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185화 팬심
“사장님 여기가 어디죠?”
“저도 모르겠어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20분 정도를 달렸다.
그동안 계속 폰만 붙잡고 있던 윤팀장이 어딘지를 물었지만, 나도 정말 앞만 보고 달려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일단 네비에 회사 찍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 아깝지 않아요?”
공무원한테 사기당한 건당한 거고, 모처럼 나왔는데 이대로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돌아가기 아까웠다.
밖에 지겹게 돌아다니고 회사에 일찍 도착하는 만큼 퇴근 시간이 빨라지는 윤팀장은 빨리 돌아가고 싶겠지만, 사장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이러고 있으니 고개를 돌려 창문 밖만 바라본다.
내가 지금 달리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몰라도 20여 분 정도 더 가니 산을 옆을 타고 오르는듯한 오르막 도로 옆으로 보이는 경치가 꽤 좋았다.
“여기 어딘지 몰라도 경치는 좋네요.”
“우리나라 돌아다니다 보면 유명하지는 않지만 좋은데가 많은데 여기도 그중 하나죠. 고속도로에서 멀고 광역시랑도 제법 떨어진 곳이라 관광으로 사람 모을 생각도 못 하는 동네죠.”
오르막길을 오르다 계곡 사이를 지나 시작된 내리막길을 타고 가다 보니 길 한편에 휴게소는 아니어도 전망대 비슷한 곳처럼 되어 차 몇 대 주차할 곳이 있고, 간단한 음료와 스낵들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한적한 도로의 평일 점심시간 대라 그런지 우리 말고는 가게 사람 차로 보이는 승합차밖에 없었다.
올라오면서 본 곳은 평야가 막 산지로 접어드는 단계였다면, 이쪽은 뒤편 산과 가깝게 겹쳐 생겨난 계곡에 있는 곳이었다.
“산들 사이라 그런지 햇빛도 별로 안 들어오고 내일 모래면7월인데도 시원하군요.”
“그러네요.”
“여름 휴가 때 여기로 놀러 오고 싶어지네요. 조용하고 물도 깨끗하고.”
오는 내내 말 한마디 안 하고 화난 채로 어디론가 누군가와 메신저를 하던 시연도 좋은 경치와 깨끗한 물, 그리고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풀려 보였다.
점심때지만 아침을 늦게 먹어 점심 생각은 안 났기에 가게에서 음료수나 하나씩 먹기로 하고 가게로 들어갔다.
4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가게 아저씨가 우리를 보자마자 환한 얼굴로 반겼다.
“오늘 저 아래 캠핌장에서 드라마 찍으러 온 배우들이시죠?”
“네?”
“남자분, 여자분 두 분 모두 역시 연예인은 다르네요. 여기 이분은 배우들이란 있는 걸 보니 매니저시겠고. 죄송하지만 제가 드라마를 잘 안 봐서 누군지는 잘 몰라도,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희 가게에 연예인 처음 오는 거라 벽에 붙여놓을게요.”
가게 주인은 나와 시연은 배우로 착각했고, 윤팀장은 매니저 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히 집어냈다.
윤팀장 얼굴을 보니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미묘하다.
매니저를 한눈에 매니저라고 알아보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나도 모르겠네
“면사무소에서 구경하러 가거나, 방해되는 일 말아 달라고 당부만 안 했어도 가게 문 닫고 갔을 텐데 크으….”
“양수영씨가 오신다고요?”
윤팀장은 이전에도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중학생이던 20여 년 전부터 걸그룹 유앤스카이 멤버였던 양수영의 팬이다.
그는 양수영이 촬영 왔다는 가게 주인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매니저 씨는 몰랐어요? 매니저 아니신가?”
윤팀장은 매니저에게 매니저 아니냐고 물었으나 매니저는 아닌데 매니저가 맞아서 매니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에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나만 바라보았다.
그냥 매니저 아니라고 하면 될걸,
은근히 거짓말 못 하고 고지식한 아저씨라니까.
“하하, 저희 둘 다 연예인, 배우 아니고 지나가는데, 여기 경치가 좋아서 잠깐 경치 구경하고 음료수나마시려고 들린 거예요.”
“정말요?”
“네. 제가 그런 거짓말 해서 뭐 하겠어요.”
“진짜 아니에요? 연예인 아닌데도 이 정도면 연예인은 얼마나 잘생기고, 이쁜 거야. 사람이 아니겠네”
가게 주인은 사인해주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건가 하는 의심쩍은 눈으로 잠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양수영 팬인 윤팀장을 위해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캠핑장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고 양수영씨가 온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요 길 따라 20분 정도 쭉 가면 캠핑장 하나가 있는데 오늘내일 이틀 동안 거기서 드라마 촬영한다고 해서 한동안 이 동네가 시끄러웠죠. 아랫동네가 방송 타고 유명해진 걸 보고 우리 군에서도 올해는 우리도 홍보해본다고 하더니만 드디어 온 거죠.”
“그 드라마 찍는 캠핑장에 양수영씨도 온다는 거죠?”
“양수영도 드라마 나온다고 했으니 왔겠죠. 구경하고 싶었는데 면사무소에서 군수님이 각별이 신경 쓰는 일이니, 괜히 기웃거리거나 방해하지 말자고 하는 바람에 내가 못 가고 이러고 있죠.”
즉, 양수영이 드라마 출연자인것은 맞으나 오늘 캠핑장 촬영 씬에 출연하는지는 가게 주인도 모른다는 거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며 전시연에게 말했다.
“시연씨, 가다가 촬영한다는 캠핑장 들릴게요. 괜찮죠?”
“아, 차에 타면 제가 말하려고 했는데 사장님이 선수 치셨네요.”
“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바로 돌아가도 서울에는 저녁은 돼야 도착할 텐데 그런데 들릴 시간이 어딨습니까.”
“저 뮤비 촬영은 몇 번 봤지만, 드라마 찍는 건 한 번도 못 봤으니 이 기회에 견학하는 셈 칠 거예요. 그러니 윤팀장님도 모른 척 따라오세요.”
돌려 말했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윤팀장을 위해 들린다고 하자 윤팀장은 좋아하기는커녕 잠깐 망설이고는 땅이 푹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사장님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한 건 맞지만, 양수영 안 왔으면 제가 사장님하고 시연씨 볼 면목이 없지 않습니까. 설령 왔다 해도 저 하나 때문에 시간 뺏는 것도 죄송하고요.”
“시간 뺏는 걸로 치면 사장님하고 윤팀장님 여기까지 모셔온 제가 최고잖아요. 그러니 윤팀장님이 저 좀 도와주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사장님 드라마 촬영장 첫 견학 아니면 윤팀장님이 팬이라는 양수영 만난 보람은 있어야하잖아요.”
시연까지 나서자 윤팀장은 결국 못 이긴 척 캠핑장 정확한 이름과 위치를 알아 오겠다며 가게로 다시 들어갔다.
가게에서 나오는 윤팀장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 그도 알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캠프장으로 가는 차에서 윤팀장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가 양수영 팬이기에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이지만 반쯤은내가 가자고 한 것이기 때문에 혹시나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윤팀장님도 좀 전에 말했다시피, 양수영씨는 안 왔을 수도 있고, 군수까지 신경 쓴다니 군에서 촬영장 접근을 밖에서 통제할 수도 있어요. 만약 그러면 차에서 내려서 잠깐 주변만 살피고 다시 출발할게요.”
“실은....아까는 말씀 안 드렸지만, 양수영씨는 이번 드라마 ‘부분의 거울‘에서 여자주인공의 노처녀 이모 역할을 맡았죠. 캠핑장 씬 이라면 가족여행일 가능성이 크니, 양수영씨도 왔을 겁니다.”
이 아저씨, 양수영 새 드라마 제목 알고 있었어!
진짜 열혈 팬이구나.
그나저나 여주 노처녀 이모라니, 조연 전문다운 배역이네.
그래도 주연 못 하고 조연만 하는 배우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90, 00년대 활동한 그 많은 아이돌 중에 현재도 방송에서 활약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생각해보면 배우로 인정받고 40살이 넘은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는 양수영은 성공한 연예인이다.
“남주, 여주 둘만 놀러 온 장면일 수도 있잖아요.”
“여자주인공 아버지가 친구 부부가 사고로 죽자 그 아들인 남주를 어렸을 때부터 데려와 키웁니다. 그렇게 둘이 자라면서 남주는 여주를 좋아하게 되지만, 고아라는 입장,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 고백을 주저하는 동안 여주는 대학 다니면서 다른 남자와 연인이 되죠, 그런 여주를 본 남주는 여자와 집을 떠나고 몇 년 후에 성공해서 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그러니 캠핑장하면 가족여행, 가족여행이면 언니 집에 얹혀사는 노처녀 역할인 양수영씨가 분명히 왔을 겁니다.”
아, 내가 팬을 너무 무시했다.
윤팀장은 양수영의 새 드라마 제목뿐만 아니라 시놉시스까지 알고 있었다.
“.......회사 돌아가자마자 사원 기록 뒤져서 윤팀장님 사모님에게 전화하고 싶어질 정도로 대단한 팬심이네요.”
“훗, 제 와이프는 저보다 더합니다. 양수영씨 팬카페 정모에서 와이프 만났거든요. 이 얘기도 모두 와이프에게 들었습니다.”
아이돌 오타쿠 커플 박한민과 혜선씨의 배우버전 10년 후가 바로 내 옆에 있었어!
나이사님도 그렇고, 윤팀장도 그렇고, 왜 우리 회사 간부급 직원들 사모님들은 다 범상치가 않냐.
모두 부부 원만, 가정 평온인데 하나같이 이상한 방향으로 원만하고 평온해.
누나, 박한민 10년 후를 중요한 새별너울 담당으로 뽑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정말 좋아 보여?
문득 남은 한 명의 팀장, 재무회계 구인균 팀장 사모님이 궁금해졌지만, 이대로 계속 모르고 사는 게 나을 거라는 예감에 머릿속에서 지웠다.
캠핑장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안쪽으로 2,3분 정도 걸어 들어가니 나무 사이사이로 사람들과 조명, 마이크, 카메라 등의 촬영 장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태프들은 캠핑객으로는 보이지 않는 복장으로 접근한 우리를 조금 경계하였지만, 로케 촬영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건 흔한 일이라 스태프들은 필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나서서 막지는 않는다.
도심에서 촬영할 때는 허가 받았다는 이유로 과도하게 통제하려다가 뒤에서 욕먹기도 하지만, 여기는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스태프들도 외부인의 접근에 대해 관대했다.
실은 관대하기보다 여름날 밖에서 더워죽겠는데 모르는 사람들 신경 쓰기 귀찮아 모른 척했다는 게 정답이겠지.
우리는 촬영에 방해가 안 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을 만한 자리를 찾는 중에 그늘에서 할머니 세 분이 우리에게 손짓하며 앉을 때 없으면 여기 앉으라고 남은 돗자리를 빌려주시고는 이런저런 먹을거리도 챙겨주셨다.
감사를 표하고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면사무소에서 방해하지 말자고 했어도, 조용히 구경만 하면 괜찮겠다싶어서 오신 동네 분들이었다.
할머니들은 우리에게 자리와 먹을거리를 챙겨주시고는 아침에 어느 원로배우와는 인사했다고 자랑했다.
우리에게 자랑하면서 좋아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니 괜히 내 기분도 좋아지면서, 한편으로는 몇 시간 동안 드라마 촬영하는 걸 보셨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 촬영 구경하는 건 실은 그다지 재밌지 않다.
연예인 보고 신기한 것도 잠깐이지 촬영하는 시간보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많아 금방 지겨워진다.
연예인이 계속 보이면 준비하는 시간도 좋은 구경거리지만, 배우들도 보통은 자기 촬영분일 때만 나타나고 나머지 시간은 차에서 대기한다.
촬영팀도 좋은 그림 찾아 이 먼 곳까지 로케를 오긴 했지만, 아마 찍을 분량은 기껏해야 한 화, 길어야 두 화 분량, 그것도 한 시간 내내 캠핑하는 장면만 나오진 않을 테니 한 시간도 안 되는 분량을 위해 하루 종일 이러고 있는 거다.
돗자리에 앉아 할머니들 말 상대도 하고 윤팀장의 열성적인 양수영 예전 드라마 이야기를 들으며 30분 정도를 기다렸다.
30분 동안 양수영은 코빼기도 못 봤고 인자한 아버지 역할로 자주 나오는 장년 배우와 아역들이 촬영하는 걸 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지겹다거나 후딱 얼굴 보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에 편히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와 푸른 산, 파란 하늘을보니 피크닉 나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30분 동안 촬영장 쪽은 거의 안 보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연도 사기꾼한테 당해서 여기까지 내려온 분노를 잊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과 마음을 정화하거나, 두 눈을 감고 그녀를 감싸는 바람과 그늘을 만끽했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가 더 흘러 양수영은 오늘 안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윤팀장이 “읏차”하면서 일어나더니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사장님 그만 가시죠. 저 때문에 일부러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가 가자고 하면 기다리자고 해야 할 사람이 먼저 가자고 하는 어리둥절한 상황에 나와 시연이 서로 말없이 마주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윤팀장에게 물었다.
“여태 기다린 거 아깝지 않으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제가 지금 새별너울 매니저 윤민석이라면 종일 기다릴 수 있지만, 양수영 팬 윤민석은 이 정도 했으니 아쉬움도 없어요. 처음 올 때부터 여기서 보내는 건 길어야 30분이라고 속으로 정했지만, 사장님하고 시연씨가 여기 경치를 맘에 들어 하는 거 같고 저도 좋아서 10분 정도 더 있던 거죠. 더 있다가는 올라가는 길에 차가 막혀 늦어질 겁니다.”
무려20년간이나 한결같이 좋아한 연예인을 눈앞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렇게 일어나기 쉽지 않은데.
이래서 윤팀장이 방송국을 수없이 드나들면서도 팬심과 일을 양립할 수 있는 거였구나.
누나, 아까 한 말 취소,
나 사람 보는 눈 좋다는 누나 말 맞는 것 같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리한 뒤 돗자리를 빌려주신 할머니들께 감사와 인사를 전했다.
양수영은 보지 못했지만, 윤팀장 말대로 할 만큼 했고, 나름 마음 편해지는 시간을 보냈기에 미련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가 후련하게 주차장을 향하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거기, 잠시만요.”
설마 우리를 부르는 건 아닐 거로 생각하고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계속 부르는 소리가 가까워져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조연출로 보였던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 우리 앞에 멈추고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저, 저기, 드라마 출연 안 하실래요?”
뭐냐, 이 클리셰 투성이인 약속의 시츄에이션은.....
나는 당연히 시연에게 그러는가 싶어 물었다.
“이 여자요?”
“아니요. 여기 이분이요.”
조연출이 가리킨 사람은 나도 아니고, 윤팀장이었다.
“여주 이모가 혼자 캠핑 온 남자한테 반하는 씬이 있는데, 오늘 그걸 하기로 한 배우가 계곡에서 미끄러져서 다쳤어요. 오늘 온엑스트라 중에 적당한 페이스가 없어서 곤란했는데, 이분이라면 괜찮아요. PD님도 멀리서 보시고도 좋다고 하셨어요. 저희 좀 살려주세요.”
헉 대박.
주인공 이모라면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양수영이다.
어쩐지 양수영이 유난히 안 보인다더니 상대 배우가 다쳐서 양수영 씬이 뒤로 밀린 거였다.
나와 시연이 동시에 홱 소리가 나도록 윤팀장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그는 꽁꽁 얼어버렸다.
“제...제...제가요?”
“네. 씬은 몇 개 되지만 다 간단한 거에요. 여주 이모랑 지나치면서 대사 없이 웃으면서 인사 한번만 하시고, 그 뒤에는 혼자 의자에 앉아 책 보는 씬, 빵과 커피로 식사하는 씬, 마지막으로 해 떨어진 다음에 부인이 나중에 와서 여보. 나왔어 하고 부르면 ”어서 와. 캄캄한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하면서 웃으면서 걸어간 다음에 둘이 대사 없이 다정한 모습만 보여주면 돼요. 출연료 넉넉히 드리고 저녁 촬영도 있으니 오늘 하루 묵을 방도 제공할게요.“
마지막 씬은 전혀 간단하지 않고, 연기력이 필요해 보여 불안했으나, 조연출이 간단하다 하고, PD도 허락했다니. 어차피 남의 일이다 싶어 신경을 끊었다.
정 안 되겠으면 대사를 바꾸든지 하겠지.
“사...사...사..사장님....지금..이게..꿈...”
“윤팀장님, 꿈 아니니까 어서 한다고 하세요. 빨리요.”
“서..서울...서울에 가야....”
“지금 서울이 문제에요? 이분 하실 거예요. 빨리 데려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조연출은나에게 감사하다 인사를 하고는 얼어있는 윤팀장의 팔을 끌고 분장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나와 사연은 나란히 서서 분장차로 끌려가는 윤팀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회사 소속 첫 배우가 탄생하는 순간이네. 사장으로서 이런 장면을 놓칠 수 없지.”
“아쉽네요. BICA ENT. 컨텐츠 팀장으로서 미리 알았으면 제작진이랑 사전교섭해서 영상 스케치 하나 만들었을 텐데. 드라마 촬영장은 촬영 금지라 안 되겠어요.”
“괜찮아. 촬영 아니어도 전팀장이 할 건 많아. 예를 들면 새별너울에게 윤팀장이 데뷔해서 이제 새별너울 후배가 됐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일처럼 말이지.”
“그건 당연하거죠. 아예 단톡방에 올릴 거예요. 그리고 영상은 안 돼도, 사진은 되겠죠. 서울 가서 사람들 보여줘야 하니 꼭찍어둬야겠어요.”
“사진 찍지 말라면 무리해서 안 해도 돼. 어차피 드라마 방영하면 전 직원 모여서 단체 상영회 할 거니까.”
“네 윤팀장님 데뷔작인데 소속사 직원으로서 현장에 민폐 끼칠 순 없죠.”
이 재미난 구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연과 나는 실실 웃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윤팀장이 배우 데뷔했단 말에 나이사님은 “푸하하하” 하고웃었고, 장윤철은 사장인 나에게 전화해서 실시간중계를 해달라며 당당하게 요구하다가 그의 옆에 있던 김미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누나는 저녁까지 촬영이라는 말에 윤팀장님 중간에 도망 못 가게 잘 지키라며, 윤팀장 집에도 연락했으니 너무 늦으면 안심하고 자고 오라고 했다.
새별너울은 리더인 윤미가 대표로 팀장님 데뷔 1일 축하한다며 돌아오면 제대로 축하해주겠다고 윤팀장에게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어쩐지 자기 폰을 살핀 윤팀장이 멀리서 날 째려본다 했다.
지금 윤팀장 폰은 내 폰 보다 더 불나고 있겠지.
계속 촬영장에 있다 보니 우리가 리드레아와 새별너울 소속사 사람들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윤팀장이 처음인데도 촬영 현장에 쉽게 적응해 스태프들이 이것저것 물었고, 한두 마디씩 하다 보니 그가 새별너울의 팀장 매니저이며, 그와 동행한 내가 사장이고 시연이 직원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다.
덕분에 드라마 PD에게 내 명함을 주고 인사를 나눴으며 기획사 사람이라고 일반인들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돌 매니저가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적절한 변명을 찾지 못한 윤팀장은 자기가 양수영의 팬이라는 사실까지 밝혔다.
그는 출연료를 줄 게 아니라 받아야겠다는 스태프들의 놀림에 시달렸다.
“컷, 좋습니다. 다음 씬 준비해.”
윤팀장이 혼자 산과 계곡을 바라보며 빵과 커피로 식사를 하는 씬의 촬영이 끝났다.
이 한 장면 찍는데도 클로즈업, 전신을 흩는 테이크, 그리고 그에게 첫눈에 반한 양수영이 몰래 그를 바라보는 모습과 겹치는 장면까지 씬 하나를 위해 여러 장면을 찍었다.
윤팀장은 처음에 얼었던 것과는 달리 순조롭게 촬영에 임했다.
가장 긴장할 거로 생각했던 양수영과 스쳐 지나가며 인사하는 씬도 한 번에 끝내 PD와 그를 캐스팅한 조연출 등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은 현장에서 갑자기 캐스팅된 사람이 NG 한번 없이 끝내주니 시간을 아끼고 고생을 줄일 수 있어 그에게 매우 고마워했지만, 솔직히 해프닝을 기대했던 나와 시연 입장에서는 너무 순조로워 재미없었다.
윤팀장의 촬영이 모두 끝나자 우리보다 조연출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다.
“윤민석 팀장님이라고 하셨죠? 오늘 저희 살려주고, 잘하셨으니 조만간 저 입봉작* 하게 되면 매니저님 카메오처럼 캐스팅할게요. 대사 좀 있는 걸로요.”
“아이고 전 괜찮습니다. 전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하니 PD되시면 저 말고 새별너울과 리드레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 친구들 외모는 다들 좋으니 연기만 된다면 나쁠 거 없죠.”
훌륭한 매니저의 표본다운 대응을 보여준 윤팀장에게 이번에는 나와 시연이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윤팀장님 너무 잘하시는데요? 매니저 하기 전에 연기했었어요?”
“그냥 뭐....”
난 너무 잘해서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반응을 보니 정말 과거에 연기를 했던 것 같았다.
“어? 정말인가 보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주 잠깐 연극판에서 있었던 것뿐이에요. 뒤에서 연습만 좀 하고 무대에 서본 적도 없어요.”
시연과 나는 처음 듣는 그의 과거에 놀랐지만, 우리의시선을 피하며 괜히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 것 같아 더는 묻지 않기로 하고 분위기를 바꿔보았다.
“성공한 덕후가 되신 기분이 어때요? 아까 양수영씨하고 잠깐 대화도 하시는 거 같던데.”
“스태프들이 제가 팬이란 걸 양수영씨한테 말했더라고요. 양수영씨는 감사하게도 같이 사진도 찍어주시고 와이프도 팬이라고 하니 제 폰으로 와이프한테 영상편지도 찍어주셨죠. 정말 양수영씨 팬 하길 잘했어요. 만약 제가 중학생으로 돌아간다 해도 또 양수영씨 팬 할 겁니다.”
윤팀장은 마음만은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소년의 얼굴이 되어 양수영의 팬서비스에 감동하고 있었다.
윤팀장은 팬들이 일정거리 이상 접근하면 조금의 용서도 없이 엄격하게 막아 팬들에게 원망의 목소리를 듣지만, 새별너울에게는 팬 서비스와 단 1초라도 팬을 상대할 때는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한다
윤팀장 자신이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한결같은 팬이며 훌륭한 매니저이기에 이런 태도와 자세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 촬영이 해지면 하는 거죠? 한참 남았으니 식사하고 오죠. 저희 10시에 밥 먹고 여태 안 먹었잖아요. 윤팀장님하고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금 시간은 4시. 하지가 지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돼서 지금은 1년 중 해가 가장 길 때다.
윤팀장의 마지막 씬 촬영은 적어도 3, 4시간은 기다려야 했기에 주변에서 밥 먹고 올 시간은 충분했다.
“메이크업한 상태로 밖에 나가 밥 먹기 민망하고 긴장해서 그런지 배도 안 고파요. 1시간 반이나 2시간 정도 있으면 저녁 밥차 올 테니 전 밥차에서 먹을게요. 두 분만 먹고 오세요.”
“로케라 대기실도 없는데,저희가 차 가져가면 계실 데도 없잖아요. 같이 가요.”
“엑스트라 버스에서 한숨 자면 됩니다. 엑스트라 숫자는 적은데 대형버스라 자리 많아요.”
결국 윤팀장의 고집을 못 이기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서로 전하고 나는 시연과 둘이 식당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