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7화 〉67화 신사의 도리 (67/425)



〈 67화 〉67화 신사의 도리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는 중에 저쪽에서 김중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즐거운 시간은 이제 그만 끝내야 한다.

"전시연씨, 공나민씨 저기 김피디 와요"

전시연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김중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조금 전까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씩씩 거리며 말을 하던 여인이 다시금 처음 봤을 때처럼 표정없는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즐거운 김중현만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나도 그가 오자마자 다시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띄으며 그를 맞이했다.
다시 일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 김피디를 상대하는 건 일이다.
고되고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다.

"오셨습니까. 피디님  계시니 시간도 안가고 심심하더군요"

"그래서 왔잖아.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은데 우리 와인 한잔씩 더 하는게 어때?"

"와인이요? 지금껏 계속 드셨잖아요 부족하세요?"

호텔 뷔페에서 잔 단위로 판매하는 하우스 와인이 이미 각자의 앞에 한잔씩 놓여 있었다.
김중현만 혼자 세잔을 비워 취기가 올랐지만, 우리는 다들 형식적으로 한잔씩만 받아 놓고 그마저도 다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화장실 멀쩡히 잘 갔다오더니 와인을 더 마시자고 제의한 것이다.
아마 취기가 오르니 술이 더 땡기는가 보다.

"이런 하우스 와인 말고, 모처럼 고급 호텔까지 왔는데 제대로 된 와인 맛 좀 봐야하지 않겠어? 작가들 고생한다고 위로하는 날인데 책임 프로듀서 체면이 있지 겨우 밥만 먹고 끝낼 수는 없지."

지가 계산하는 것도 아니면 생색을 혼자 다 내고 있다.
말만 와인타령이 아니라 이미 주문을 했는지 저쪽에서 웨이터가 와인을 들고 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병이 아니었다.

"3병.....이나요?"

"나야 이런거 많이 먹어봤지만, 신 사장이나 여기  작가, 공 작가는 아닐테니 내가 특별히 신경썼어. 3명이니 3가지 맛은 봐야할거 아냐."

'마실거면 진작 가져오지 한창 먹어서 배   다음에 누가 와인만 저렇게 마시냐고.'

차라리 지금  자리에 앉았다면 모를까 식사가거의 끝나가는 중에 저렇게 3병이나 들고오니 부담이 된다.

웨이터가 능숙한 솜씨로 와인을 따고는 각자의 잔에 따라주기 위해 병을 들었다.
그러자 김중현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제지했다.

"됐어. 우리가 알아서 마실테니까 나머지 두병 따 놓기만 하고 가"

고급호텔 답게 웨이터는 표정변화나 되묻는거 없이 그가 시키는대로 나머지 두병의 와인도 모두  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김중현은 병을 들어 각자의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일단 맛 만 보라고 조금씩만 따랐어."

잔에 반 정도씩 채워넣고 조금 타령을 한다.
아마 방금처럼한 번씩만 더 따르면 한 병 바로 없어질거다.

"피디님은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내가 비어있는 김피디의 잔에 와인을 채우기 위에 손을 뻗자 김피디가 와인병을 나에게서 멀리 치우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벌써 와인 세잔이나 마셨고, 평소에도 이런거 많이 마셔봤어.  와인들은 신사장, 전 작가, 공 작가를 위한거야. 나 이런거 뺏어먹을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 아니야. 그러니 부담없이 마시라고"

김중현의 입에서 그와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염치. 체면을 자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말이다.
염치를 아는 사람이면 이미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았을거다.

아마 이따 나갈 때 오늘 먹은 밥 값과 저 와인값도 다 내가 계산해야 할거다.

그런 놈이 염치를 거론하니 속으로 어이가 없다.
표정관리 안하는 전시연은 물론, 조용히 있던 공나민마저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김피디님 전 배가 불러서 못 마시겠어요"

"저....저도..."

전시연이 그녀답게 확실히 자기 의견을 말하자, 옆에서 공나민도 은근슬쩍 끼어가기를 시도했다.
그러자 김중현이 헛웃음을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신사장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래. 다들 얼마나 잘났는지 책임피디가 특별히 신경써주는 것도 이렇게 싫다는 소리를 거리낌없이 잘도 한다니까. 이게 다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잘해주다 보니까 고마운줄도 모르는거지."

지금 그는 노골적으로 전시연과 공나민을 협박한 것이다.
더불어 젊은 사람이라 거론하며 나한테도 안 마실 생각말라고 한 것이다.
전시연이야 조만간 관둘 사람이니  효과는 없을지라도, 공나민과 나에게는 압박이 된다.

"아..아니에요 마실게요"

김중현의 압박에 공나민이 서둘러 와인잔을 들고는 무슨 맥주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한 잔을 비웠다.
그제서야 김중현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 작가 이제보니 참 화끈하군. 맘에 들어. 어때? 맛이 괜찮지? 그거 비싼거야."

"네..."

한번에 와인을 모두 비운탓에 얼굴이 벌게진 공나민이 입가를 닦으며힘겹게 답했다.

"전 작가는 안 마신다고 하니 나머지 공 작가가 다 마셔. 남기면 아까우니까"

전시연이 째려보건 말건, 김중현은 전시연의 잔에 담긴 와인까지 공나민에게 떠넘기려고 했다.
전시연이 자존심을 접고 마시지 않으면 결국 고생하는 건 공나민이다.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내가 나서기로 했다.

"피디님. 저건 제가 마시겠습니다."

"좋은 와인이 있으면 여성한테 양보해야지 그걸 먹으려 하면 안되지. 신 사장 이제보니 은근히 와인 욕심이 있나보네"

와인 욕심은 커녕 술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야할 때는 해야 하는 법이다.

"제가  그렇습니다. 하하하하"

"쯧쯧. 이런건 여자한테 양보하는게 신사의 도리야. 여자한테 인기 많으려면  알아둬."

내 앞에서 인기 타령을 하니 어이가 없다.
예능국 전체에서 가장 인망없는 사람이 여자친구가 6명인 사람 앞에서 인기가 많아지는 비결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감을 얻는 가장 좋은 비결은 성공이다.
연애, 다이어트, 금연, 시험합격 같은 성과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상승시킨다.

하지만 김중현은 피디시험에 합격했다는거 외에 자신감을 가질 꺼리가 없다.
물론 방송국에 피디로 입사한게 정말 대단한 일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10년도 더 된 일이고, 그 이후 성공한거 없이 실패의 연속이다.

아무리 최근 사장빽이 생겨 잘나가고 있다지만, 이건 상식을 뛰어넘는 자신감이다.
어떤 의미로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정도다.

'이 새끼 어떤 의미로 진짜 대단한 새끼야. 세상 모든게 다 자기 중심이야. 저런 멘탈이니 10년 가까이 개무시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건가?'

"두 분이 그러실거 없어요. 제가 마실게요."

우리하는걸 보다 못한 전시연이 와인을 들더니 자기가 마셔버린다.
꽤 술을 하는 모양인지, 힘들어하는 공나민과 달리 얼굴빛 하나 안변하고 와인을 모두 비웠다.

전시연까지 와인을 모두 비우자 김중현이 우리 세 사람을 한명한명씩 둘러보고는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난 여기 있는거 다 마실때 까지 일어날 생각 없어. 다 땄는데 남기고 가면 아깝잖아."

지금 상황을 벗어나고 싶으면 다 마시란 말이다.
이제 겨우 8시 20분.
식당  닫을 때까지 버틴다고 해도 2시간 가까이 필요하다.
선택의 시간이다.
빨리 먹고 빨리 일어날 것인가, 시간을 질질 끌면서 문 닫을 때까지 버틸 건인가.

하지만 김중현은 내 생각과 달리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거 같았다.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채워넣으며 맛을 보라며 계속 권유를 했다.
한두번이야 이런 저런 말로 시간을 끌  있지만, 계속은 힘들다.
 수 없이우리는 계속해서 잔을 비워야만 했다.

'뭐지? 술 취하면 지랄같다는게 다른 사람들 계속 먹여서 그런건가?'

같이 술 먹으면 엄청 힘들다는 말은 들었지만, 구체적인 내용 없이 그냥 치를 떨 정도로 힘들다는 말만 들었는지라 이게김중현 술버릇이 맞는건지 정확한 판단이 안된다.



와인 두병 째를 비우자, 공나민은 슬슬 취기가 오르는 듯했다.
와인의 도수가 낮은 편도 아니고 한병의 양도 적지 않기에 셋이 마시면 술 약한 사람일 경우 제법 취하는 편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은근한 재촉에 빨리 마시고 있는 중이다.
잔이 비기가 무섭게 따라서 채워주고는 얼른 맛을 보라는 김중현 때문에  시간도 없었다.

나는 잠시 한숨을 돌릴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안주를 찾았다.

"시연씨, 나민씨 와인이랑 같이 먹을게 없어서 좀 심심하네요. 죄송하지만, 치즈나 간단한 것들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여기서 김피디님께 한잔 드리고 있을게요"

지금이 평상시였으면 먹을거 가져오라고 시켰다며 욕먹을 테지만, 지금은 내가 김피디를 상대하고 있을 테니 어디가서 쉬고 오라는 말이다.

"그러고보니 안주할게 없었군. 전 작가, 공 작가. 가서  가져와. 나도 오래 쉬었으니 신사장이랑 한잔 하고 있지"

재촉만 하던 의외로 김중현이 순순히 허락하자 전시연과 공나민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공나민이 머리를 잡고 옆으로살짝 비틀하는거 보니 보기 보다 취기가 많이 오른듯했다.
옆에서 급히 부축해주는 전시연의 얼굴도 앉아 있을 때보다 벌게졌다.

막걸리랑 와인 마시고 취했을  특징이 이렇다.
앉아서 마실 때는 괜찮은거 같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면 그제서야많이 어지러운걸 실감한다.
숙취는 말할 것도 없다.

"저희 잠깐 화장실 좀 들렀다가 올게요"

일어난 김에 쉬는 시간을 길게 가지려는 듯 전시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김중현이 아닌 나를 보고 말한 것은자기들만 자리를 피해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오늘 자리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김중현이다.
김중현에게 내가 허락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되기에그의 눈에 띄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전시연과 공나민이 자리를 비우자, 지금껏 따라주고 마시기만을 재촉하던 김중현이 와인잔을 들었다.

"오늘 정말 즐거워. 이렇게 즐거운 술자리 오랜만이야"

김중현이 그동안 온갖 모욕을 참아가며 접대해 준 매니저들의 노력을 한방에 싸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는 손에 든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천천히 와인을 한모금 마시더니 다시금 내려놓는다.
대체 화장실을 갔다가 무슨일이 있었던거지, 마치 물처럼 와인을 마시던 전의 모습과 대조적이라 신기할 정도다.

천천히 와인을 넘긴 김중현이 나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옅은웃음을 띄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신 사장. 전 작가 어떤거 같아?"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가네요"

"자네가 보기에 이쁘냐는거야"

전시연은 개인적인 호감 같은거  무시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이쁜 사람이다.
160초반의 키에 시크하고 차가운 표정이 매력적인 냉미녀 스타일이다.

"전시연씨 이쁘죠. 모르는 사람한테 작가 아니라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걸요."

"내가 봐도 그래. 매일 연예인들과 어리고 이쁜 여자아이돌을 보는 내가 봐도 전 작가 정도면 어지간한 연예인들 보다 이뻐. 말은 안했지만  작가 방송국에서도 이쁜 작가로 소문도 났어"

고개를 끄떡이며 전시연의 미모를 찬양하는 김중현을 보고 있으니 아까 김중현이 공나민에게 찝쩍된다던 전신연의 말이 떠올랐다.

'이 새끼 공나민한테찝쩍 거린다고 했었는데, 정말 노렸던 건 전시연이였나?'

"난 신사장이 마음에 들어. 자네 회사에 레몬로즈......가 회사에 있지? 말만하면 바로 출연시켜 줄거야. 사실 레몬로즈 정도의 경력과 실적이라면 음방 못 나온다는게 말이 안되지"

전시연 얘기하다가 갑자기 음방출연 문제가 나와서 이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 대답을 들었으니 오늘 고생한 보람은 있었던거 같다.
김중현의 마음에 들어 앞으로 자주 봐야할거 같은 불안감은 있지만, 그건 몇년만 버티면서 적당히 상대해 준다면 어떻게든 될 거다.
어차피 김중현은 앞으로 개과천선이라도 하지 않는 한 사장이 물러나는 순간 끝장이다.
아니 여기까지 온 이상 개관천선 해도 피디직에서 쫓겨날게 분명하다.

"그리고 한가지 호의를  베풀까 해"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내가  김중현은 절대 이유없는 호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자리가 생기지도 않았다.

김중현은 항상 누군가에게 요구하고 받는 것만 익숙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베풀 때는 상대에게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뿐이다.

"오늘 신사장이 전 작가랑 잘  있게 해주지"

'미친새끼'

이제야 우리들에게 와인을 억지로 먹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설마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그냥 권력에 취해 갑질을 하며 밑에 사람들이 곤란해서 힘들어하는걸 보며 즐거워하는 정도 일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다.

김중현은 미친 쪽으로 착실히 발전하고 있었다.

고민이 된다.
바로 대답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제안을 거부하고 오늘을 무사히 넘긴다 해도 앞으로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들었다.
특히 공나민씨는 더더욱 걱정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른척 하고  이득부터 챙기고 볼까, 아니면 다 엎어버리고 그냥 k방송국이랑 담쌓고 살까.'

"너...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전 오늘 전시연씨를 처음 본거고...."

"하하 같은 남자끼리 왜 이래. 뺄거 없어. 자네는 그냥 내 말만  들으면 돼. 그럼 오늘 멋진 밤을 보낼  있을 거야."

젠장 같은 남자끼리라니.내가 자기랑 비슷한 부류로 보였다는건가.
오늘 들은 말중 가장 기분이 나쁜 말이다.

김중현이 미소 지으며 몸을 가까이하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자네가할 일은 간단해. 방 두개만 잡아놔  방 하나, 자네  하나."

하아....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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