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163화 마지막 자존심
”사장님, 밖에 웨이븐 황명권 실장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영준이가 황실장이 찾아왔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서나라의 인상이 팍 구겨진다.
빨간 머리가 웨이븐 멤버였다는 걸 알게 된 서나라는 빨간머리 뿐만 아니라 웨이븐 전체에게 굉장히 감정이 안 좋은 상태다
서나라가 문을 향해 등을 돌리는 걸 보면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황실장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끝난 일이니 계속말씀 안 하셔도 돼요. 앞으로 주의만 좀 부탁드릴게요.“
”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애들한테 언제 어디서든 새별너울과는 무조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그런데 무슨 일로?“
”사장님 오늘 혹시 시간이 있으신지요?“
”네?“
”저희 사장님이 어제 일을 들으시고 신 사장님을 꼭 직접 뵙고 사과드리고 싶으시답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끝난 일이에요. 사장님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시간 많이 뺏지 않을 겁니다. 저희 사장님도 방송국으로 오시니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사과도 그렇고 따로 말씀드릴 일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과는 핑계고 따로 말한다는 게 본론이네.
돈 꿔달라는 소리일 거 같아서 무서워진다.
”저희 사장님한테 혹시 금전 관련한 얘기인지 물어봤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니 신 사장님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마음을알았는지 대번에 돈 관련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눈치라고 할 것도 없이 윤팀장한테 버드윙 사정을 다 말해준 황실장이다.
자기 사장이 나에게 말할 게 있다고 하면 내가 돈 관련 이야기일지 걱정할 거라는 건 너무 뻔하긴 했다.
따로 말할 것이 있다는 말에 마음을 정하지 못한 내가 망설이자 황실장은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약간 추레한 행색의 아저씨가 10살 이상 어린 나에게 극존칭을 써가며 굽신굽신하고 있으니 거절하면 내가 많이 나쁜 놈이 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윤팀장이 어제 황실장이 듣는 사람 거절 못 하게 부탁을 잘한다고 했었지.
부탁하는 능력 하나로 음방PD들을 설득해 웨이븐 음방 출현을 시키는 황실장이다.
내가 계속 거절해봤자 오케이 할 때까지 물고 늘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버드윙 사장님께서 언제쯤 시간이 되신다는데요?“
”신 사장님 시간에 맞추시겠답니다. 사장님 편한 시간을 말씀해주십시오.“
가만 보자.
지금시간이 오전 10시 반.
내가 보통 12시 좀 넘어서 점심 먹으러 나가니 식사나 같이하자고 할까?
아니다. 사과와 따로 말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식사하면 밥이 제대로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아.
밥 먹고 소화까지 시키고 보는 게 좋겠다.
”오후 2시쯤 어떠십니까?
”네 오후 2시로 하죠. 장소는 방송국 근처 카페로 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황실장과 함께 방송국을나섰다.
벌써 도착한 버드윙 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곳은 방송국 옆문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더 가면있는 카페였다.
”황실장님 무슨 일인지 살짝만 말해주시면 안됩니까?“
”말씀 드리고 싶지만 저도 정말 모릅니다.“
카페문을 열고 들어가자 황실장이 잠시 안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안쪽에 있던 테이블로 향하였다.
황실장이 다가가자 자리에 입구를 등지고 혼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 황실장과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어요. 웨이븐 소속사 버드윙 엔터의 연수진 사장이에요"
나는 조금 속으로 놀랐다.
당연히 중년, 혹은 장년의 남성을 생각했는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을 사장이라 소개했다.
연수진 사장은 틀어 올린 검은 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세워진 카라가 그녀의 긴목을 감쌌고, 금색 단추가 그녀의 검은 상의를 장식했다.
무릎을 조금 넘는 길이의 치마와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BICA ENT. 사장 신재윤입니다”
“반가워요. 만나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사장님과 만나게 되네요.”
그녀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녀와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연사장은 나에게 사과부터 해왔다
“어제 있었던 일은 죄송해요. 태형이한테는 정말 따끔하게 얘기했어요. 변명같겠지만 이상한짓 하려는게 아니라 애가 사장님네 그 아이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해요.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저희도 정말 당황했어요.”
화자가 바뀌었을 뿐 어제 황실장과 빨간머리 본인에게 모두 들었던 이야기인지라 여기서 더 왈가왈부 할거 없이 사과를 받아들였다.
“아닙니다. 여기 황실장님께서 이미 여러 번 말씀해주셨고, 저희는 다 잊은 일입니다. 더는 말씀 안하셔도 괜찮습니다. 덕분에 황실장님같이 좋은 분과 인연이 되었고, 오늘 사장님과도 만나게 되었으니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도 요즘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나 자신에게 놀라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게 이런거가 싶다.
“호호 역시 듣던 대로 멋진 분이시네요.“
”사장님은 저에 대해 들으셨을지 몰라도, 저는 사장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실 줄 전혀 몰랐습니다. 이거 황실장님께 실망입니다. 왜 미리 말씀 안 해주셨나요.“
"잘못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제 실수였습니다. 하하"
방금은 정말 내가 말하고도 닭살이 돋았다.
신재윤 너 정말 많이 컸다.
산골짜기에서 뛰어다니던 놈이 이제는 이런 말도 술술 잘하는구나.
건너편 집 사시던 김씨 할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면 참 징그럽게 컸다고 하실거야
황실장은 우리 둘이 이야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떠났다.
황실장이 가게 밖으로 완전히 나가기를 기다린 연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요즘 사장님네 새별너울 상승세가 대단하더군요. 이미 1월에 레몬로즈를 리드레아로 재데뷔 시켜 큰 성공을 하셨는데 새별너울도 차세대 기대주로 인정받고 있으니 아주 기쁘시겠어요.“
연수진 사장이 내가 무명 아이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가장 껄끄러워하는 주제를 끌고 나왔다.
소속 연예인 이야기가 보통 상대는 우리 애들 칭찬하고 나는 상대쪽 애들을 칭찬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적절한 말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예 솔직히 기쁩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아이들이 와주었다는 게 정말 큰 행운입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레몬로즈 시절을 생각하면 리드레아의 성공도 사장님의 능력이고, 리드레아 이후 3개월 만에 새별너울을 데뷔시킨것은그만큼 자신감이 있으셨다는 거 아닌가요? 사장님의 보는 눈이 대단한 거죠“
”제 눈이 대단하다기보다 새별너울 아이들을 봤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아이들을 내보낸 피지엔터는 정말 눈이 없는 거겠군요. 사장님을 비롯한 다른 회사들은 그 아이들이 나오기가 무섭게 바로 데려가셨는데.“
연사장의 말을듣는 순간 나에 대해 생각보다 조사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따로할 말이라는 게 절대가벼운 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연 사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피지엔터에서 나온 연습생 14명 중에 8명을 데려가셔서 8명 모두 새별너울로 데뷔시키셨죠. 3개월만에 리드레아 새별너울 두 팀을 런칭했는데 원래 계획은 14명 모두 데려가시려고 했다고 알고 있어요. 6명이 사장님에게 가장 먼저 제안을 받고도 다른 회사로 가긴 했지만, 만약 사장님네로 갔으면 14명 중 한 명도 버리지 않고 모두 데뷔시켰을거라고 확신해요. 14명을 한팀으로 데뷔시켰을지 나누어 2팀으로 데뷔시켰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이건 누나, 나이사님, 나, 그리고 14명 당사자들 밖에 모르는건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진다.
6명은 각각 JUMP엔터와 JUMP엔터보다 큰 중견기획사로 갔다.
연수진 사장은 이 둘중 하나와 컨택하여 이 정보를 들었다는거다.
확실히 연예계 소문과 정보는 무서웠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가진 여자도 소속 아이돌을 성공시키기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도 무서웠다.
두 그릅이 연속으로 잘 풀리며 약간 기고만장했던 나 자신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저와 저희 BICA에 대해 많이 조사하셨나 보군요”
“조사라고 할 거까지야 있나요. 그냥 몇 군데 물어보고 대충 생각하면 다 나오는걸요.”
“연 사장님 정말 대단하시군요. 사장님이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신 걸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그건 오히려 제가 할 말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신 사장님이 그저 운이 좋아 아이들을 잘 만나 성공했다는 말. 그 간단한 걸 대부분의 기획사가 못하고 있죠.“
사람 알아보는 것도 능력 맞으니, 듣는 사람 짜증 나게 운 타령 그만하라는 거다.
처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나는 이제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조금 전처럼 서로 가식 떠는 것 보다, 차라리 조금 냉정해진 지금이 그 본론이라는 것을 논하기에 더 적절해 보였다.
”연 사장님 이제는 물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군요. 오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와주세요.“
”네?“
”우리 회사를 도와주세요. 사장님이 저희 웨이븐을 프로듀싱 해주세요.“
다른 회사 전속의 프로듀서에게 말하기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다른 회사의 사장에게 프로듀서를 해달라는 건 생각도 못 한 부탁이었다.
나는 새별너울의 활동이 끝나면 휴식을 좀 가진 뒤 리드레아의 2집 준비에 들어가 7월 말이나 8월 초쯤에 컴백시키고, 다시 리드레아 2집 활동이 끝나갈 때 즈음 새별너울 2집을 준비할 계획이었다.
이런 스케쥴에 연 사장의 부탁을 들어주면 제대로 마음편히 쉬지를 못하기에 꺼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이그룹 프로듀싱 따위는 전혀 하고 싶지가 않다.
업계에서 일하게 되면서 보이그룹도 많이 보고 있지만, 정말 일 때문에 보는 것뿐이다.
그리고 말그대로 보고만 있을 뿐이라 잘 알지는못한다.
”연사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죠. 가부 여부를 떠나서 저는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곡의 스타일부터 공략하는 대상, 띄우는 방법, 세계관, 컨셉 등등 모두 보이그룹과 걸그룹은 다릅니다.“
”아니요. 사장님이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이돌의 기본은 무대에요. 무대는 춤과 노래. 좋은 곡과 좋은 무대는 남녀 떠나 같아요. 무대를 잘한다고 평가받는 아이돌은 여돌 팬이고, 남돌 팬이고를 떠나 모두가 인정합니다. 사장님이그런 걸 판단하는 능력이 좋으시다는 걸 전 확신해요.“
그녀는 정말 우리 직원들과 같이 작업한 몇몇 말고는 모르는 사항까지 알고 있었다.
대체 나에 대해 얼마나 조사한 거지?
”어디서 그런 걸 들으셨습니까?“
”아까 말씀드렸죠? 여기저기 좀 물어봤다고. 죄송하지만, 사장님과 작업하신 외주 업체들에게 물어봤어요. 정확히는 사장님에 관해 물은 게 아니라 BICA 작업 실무자를 알아본거였는데 결과는 사장님이었어요. 다른 BICA 직원들은 그저 지시사항 전달해주는 수준이었더군요.“
외주 업체들이야 앨범 속지와 몇 군데 전화하면 뻔히 알긴 한다.
그런데 말이 쉬워 알아보니 누구더라 하는 거지, 저걸 하나하나 알아내어 조합하여 유추하는게 쉬은 게 아니다.
그리고 업체 직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고객정보를 그렇게 쉽게 남에게 알려주겠는가.
결국 이 여자의 능력이라는 거다.
”연 사장님 무서운 분이군요.“
"신 사장님만큼은 아니에요. 저도 자신을 갖고 여기 뛰어들었는데 남은 건 사무실에 쌓인 앨범 재고와 청구서, 그리고 독촉장뿐이더군요.”
어지간한 부자가 아닌 이상 앨범 4개가 모두 실패했으면 지금 빚더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 마지막 도전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고, 그 일환으로 나에게 부탁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저에게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 규모로 2개그룹 케어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신 사장님한테 모든 걸 다 해달라고 안 해요. 저희가 준비한 게 맞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검토하고 조언만 해주세요. 사장님이 해야 한다고 하면무엇이든 할게요."
후......잘못 걸렸어.
나오는 건 정말 한숨뿐이었다.
여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저 여자도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쌍하다고 쉽게 결정할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맡아주신다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신 사장님 원망 안할 거에요. 저는 정말 할 만큼 했고 그래도 안 되는거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것 모두 해보려고 해요“
4번이나 활동시키고도 아직 한 번 더 활동시키는 힘이 있다는 게 놀랍다.
분명 사장이 자기 차까지 팔았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묻겠습니다. 회사 자금 사정이 어떻습니까. 사장님 사정은요?“
”빚은 있지만 집 팔면 대출금 갚고 다음 앨범 투자금은 남아요. 그리고 전 오늘 처음 본 사장님한테 제 사정을 모두 밝히고 매달릴 만큼 체면도, 자존심도 없는 상태고요"
그러고 보니 윤팀장한테 버드윙 사정 들을 때 차 팔았다고 했지 집 팔았다는 말은 없었네.
그나마 다행인 건 집을 팔면 빚이라도 없어진다는 거다.
연사장은 절망적이겠지만 냉정하게 4번이나 활동시키고도 이 정도면 양호하다.
원래 돈이 좀 많았나 보네.
여기서 끝낸다면 좀 고생은 하겠지만 전셋집 하나 얻고 평범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연 사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을 가려고 하고 있었다.
“연 사장님 냉정하게 생각하시죠. 이쯤에서 버드윙, 웨이븐 접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버드윙 접고 일할 곳이 마땅치 않으시다면, 저희 회사에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잠깐의 대화가 전부였지만, 이 여자 비록 회사와 아이돌은 망했지만,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한다면 환영이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런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어요. 아니 이번 컴백도 하지 않았겠죠.”
이미 마음은 다 정하고 왔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내일모레 40인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이 세계는 한번 발을 들이면 쉽게 뺄 수 없을 만큼 도박과 같은 곳이라서 미련을 버릴 수가 없더군요”
응? 지금 이 얼굴로 내일모레 40?
헐. 얼굴이나 피부 보고 난 누나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요즘 내 주위에 동안이 왜 이렇게 흔한거야.
나 빼고 다 동안인 것 같아.
“남편분 의견도 들어보셔야 하지 않나요? 남편분도 동의하신 건가요?”
“저 혼자에요. 딸은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랑 사고 쳐서 낳은 아이고요. 딸이랑 둘이 열심히 살았죠.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다가 어쩌다가 연예계를 접하게 되고, 홀려서 이곳에 들어오는 바람에 지금은 부모님이 하나뿐인 외동딸에게 남겨주신 유산에 제가 10년 넘게 악착같이 모은 돈까지 다 날려 먹었죠.”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발을 한번 잘못 디디는 바람에 모든 게 날아가기 직전이다.
뭐 연예계 아니더라도 사업이 다 그렇긴 하다.
잘만풀리면 월급쟁이가 한심해 보일 정도로 많이 벌지만, 잘못하면 그대로 나락행.
그래서 사업이 무서우며, 실패해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거다.
오죽하면 사업병이란 말까지 있을까.
그렇기에 오늘 처음 본 나에게 모든 걸 밝히고 동정표라도 좋다는 심정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연수진 사장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 뭔가가 찝찝하다.
뭔가 나에게 말하지않은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이쪽이 도박 같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연 사장님같이 똑똑하신 분이 미련이라는 단순한 이유로위험한 길을 가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발을 뺄 수 있음에도 말이죠.”
“다른 길이 보였으니까요. 바로 사장님 말이죠.”
이 여자 정말 감정을 읽기가 힘들다.
남에게 밝히기 어렵고 힘든 말을 평온한 얼굴로 하고 있다.
그러니 정말 급한지 아닌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언제부터 저를 주시했습니까?”
“새별너울이 데뷔한 주요. 새별너울 첫방 이후 화제가 되었었죠. 저도 새별너울을 보자마자 눈에 확 꽂혔어요. 궁금해서 찾아보니 리드레아와 같은 소속사더군요. 많이 놀랐어요. 생긴 지 1년도 안 된 회사가 3개월 동안데 두 그룹이나 런칭했고 두 그룹 다 성공적이라는 것에요. 그때부터 BICA ENT.와 사장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죠.”
“저를 웨이븐의 프로듀서로 삼고 싶다고 결심한 건요?”
“어제 태형이 일을 듣고요. 전에는 막연하게 그랬으면 좋겠다 했지만, 기회가 생겼으니 이것도 운명이다 싶어 말해 보자고 결심했죠.”
결국, 즉흥적이라는 거다.
이건 하나다.
사방이 막혀 꼼짝없이 갇힌 상황에 출구 같은 길이 보이자 앞뒤 안 가리고 냉큼 뛰어든 거다.
아까 연 사장이 말한 자금 사정이 거짓 같아졌다.
혹시 집을 팔면서 아예 빈털터리가 되던지, 집을 팔아도 빚을 다 못 갚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트레이너 페이도 감당 못 해 못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할 사장이 차까지 팔 정도면 집은벌써 한도에 다다렀을 거라는 게 더 이치에 맞다.
괜히 질질 끌어 괜히 미련을 주는 것보다 그냥 여기서 끝내는 게 연 사장을 위해 더 나아 보였다.
“연 사장님. 이쯤에서 그만하죠.”
“조건도 안 들어보셨잖아요.”
그러고 보니 여태 사정 이야기만 듣고 있었구나.
조건을 듣고 여기에 이유를 붙이면 거절하기 더 쉽겠지.
예를 들어 1000만원 준다고 하면 5000만원쯤 부르면 되니까.
“그렇군요. 그럼 들어보겠습니다.”
"사정이 사정인 만큼 당장 돈으로 드리지는 못해요. 다음 앨범이 성공해 회사가 살아남으면 지분의 49퍼센트를 드리죠. 당장 안 드리는 건 파산할 경우 저 혼자 모두 책임을 지기 위해서예요. 성공의 기준은 앨범 및 활동 투자금만큼의 수익이 생겼을 때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다음도 가능해지죠. 그리고 앞으로 웨이븐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수익에서 다음 앨범, 활동비,회사 유지비, 그리고 멤버 정산을 해야 할 경우 정산금을 제외한 수익의 70%를 드리겠어요. 당연한 얘기지만 앨범 제작 및 모든 준비과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사장님의 의견대로 따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손을 떼셔도 좋습니다. 앞서 말한 앨범 및 활동 투자 비용, 회사 유지비의 규모 또한 사장님의 의견을 따를 겁니다.”
투자금 없이 이익만 줄 테니 나한테 0원에 버드윙 인수하라고 하는 꼴이다.
흥미가 생기는 게 아니라 부담돼서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진다.
“사장님은 사실상 허수아비가 되는 건데 괜찮으십니까?”
“이익 이전에살아남느냐의 문제거든요. 회사가 계속 유지되고 수익을 얼마라도 가져가면 저에게는 이익이에요.”
정리하면 연 사장은 현재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난 이걸 이유로 대고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두 미래의 약속뿐이군요.”
“알아요. 아무리 조건을 좋게 해준다고 해도 지금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그래도 딱 한 가지 당장 드릴 수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저요."
연사장은 내 물음에 망설임 없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단한마디였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모든 고민과 결정을 끝내고 나를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안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익금을 더 달라고 하면 드릴 수 있지만, 이것만은 저도 양보 못해요. 제게 남은 게 딱 두 가지가있어요. 저와 제 딸이죠. 그중에 드릴 수 있는 건 저 하나뿐이에요. 드릴 수 있는 건 드려요. 이미 바닥에 쓸려 하수도에 처박힌 자존심이지만 이거 하나만은 남았어요. 당신이 거부한다면 마지막 자존심마저도 하수도에 처박혀 다 흘러내려 갈 거예요.”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온갖 비참하고 창피한 얘기들을 평온한 태도로 말했던 여자가 가장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이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이 있기에 지금까지 평온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