근시간이 지났기에 차는 막히는거 없이 잘 빠졌다.
"요즘 김중현은 어떻데요?"
우리가 김중현에게 엿 먹은지 일주일 정도가 되었다.
그날 나이사님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지만, 김중현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않고 그저 이런 저런 이야기만하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
"별거 없어. 그냥 룸 열심히 다니나봐."
심드렁하게 말하는 나이사님이지만, 속에 쌓인게 있다는걸 알고 있다.
요즘 그가 틈만 나면 김중현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갚아주려고 벼르고 있다는거다.
"사장이란 무슨 관계인지 나온건 있어요?"
"기자들은 아는 거 같은 눈치인데 말을 안해. 별 것도 아닌 일에 끼기 싫다는거지. 기자들도 처음엔 김중현이 나대니까 관심 좀 가졌다가, 한달째 룸만 다니고 있어서 관심 끊었어. 까놓고 말해서 기자들도 기획사한테 접대 받는데 김중현 건 가지고 기사 쓰면똥 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되버리니까"
하여간 이 놈의 세상.
이 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아.
김중현에 대해 개인적으로 감정이 안 좋은 나이사님은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아쉬운거 같지만, 내 입장에서 김중현이 룸 접대만 받으며 산다니 솔직히 다행이다.
아니, 기특할 정도다.
앞으로도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하고 살아라. 제발.
그래서 그런지 저번주까지만 해도 갑질 심하다 불만이었던 기획사들도 이제 적응했나 보다.
내 분노게이지를 올려 의욕을 불태우게 해줘야 할 빌런이 약해진 기분이 들어 힘이 빠지긴 하지만, 괜히 이상하게꼬여서 골치 아픈거 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낫지.
"우리같이 가엾고 힘없는 기획사들만 이놈저놈한테 다 기어야 하는 신세네요"
"그래야지 어쩌겠나. 억울하면 함부로 건들지 못할 스타 하나 키워야지."
스타가 있으면 정말 아무도못건드나?
스타라도 한순간에 훅 가는걸 많이 봤던지라 궁금해진다.
"회사에 그런 연예인 있으면 정말 PD나 기자들도 건들지 못해요?"
"신 사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걸 그렇게 고대로 듣나. 아무도 못 건드는건 아니고 좀 편해지긴 해. 탑스타들은 PD들이 와서 자기 작품에 출연해 달라고 사정하는데 그렇게 작품이나 프로를 고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거지. 그래봤자 매니저 신세는 크게 나아지지도 않지만 끼워팔기라도 할 수 있잖아. 기자들은 뭐....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한데, 대체로 좋은 관계 유지하려고 하는 쪽이 더 많고."
나이사님의 장황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스타가 있으면 스케쥴에 목 매는건 줄어들지만, 전체적으로 지금 신세랑 달라지는건 딱히 없다는거다.
"에이...그럼 저희들은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요. 괜히 기대했네."
"스타 키울 자신은 있고?"
"없으면 이 짓 시작하지도 않았죠"
"듣고보니 그렇네. 하하하. 자네가 스타 많이 키워서 우리회사를 대형기획사로 만들어. 그럼 마음에 안드는 PD, 기자와 얼마든지 싸울 수 있어."
역시 대기업이나 대형이나 큰 곳이 최고구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먹이사슬 최정점은 기자인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쪽도 자기들 나름대로 힘든 점이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해보면 아쉬운 소리 가장 덜하고 사는 사람들 같다.
내가 인터뷰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오늘 기자 만나기 무서워지네.
말 실수라도 하면 큰일날거 같아.
정신줄 잘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