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65화 힘들게 사시네요 (65/425)



〈 65화 〉65화 힘들게 사시네요

'저기 온다'

7시가 좀 넘었을 때 김중현이 정문에 모습을나타냈다.
40살의 나이에 중간정도의 키. 특징이라고는 없는평범한 인상 그자체.
사진으로는 본 적 있지만, 실제 얼굴을 보는건 처음이다.

김중현은 오늘 나이사님이 빠진걸 아직 모르고, 내 얼굴도 모른다.
첫 인사를 잘해야 한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김중현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네네. 그런데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 자기에게 인사를 하는데도 조금 의아해  뿐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다.
아무래도 매니저들의 갑작스런 인사를 많이 받아봤나보다.

"처음 뵙겠습니다. BICA ENT.의 사장신재윤입니다. 저희 회사 나주용 이사의 소개로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아 나팀장, 아니 나이사네 회사 사장님이셨구나.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인지 몰랐네. 저번에 보기로 해놓고  본건 미안해."

말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초면부터 말 놓고 있는 주제에 미안하다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하겠는가.
나는 첫인상부터 그가 어지간히 기획사 사람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나이사가 안보이네? 어디 갔어?"

"조금 전까지 저와 같이 있었는데 오늘 집에 큰일이 생겨서 급히 돌아갔습니다"

"큰 일? 무슨  일? 나랑 약속해놓고 말도 못하고 돌아갈 만큼 큰 일이면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한건가?"

'와....이 새끼 듣던거보다  씨발새끼네.'

김중현은 10년동안 프로그램  말아먹고 성격도 개차반이라 예능국 내에서도 개무시 당하고 살았다.
사실 피디입사면 프로그램이 잘 안 된다해도 어느 정도 힘은 쓴다.
자기는 잘 안되더라도 동기와 선후배 피디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그가 무시 당했다는건 그의 동기들 부터 선후배까지  그를 싫어한다는거다.

하도 개무시당하는게 불쌍해서 나이사님이 자기라도 챙겨준거라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기사회생으로 최근에 음방 하나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거만하기가 아주 하늘을 찌른다.
거액에 스카우트  스타PD들도 이 정도는 아닐거다,

전에 나이사님이 김중현에 대한 소문을 전하면서 미쳐 날뛴다고 했는데 정말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애써 지은 웃음을 유지하며 그에게 말했다.

"아이가 다쳐서 병원에 갔다는 연락이 와서요. 그래서 제가 급히 집으로가라고 보냈습니다. "

"나팀장도 보기와는 다르게  극성이구만. 애들이 원래 다치면서 크고 그런거지 겨우 그거 가지고 말야."

나이사님이 말한 가슴에 참을 인(忍)자를 천개 만개 새기라는 의미가 무슨말인지 이제야 알것 같았다.

'참자 참자 참자. 참아야 해. 참을 인(忍), 참을 인(忍) '

나는 속으로 참을 인(忍)자를 새기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이사가 피디님께 죄송하다는걸 제가 대신 충분히 기분 풀리실  있게 최대한 대접해드린다고 말하고 보냈습니다."

"그래? 그럼 한번 기대해볼께. 사장이라고 그랬지? 할 말도 있었는데 차라리 잘됐어. 이사보다 사장이 낫지."

탐탁치는 않지만, 그래도 이해한다면 잘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게 찝찝한 기분이 든다.

벌써부터 어떻게 하면  새끼하고  엮이고 살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우리에게 용건이 있다면 당분간 도망다니긴 힘들다.
그럴려면 정말 탑뮤직 포기할 각오하고 까야한다.

"오늘 탑뮤직 팀 전체 회식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분들은  보이시네요?"

인사를 나누는 김중현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 뿐인거 같았다.
내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먼저 올라가 있을 수도 있기에 일행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전체 회식? 아냐아냐.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작가들이랑 저녁이나 먹으려는거야. 요즘 시대가 엄한 시대라  혼자 여자작가들만 데리고 와서 저녁 먹는다고 하면 주위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저번에 약속 못 지킨거 사과도 하고, 작가들하고 인사도 시켜줄 겸 해서 나이사를 부른거였지"

'하....씨발...'

미안한거 사과할  인사를 시켜준다고 해서 최소한 조연출이나 각 파트 파트장은 될  알았다.
하다못해 갓 입사한 막내 피디라도 데려올 줄 알았다.
그래서 전체 회식비를 우리가 감당하고도 잘만 하면 나쁘지만은 않을거라 생각한거다.
막내 피디라도 시간이 흐르면 한 프로의 책임 프로듀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작가들이란다.
드라마 작가도 아니고, 다른 예능프로 작가도 아니다.
음방 작가면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영향력이 많다고 볼 수 없다.
예능에서 오래 잔뼈가 굵은 작가라면 섭외에서 제법 힘을 쓰긴 하지만, 음방에서 작가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친해진다면 어느정도 얻을 수 있는게 생기긴 하지만, 노력에 비해서는 많지는 않다.

더군다나 방송국 작가들은 대부분 프리랜서 이기에 프로그램, 피디에 따라 일이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메인작가를 제외하면 당장 자기들이 살아남는 것도 장담 못하는 참에 다른 사람들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다.

너무 계산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우리가 남들 밥먹는 자리에 이렇게 끌려다닐 이유가 없는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한가지 의문은 남아있었다.
작가들이랑만  먹는게 눈치 보이면 다른 스탶을 부르면 될 걸 외부인인 우리를 부른 이유였다

눈치가 보이면 많고 많은 남자스탶들 중 한두명을 더 데려오면 된다.
설마 그 한 두명 저녁값 아끼겠다고 우리를 부른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일행이 안보이는데 나중에 오나요? 아님 먼저 식당에 가 있나요?"

"금방 올거야. 아 저기 오네"

김중현이 가리키는 곳에 여성 2명이 정문을 들어고 있었다.
한명은 20대 중반에 좀 날카롭고 차가워보이는 인상이었고, 한명은 20대 초반의 순해보이는 인상이었다.

호텔에서의 저녁식사인데 다들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그녀들의 표정에서 바로 알아챘다.

'저 사람들도 억지로 끌려온거네'

김중현은 기획사 사람들에게 갑질 하듯 안에서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거 같았다.
그녀들이 오자 김중현이 나를 소개했다

"이 쪽은그.... 어디라고 그랬지? 비카? 레몬로즈가 옮긴 회사 사장"

성의없기 소개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내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BICA ENT. 사장 신재윤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전시연이라고 해요. 탑뮤직 서브작가하고 있죠. 얘는 공나민이고 우리 막내죠. 그런데 사장님이 여긴 어쩐일이시죠?"

공나민이라는 여자는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떡할 뿐이고, 전시연이란여자가 물었다.
그녀의 말투는 차가운인상처럼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김중현에 대한 감정이 안 좋으니 그가 부른 나도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중현이 대체 방송국에서 무슨짓을 하고 다니길래 작가들이 나까지 경계하는지 궁금해졌다.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안에서 더 심하게 새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전 작가가 다른 사람들 시선 때문에 나만 있으면 그렇다고 해서이 사람 부른거야."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중현이 먼저 그녀에게 말했다.

작가들은 그 설명을 듣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거 같았지만, 차마 뱉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다른데 가려고 했는데 전 작가가 여기가 좋다고 해서 온 거잖아. 그러니 어서 가자고."

혼자만 기분이 좋아보이는 김중현의 뒤로 표정이 안 좋은 이들 셋이 뒤를 따랐다

식사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들은 음식을 가져온다며 한참 동안 사라지기 일쑤였고, 김중현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만이 힘겹게 상대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 신사장 젊은 사람이 아주 말이 잘 통해"

"이게  김피디님 감각이 젊으셔서 그런거죠.  그냥 평소 대로 말할 뿐입니다."

"나이사가 없어서 심심할 줄 알았는데 신사장이 더 낫네. 역시 사장이 다르긴 달라. 그러니 나이사는 그 나이먹고 아직도 매니저 노릇하지. 이사만 달면 뭐해. 다른 사람들은 다 사무실에서 뒷짐지고 있는데 말야"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돈이 전부가 아니긴 하지만서도, 내 쌈짓돈 통장에 있는 돈이  사람 전재산보다  많을거 같은데 그깟 음방하나가 뭐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지 참.....

'먼저 간 나이사님이 미안해하지 않게 잘 하겠다고 다짐해서 내가 가만 있는  알아라. 안 그랬으면 벌써 테이블 엎었다.'

혼자 웃고 있는 김중현을 보며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나이사님이 말한 참을 인자 천개 만개를 떠올리며 참았다.

"모처럼 재밌네. 다른 사람은 무조건 네네만 해서재미가 없어. 우리 앞으로도 자주 좀 보자고."

김중현은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를 저렇게 태연하게 한다.
속으로 앞으로 되도록 안 보는 방법을 최대한 생각 중인데 앞으로 자주 보자고 하는거 보니 오늘도 내 아부스킬이 필요 이상으로 빛을 발한거 같다.

아부 잘하는건 좋은데 아직 재능을 깨우친지 얼마 안되서 적당히가 잘 안되는거 같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테니까 어디가지 말고 다들 여기 있어."

3차에서 술에 떡이  부장이나 할 법한 대사를 남기고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저런 대사를 날리는 거보니 어지간히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망가면 저러나 싶었다.

지금도 개같은데 술 취하면 얼마나 지랄을 떨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산전수전  겪은 매니저들도 치를 떨 정도라고하던데......

식사를 하며 술도 조금 마셨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김중현이 살짝 비틀 거린다.
조금 취한 듯 싶어 같이 가 줄까하다가 가다 넘어져서 어디 다치기라도 한다면  속이 편할거 같아 그냥 모른척했다.

"후우......"

나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분위기 맞춰주느라 너무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그동안 말 한마디 없던 전시연이란 여자가 나를째려보며 말했다.

"재밌게 잘 지내시던데 왠 한숨이에요?"

"제가 즐거워 보이나요? 다 먹고 살자고 이러는거죠."

"참 힘들게사시네요"

비웃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하면 친하게 지내보려고 했지만, 먼저 건든 이상 내가 작가한테까지 참아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여기 있기 싫은데도 있는거 다 티나는구만. 오히려 저한테 고마워하세요. 제가 혼자 다 상대하니까 그쪽으로는 말도 안 걸잖아요"

"저희는 매일 저 새끼 얼굴 봐요"

저러니 할말이 없다.
확실히 저쪽 고생이 더 심하다.
오늘 처음 본 나한테 김중현을 저 새끼라고  정도면 전시연도 쌓인게 엄청 많다는거다.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지금 한시간 얘기하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매일 저 새끼 얼굴 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아. 그쪽이 고생  많은거 맞네요"

"어휴. 저 새끼가 얘한테 찝쩍거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자리 오지도 않았는데"

"네?"

"저 발정난 개새끼가 나민이한테 자꾸 저녁먹자, 휴일날 보자 연락한대잖아요. 그동안은 힘들게 거절했었는데, 오늘은 거의 반협박으로 억지로 약속 잡았대요. 제가 그거 알고 억지로저까지 오겠다고 한 다음에 여자들끼리 책임피디랑 밥먹으면 소문 이상할거라고 해서 깨버릴려고 한거죠. 그러니까 그 새끼가 댁을 불러온거에요. 멀리 안가고 굳이 여의도에서 먹자고 한 것도 여기는 방송국에서 가까운 만큼 보는 눈이 많으니까 고른거였구요"

전시연은 어디가서 말도 못하고 쌓인게 많았는지, 나에게 모든 사연을 다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갑자기여의도로 장소가 바뀐 이유와 김중현이 다른 남자스탶이 아닌 우리를 부른 이유를 알거 같았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막내 작가에게 찝쩍거리기는 힘들다.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침  말도 있고 만만한 나이사님을 부른 것이다.

"김중현 피디 정도면 방송국에서도 문제 많을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안합니까?"

"사장 빽인거 아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국장이나 CP나 트집 잡힐까봐 피하느라 바쁜데. 그러니 저 새끼가 날이 갈 수록 미쳐가죠. 메인작가란 년은 막내가 이런 취급 받는데 지 밥그릇 날라갈까봐 모른척하고 있고."

역시나 사람들 추측대로 사장 빽이었다.
방송국 직원이 말할 정도면 확실하다.
나는 이참에 둘이 무슨 관계인지를 물었다.

"사장이란 김중현 피디란 무슨관계인데요?"

"거기까진 몰라요. 빽이라는거만 알지"

여기까지는 이 사람들도 모르는구나.

대체 무슨관계인지 조만간 빨리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조용히 룸만 다닌다고 하길래 나름 선은 지킬줄 아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다들 쉬쉬하면서 소문을 묻어버린거 같았다.

오늘 직접 보고 확신했다.
이대로 놔두면 조만간 사고 한번 크게 칠 인간이 분명하다.

초면부터 나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바람에 나도 첫인상은 그저 그랬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니 전시연은 꽤 의리있는 여자였다.
다들 모른척하는데  여자는 미움받을 각오하고 자기가 나서서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말이 쉽지 자기 밥그릇 걸리면 그녀처럼나서기 쉽지 않다.

"대단하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몸 사리는데 혼자 나서는거 보면"

"덕분에 내년 계약은 물 건너 갔죠. 내가 여기 아니면 일할데 없을까봐 흥. 다만 저야 관두면 그만인데 얘가 걱정이죠. 애가 순해서 싫은 말도 못하고, 당장 여기 관두지도 못하고.  없으면 어찌 될지"

전시연이 울분을 토하고 있지만, 막상 당사자인 공나민은 고개를 숙인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전시연이 없어지고 난 후가 걱정되는 것이다.

"공나민씨는 왜 못 관두는데요? 탑뮤직 아니여도 다른데 작가 구하는데 많잖아요?"

"어디든  인맥이에요. 인맥. 얘 여기 들어온 것도 우리 메인작가가 과 후배라고 넣어준건데 피디가 싫다고 한두달만에 관두면 찍혀요."

한마디로 선배가 후배를 뽑아주긴 했지만, 막상 후배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음에도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나이사님 생각해서 지금 참고 있는지라 공나민이 처한 상황이 어느정도 이해는 갔다.

그나저나 작가들도 인맥이란다.
정말 이쪽 세계는 인맥이 전부인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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