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190화 민폐 2
성호철은 안영일의 눈을 직시했다.
초췌하고 핼쑥한 그의 얼굴과 달리 눈동자만은 힘을 잃지 않고 또렷했다.
“저 암이에요. 췌장암. 아버지도 저 어렸을 때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유전인가 봐요. 의사 말로는 한 4, 5개월 정도 남았다고 하더군요.”
배 타고 나이 먹다 보면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 많아지면서 죽음에 덤덤해지지만, 성호철의 담담한 시한부 고백에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성호철은 그가 많이 아꼈던 후배인 만큼 비록 말없이 사라졌다 해도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 성호철이 4년 만에 나타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하니 이제야 나타난 그에 대한 원망 반, 아직 한창인 이를 데려가려는 세상에 대한 원망 반이 안영일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하고 배에서 내리고 사라졌으면 잘 먹고 잘살아야지. 멍청하게 이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배 타는 거 말고는 모르는 내가 한심해 보일 정도로 떵떵거리면서 잘 살아야 할 거 아냐. 이제 겨우 40 초반이면서 죽을 날 받고 나타나면 어떡해. 이 새꺄.’
몇 번 속으로 깊은숨을 들이킨 안영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호철. 너 진짜 개새끼인 거 너도 알지?”
“네 잘 알죠. 이왕 개새끼 된 거 끝까지 개새끼 되려고 해요. 그러니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저 죽는 건 상관없는데, 작년에 태어난 딸이 둘 있어요. 쌍둥이인데 엄청 이쁘고 귀여워요. 그런데 애 엄마가 도망갔어요. 여기서 만난 러시아 여자였는데, 애 낳고 얼마 안 돼 러시아 남자랑 눈 맞아서 도망갔죠. 뭐,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하룻밤 실수로 애 생겨서 결혼한 거라 처음부터 오래갈 결혼이 아니긴 했죠.”
“서,설마 너 애들을 나한테? 너도 알다시피 난 선장이야. 뱃놈이라고. 거기다 이 나이 먹도록 혼자 사는 홀아비고.”
“저 개새끼 맞지만,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아요. 애들은 한국에 있는 친척이 맡아 주기로 했고, 선장님께는 애들 잘 크는지 봐줄 후견인을 부탁하고 싶어요. 10년 넘게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친척보다 선장님이 더 믿음직하거든요. 그러니 선장님 한국 들어갈 때마다 한 번씩 애들 잘 크고 있나 살펴보기만 해주세요. 저 10년 넘게 배 타고, 주재원 하면서 애 둘 대학 졸업시킬 정도는 벌어놔서 선장님 돈 들어갈 일은 없을 거에요.”
“씨발, 이런 상황에서도 돈 얘기 하는 거 보니 10년 넘게 나한테 밥 한번 안 살 정도로 지독했던 짠돌이답네! 내가 설마 내 돈 들어갈까 무서워서 그 정도도 안 할까 봐 그러냐.”
안영일이 은연중에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는 걸 안 성호철은 안도했다.
안영일이 비록 입은 거칠지언정, 성호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남겨질 딸들에대한 걱정이 조금은 사라지자, 성호철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저 짠돌이는 맞지만, 밥 사기 싫어서 안 산 게 아니잖아요. 선배 있는데 무슨 후배가 돈 내냐고 선장님이 맨날 고집 피웠으면서.”
“내가 고집 피워도 살 놈들은 다 사더라.”
“자, 자, 지나간 일은 잊으시고, 여기 애기 사진 보세요. 이거 보면 저한테 안 좋은 감정 남았던 거 싹 풀릴 거예요. 오른쪽이 다은이, 왼쪽이 다연이. 다은이가 언니고, 다연이가 동생이에요. 이쁘죠?”
성호철이 마의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안영일에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갓 돌을 지난 정도의 애기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엄마가 러시아 사람이라고 해 서양인 같은 외형일거라 생각했지만, 검은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가 혼혈이 아닌 부모 모두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이쁘네. 내가 본 애기들 중에 제일 귀여워. 애들 보니까 네놈이 한짓 중에 가장 잘한 짓 같다.”
“그렇죠? 직접 보면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이뻐요. 선장님도 직접 보면 첫눈에 반하실걸요. 애들이 있으니 도망간 애 엄마 보고 싶단 생각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애기들 칭찬에 우쭐거리며 환하게 웃던 성호철은 6달 후 세상을 떠났다.
성호철이 세상을 떠나고 안영일은 항해가 끝날 때마다 친척 집에 맡겨진 애들을 잊지 않고 찾아갔다.
안영일이 항상 얼마 정도의 돈과 선물 보따리를 잊지 않고 챙기긴 했지만, 애들을 맡은 친척집은 잘 키우고 있으니 그만 좀 오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1년 2년이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 10살이 되었다.
성다은과 성다연은 8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어 키즈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인 같은 외모지만 어딘가 서양인 같은 느낌이 나는 이쁘고 깜찍한 둘은 키즈 모델로 인기를 끌었다.
일도 끊이지 않고 들어왔고, 인터넷에 그녀들의 사진이 올라오면 사진을 보며 하악 거리는 위험한 사람들과 역변의 위험성이 큰 일명 ‘마의 16세’ 를 부디 잘 넘기기를 기도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성다은과 성다연이 벌어오는 돈이 커지자 그녀들을 맡은 친척은 점점 더 그녀들을 내몰기 시작했다.
안영일이라는 후견인이 따로 있어, 성호철이 남긴 돈을 쉬이 마음대로 쓸 수 없던 친척은 그녀들이 벌어오는 돈은 전부 그들이 가져갔다.
학교 가는 날보다 스케쥴 가는 날이 많아지고, 10살짜리에게 살찌면 안 된다고 굶기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그녀들의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이때 안영일은 멀리서 그녀들이 활동을 지켜보며 잘살고 있겠거니 안심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를 기점으로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그 친척은 아이들을 잘 돌봐주었고, 아이들도 이제 몇 달에 한번 찾아가는 늙은 자신보다는 학교를 다니며 또래 친구를 만나고 더 넓은 세상을 접하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하고는 그녀들을 찾아가는 횟수를 점차 줄였다.
언제나 바다를 나가 자주 만날 수 없는 할아버지 보다 지금의 가족에게 더 정붙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3년이 더 지나 안영일도 슬슬 은퇴를 생각할 때 즈음, 그는 아이들을 맡은 친척으로부터 큰돈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친척은 머뭇거리며 아이들 병원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명도 아니 두 명 모두 병원비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는 당장 달려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항해 중이라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2주는 더 있어야 했다.
급하다는 말에 필요하다는 돈을 쓰도록 허락하고 2주 후에 찾아갔을 때 아이들 상태는 최악이었다.
아이들은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13살에도 키즈모델로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지만, 서양인의 피가 섞인 탓에 2차 성징과 성장이 빨랐던 아이들이 키즈모델을 그만둬야 할 만큼 자라자 그만 크라고 굶기고 학대한 것이다.
아이들의 몸 상태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계에 몰린 그녀들의 정신 상태가 최악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할아버지”하고 달려와 안겼을 아이들이 그를 보자마자 얼굴을 가리고 도망가고, 구석에 숨어 벌벌 떨며 엉엉 울었다.
병원비가 필요하다며 받아 간 돈은 병원비가 아닌 자기 자식들 유학비로 보냈고, 굳이 병원비라 언급하여 안영일을 오게 한 것도 의도적이었다.
그동안은 안영일에게 성호철이 맡긴 양육비를 받아야 했기에 앞에서 착한 척을 했던 친척이었지만, 키즈모델을 시키며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고 귀찮게 됐으니 안영일에게 아이들을 맡기겠다는 심보였다.
아이들을 보고 충격에 빠진 안영일 옆에서 친척이란 남자는 일부러 옆에서 성질을 건드렸다.
안영일에게 몇 대 맞은 뒤 폭행죄와 엮어 경찰에 신고를 못 하게 하려는 심산이었지만, 60년대에 자기 힘만으로 대학을 나와 선장으로 수십 년을 일한 안영일은 절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뱃사람이라는 선입견에 자기 생각대로 일이 풀릴 거라 착각한 친척이 멍청했다.
안영일이 112에 전화하려 하자 이 일이 알려져 기사화되면 애들 인생 망치는 거라며 친척이 달려들었지만, 한 평생 억센 선원들을 상대해 온 그에게는 우습지도 않은 반항이었다.
친척은 구속되고 아동학대로 징역을 살게 되었지만, 아이들의 정신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차도가 없자, 그는 직접 부딪히겠다 각오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인적없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평생 바다에서 살아온 그가 바닷가가 아닌 산을 택한 데에는 바다 때문에 아이들을 내팽개쳤다는 죄책감으로 다시는 바다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있었다.
처음에는 울면 불며 그를 피하던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 악에 받쳐 그를 욕하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안영일도 저렇게 악을 써서 어린 마음에 쌓인 응어리와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이 더 화를낼 수 있도록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워가며 지내기를 몇 년, 아이들이 얌전해지는 날이 많아지자, 다음은 아이들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접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민박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많이 나아졌다는 기대를 안고 민박 손님을 받은 첫날, 1층에 내려와서 손님과 인사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는 자체로 안영일은 매우 만족했다.
점점 나아진다고 흐뭇해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일과 민박 일을 병행하던 어느 날, 아이들이 집 앞마당에서 다정하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손님들을 우연히 보고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남녀가 가까이 있는 모습에서 친척 아저씨가 자기들을 때리고, 밀치고, 발로 차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안영일은 하나를 해결하자마자 또 다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지만, 일단은 하나하나씩 차분히 해결하기로 했다.
먼저 그녀들의 대인기피증부터 해결하고, 그다음에 발작 증세를 해결하기로 말이다.
그래서 이런 불안정한 민박집을 유지한 채 때때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받으며, 남녀는 방을 따로 쓰라는 규칙을 만들고, 그녀들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악과 한을 풀어낼 수 있도록 이년 저년 하면서 거칠게 부르고 있다.
이런 날이 계속되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1층으로 내려오고 밖에도 나갈 날이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두 번째 맥주캔을 완전히 비운 안영일이 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미친년들 집에서 하룻밤 보내는 방값이 아깝지 않은 이야기지?”
“네, 정말 이야기 값은 따로 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준다면 거부하지 않아. 내가 벌어놓은 게 좀 있긴 해도, 나 죽은 다음을 생각하면 더 악착같이 벌어놔야 하거든.”
그는 무심코 위를 쳐다보았다.
그가 죽은 다음 위에 있는 자매들이 살아갈 돈을 걱정하는 거겠지.
결혼도 안 하고 평생 배만 탄 그였으니 돈은 많이 모았겠지만, 그녀들을 데려오고 벌써 7년이 흘렀다.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는 충분할지 몰라도 그녀들의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족할 것이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한 가지 궁금한 걸 물었다.
“그 친척들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그걸 왜 물어?”
“알고 계실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아까, 그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친척 이야기를 하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이야기를 알고 있고, 속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지만, 나쁘지는 않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허허, 진짜 귀신이 여기 있었네. 뭐, 못 할 말도 아니니 알려주지. 애들 쥐어짠 돈으로 자식들 해외 보냈더니 아들은 거기서 마약 하다가 걸려서 감옥 갔다가 폐인 돼서 돌아왔고, 딸은 그 나라 남자랑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애 둘을 혼자 키우고 있다고 하더군. 딸이 애 둘 혼자 키운다는 말 들으니 업보라는 게 있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부모 둘은 어디서 일당 받고 농사 돕는다고 했던가, 뭐 그래.”
다른 애들 죽여가며 만든 돈으로 자식들 유학 보냈더니, 아들은 폐인이 됐고, 딸은 이국에서 고생하고 있다.
후배가 죽으며 남긴 딸 둘을 망친 거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이 정도도 영감님 입장에서는 나쁘지는 않겠지.
업보가 정말 있다면, 이 이상을 바란다면 자신의 업보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남자 손님. 내가 한 말이 농담 아닌 걸 알았으니 여자 손님 방에 안 쳐들어갈 거지? 이상한 소리 조금만 들려도 위에서 소리치고 난리 날 거야. 여기 방음이 그다지 좋지 않아.”
“제가 쳐들어갈 거에요. 많이 시끄러울 테니 귀마개 꼭 하고 자세요.”
“그럴 거면 사장, 직원 소리를 왜 했어!”
“연인 아닌 척하고 몰래 하는 게 더 짜릿하잖아요.”
“나 참, 옛날 같았으면 어른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 혼냈을 텐데, 우리 미친년들을 하도 봐서 그런지 아가씨가 정상으로 보여서 그럴 맘이 안 생겨.”
“저도 붙어먹니 뭐니 계속 성희롱하는 민박 주인 참고 있어요. 저희니까 웃으면서 받아주는 거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경찰에 신고했다고요. 다 아저씨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애초에 그럴 사람들이었으면 아까 문 앞에서 도망갔어.”
이제 할 말 다 했는지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을 보면 알 수 있는 깔끔한 성격답게 우리가 먹은 맥주캔까지 집어다가 문밖에 나가 재활용 봉지에 넣고 다시 돌아온 뒤, 부엌에서 행주를 가져다가 물기가 남은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았다.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 행주를 빨고 널어놓은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난 이제 잘 거야. 자네들도 자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귀마개 꼭 하세요”
마지막까지 당돌한 전시연을 보고는 그는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고 달칵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예 문을 잠군 것 같았다.
“왜 그랬어?”
밖에서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애쓰자고 한 그녀가 민박 주인 앞에서 사실상 연인임을 고백한 것도 모자라 오늘밤 섹스를 할거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나는 시연이 아무 생각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이런 짓을 할 여자란 걸 알고 있기에 이유가 궁금해졌다.
“사고 치게요. 아주 큰 대형 사고로요.”
“무슨 말이야?”
의아함 가득한 나에게 그녀는 말없이 씨익 웃어보였고, 그 모습에 나는 시연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몰라도 편히 자기는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