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209화 참 편하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 정기 검사도 병원에 동행했다.
같은 초음파라도 사진보다 영상으로 볼 때의 감동이 더욱 컸고, 아빠로서 책임감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이번 주만 지나면 다음 주부터는 임신 중기에 들어가기도 하는 시기여서, 지금처럼 1, 2주 간격으로 방문하는 게 아닌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검진을 받으면 된다.
“어서오세요. 김지연님, 허영애님, 연수진님, 신재윤님.”
두 번째로 찾은 병원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접수대 뒤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일어나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지난번에는 여자들 이름만 불렀는데, 이번에는 나에게도 인사를 건냈다.
나는 이번에 겨우 두 번째 방문이지만, 여자들에게 양희선이 인터뷰 내용을 병원의 간호사, 직원들에게도 공유하는 걸 허락했다고 들었으니, 이 여직원도 내 얼굴을보는 건 두 번째지만 나에 대해서는 잘 알 거다.
나 또한 지난번에는 여자들에게서 한걸음쯤 떨어져 뒤에 서 있었지만, 이제는 알 거 다 아는 사이인지라 아주 당당하게 영애와 수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 딴에는 임산부인 그녀들을 부축해주는 거지만, 남이 보면 영락없이 염치없는 바람둥이로 보이는 자세인 나를 보고도 경멸의 눈이 아닌,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자세를 잃지 않고 미소와 함께 맞이하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의 비밀을 알고 지켜주는 이해자이자 조력자인 그녀를 여직원 A로만 알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그녀의 가슴 왼편에 붙어 있는 이름표에서 이름을 확인했다.
그녀의 이름은 홍가희였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목 뒤로는 머리가 잘 보이지 않도록 하는 일반적인 리셉셔니스트와 달리 그녀는 펌이 섞인 검은 장발을 맵시 있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홍가희씨. 10시 검진 예약 왔습니다.”
“네. 선생님도 기다리고 계세요. 진료 순서는 김지연 님부터입니다. 허영애님, 연수진님도 원하시면 대기실에 계실 필요 없이 진료실에 같이 들어가셔도 됩니다.”
다 아니까 참 편하네.
눈치 안 봐도 되고, 기다릴 필요도 없고.
나는 영애와 수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떡할래? 대기실에 있을래 같이 들어갈래?”
“저도 갈래요. 제 배 속의 아이뿐만 아니라 지연이, 영애 아이 모두 우리 아이. 제 아이예요. 그동안은 사진으로만 봤으니 오늘은 영상으로 보고 싶어요.”
“자기야, 나도.”
“누나는 어때? 괜찮지?”
“물론이지. 나도 새아랑 별이 보고 싶었는걸.”
새아, 별이는 각각 영애, 수진 아이의 태명이다.
누나 아이의 태명은 너울이다.
다른 나라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태어나기전의 아이에게 태명을 지어준다.
세 아이의 태명을 지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태명 짓는다고 내가 며칠을 고민하는 걸 보더니 누나가 영애, 수진과 논의해서 새별너울 활동 끝나고 생긴 아이들이라고 새별너울에서 나누어 엄마 나이순으로 앞에서부터 새아, 별이, 너울이로 지었다.
새별너울은 자기들 그룹명에서 태명을 따왔다고 좋아했으며, 니키는 나중에 임신하면 자기 아이 태명은 리드레아에서 따와 레아라고 짓겠다고 미리 찜해놓았고, 제이는 맏언니가 그룹이름에서 뒷글자 가져갔으니 막내가 앞글자를 가져겠다며, 앞글자 리드(REED)의 우리말인 갈대를 찜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진료실에 들어가자 양희선과 지난번에 본 간호사가 있었다.
이 병원에 간호사 한 명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본 적이 없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머리 자르셨네요?”
양희선과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으려던 나는 일주일 새에 변한 양희선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지난번 양희선을 처음 봤을 때, 나름 애는 쓰는데 어설프다고 하는 누나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누나가 중학생이 갓 배운 거 같다던 화장은 떡칠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진하기만 해서 화장이 아닌 분장처럼 느껴졌고, 머리도 미용실에 가서 애를 쓴 것 같았지만 펌이 너무 과해 90년대 미스코리아 머리 같은 사자머리에 가까운, 한마디로 촌스러운 머리였다.
장식이 과한 블라우스는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였고, 그마저도 너무 큰 걸 샀는지 맵시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헐렁했다.
한마디로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일반인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잡지나 티비에서 본 하이패션 모델들을 그대로 따라 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양희선은 길었던 머리를 턱을 살짝 넘는 칼단발로 짧게 잘라, 능력 있는 전문직 여성처럼 보였고, 화장도 볼 터치를 줄이고, 붉은 입술을 강조하여 성숙미를 강조했다.
지난번에는 20대 초중반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애써 따라 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제 나이에 알맞은 스타일을 찾았다.
“허영애씨가 인터뷰하러 오셨을 때 이렇게 하는 게 더 어울릴 거 같다고 하셔서 과감하게 잘라봤어요.”
영애가 양희선을 보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메이크오버를 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고 했었는데, 그동안 정기검진을 통해 얼굴을 익히고, 인터뷰에서 할 말 못 할 말을 다 하면서 좀 친해졌는지 조언을 해준 모양이다.
양희선은 새로운 자신의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지, 눈치만 보던 전과 달리 앞으로 몇 가닥 흘러나온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보였다.
헤어스타일이 정말 중요하구나.
전에는 풍성하다 못해 넘치는 머리 때문에 얼굴까지 커 보였는데, 지금은 얼굴이 엄청 작아 보여.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나이사님이랑 사모님이 선생님 보시면 깜짝 놀라겠는걸요.”
“언니한테 사진 보내줬더니, 언니가 30년 만에 저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았다고 했어요. 저 단발은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머리뿐만 아니라 옷도 지난번에 비하면 단조롭지만, 사이즈도 딱 맞고,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화장 떡칠이라 할 만큼 과하게 진했던 화장도 옅어지고, 입술과 볼에 포인트만 주니,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대조되어 성숙미를 내뽑고 있었다.
예전에는 뭐든지 조금 과해서 부담스럽고 엉성해 보였지만, 지금은 화장, 헤어스타일, 코디 모두 심플 이즈 베스트란 말이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황윤정씨, 문혜리씨 덕분이에요. 절 보자마자 제가 패션잡지에 나온 옷들을 무작정 따라 한 걸 알아보시고 저한테 맞는 코디를 추천해줬어요. 힐도 높다고 다 이쁜 게 아니니 발 아프게 킬힐 수준의 하이힐만 고집할 게 아니라 코디에 맞춘 적당한 힐을 고르는 방법도 알려주셨어요. 화장도 색조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고 충고해 주셨고요, 역시 전문 스타일리스트는 다르다는 걸 실감했어요.”
영애마저도 좀 친해지기 전까지 망설였던 걸 윤정과 혜리는 스타일리스트의 본능을 참을 수 없었는지 첫 만남부터 많은 조언을 해주었나 보다.
옷에 대해서는 내가 언급하지도 않았음에도, 먼저 나서서 과시하는 걸 보니 양희선도 변한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드나 보다.
자세의 변화만 봐도 그녀의 자신감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 앞쪽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있어 책사에 앉아 공부만 하느라 등이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불편한 기색 없이 몸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다.
하긴,아무리 공부밖에 모른다고 해도 여자인 이상 이뻐지면 기분 좋은 게 당연하지.
영애, 윤정, 혜리가 합심하여 촌스럽고 엉성하던 여자를 세련된 전문직 여성으로 재탄생시킨 결과를 보니 내가 다 뿌듯하다.
“저희 코디들이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양희선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짓고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간호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유한나 샘은 어떠세요?
”네?“
”한나샘도 전이랑 변했어요. 모르시겠어요?“
양희선은 극적인 변화를 보여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나, 유한나라는 간호사는 지난번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유한나는 따뜻한 미소로 환자를 보살피는 백의의 천사 간호사보다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쿨뷰티 비서가 더 어울릴 듯한 여자였다.
차가워 보일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때때로 작은 미소와 눈웃음을 짓는 얼굴, 헤어스타일도 어느 정도 길일지 모르겠지만, 전부 말아 올린 머리.
여름형이라 조금 얇아 보이는 반소매의 원피스형 핑크색 간호사복에, 치마가 조금 짧아 보이는......
”어? 옷이 바뀌었나요? 지난번에는 바지였던 거 같은데?“
지난번 왔을 때 본 간호사복도 상의는 핑크색이었지만, 하의는 흰색 바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역시 알아채실 줄 알았어요.“
“요즘도 이런 간호사복이 있어요? 다 바지 아니에요? 간호사 캡 없어질 때 바지로 다 바뀐 걸로 알고 있는데.”
흔히 간호사 하면 떠올리는 간호사 캡, 몸매가 드러나는 미니스커트 스타일의 간호사복은 1960년대 미국에서 미니스커트가 유행할 때 입었던 간호사복이며, 1970년대 들어서부터 다시 치마가 길어지고 80년대부터는 치마와 바지가 혼용되다가 90년부터 바지, 치마에 구애받지 않고 간호사별로 직종과 맡은 업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간호사복을 입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살짝 늦어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치마 길이가 무릎을 살짝 올라갈 만큼 짧아졌다가 80년대 들어서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형태의 흰 간호사복을 입었으며, 80년대 후반부터 원피스, 혹은 투피스형 흰 간호사복에 상의에는 짙은 색의 가디건을 입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바지로 바뀌기 시작하고 간호사 모자도 현장에서 사라진다.
즉, 지금 일반적으로 알려진 간호사 코스프레의 원형은 60년대 스타일이다.
이런 거 보면 지금보다 옛날이더 과감한 경우가 많다.
90년대에는 배꼽티, 요즘 말로 크롭티만 해도 90년대 중반에 크게 유행하고 방송에도 나왔으나, 90년대 후반부터 은연중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00년대 논란을 거쳐 2010년 국정감사에서 거론되어 규제안이 마련되었다.
2010년 이후 걸그룹들 사이에서 바지나 치마를 배까지 끌어 올리는 하이웨이스트 스타일이 유행한 데는 다리가 길어 보이기 위해 입은 것도 있으나 배꼽을 가리기 위함도 있다.
그래서 상의가 짧은 의상을 입었을 때는 춤을 추다가 배꼽이 노출될 때를 대비해 테이핑으로 배꼽을 가린다.
유행이란 돌고 돌아서 크롭티가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다시 유행했지만, 연예인들도 사석이나 화보, 뮤직비디오, 행사에서나 배꼽을 노출했지, 음방, 예능에서 테이핑을 하여 배꼽을 가리거나 하이웨이스트 하의 입는다.
지금도 음방은 20대 초중반의 걸그룹, 여자 가수의 배꼽 노출은 금지고, 20대 후반부터는 가끔 모른 척 넘어가 주기도 하는데, 기회사쪽에서 괜히 의상 가지고 방송국과 심위의원회 신경을 건드리기 싫어서 대부분 배꼽을 가린다.
“잘 아시네요. 맞아요. 종합병원, 개인병원 할 거 없이 전국 대부분 병원들은 활동성, 편의성, 실용성을 중시한 바지를 입고, 소수의 강남 최고급 피부과, 성형외과 중에서도 소수만 이런 스타일을 입죠. 거기도 실무간호사들은 바지를 입고, 고객응대하는 사무원들만 이런 스타일로 입어요.”
“그런 흔치 않은 옷을 왜 갑자기 이 병원에 도입하신 겁니까?”
일반적인 치마형의 간호사복은 사무직에 가까운 간호사일 경우 종종 입지만, 이런 원피스형의 몸매가 드러나고 치마가 짧은 간호사복은 이름만 간호사복이지 실제는 피부관리사, 마사지사, 미용관리사가 입고, 활동성이 중요한 간호사들은 이런 스타일의 간호복을 근무복으로 입지 않는다.
“한나샘이 간호사 생활 내내 이쁜 간호사복은 한 번도 안 입어봤다고 더 나이 먹기 전에 입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번에 도입해봤어요. 이걸로 아예 바꾼 게 아니라 예전 옷과 병행해서 입을 거에요.”
이쁜 옷도 좋지만, 일할 때는 역시 바지가 편하지.
나이 얘기가 나오자 수진이 앉은 채로 몸을 돌려 유한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한나 간호사님이라고 하셨죠? 잘하셨어요. 나이 떠나서 괜찮을 때 이것저것 다 해봐야 해요. 저도 10년만 젊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후회하기보다 아직 괜찮을 때 할 수 있는 거 다 하자 해서 이렇게 39살에 아이도 가질 수 있었죠. 전 이 나이에 아이 가진 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오히려 내일 모래 40인 나이에도 이 사람 마음에 들어서 아이까지 가졌다고 소문내고 싶을 정도로 자랑스럽죠. 이 아이 낳고도 힘닿는 데까지 계속 낳을 거랍니다.”
“제가 연수진님 인터뷰 하러 오셨을 때 하신 말씀 듣고 반성 많이 했어요. 겨우 서른 살밖에 안 된 주제에 세상과 남자에 대해 다 아는 척하면서 평생 혼자 살거라고 떠든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 보려고요.”
누나가 31살이고, 양희선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의대 입학해서 전문의 따는데 빨라야 11년이 걸리고, 33살인 사모님 동생이니 31살이나 32살일 거다.
30살이면 여기 있는 여자들 중가장 어리다.
수진이 인터뷰에서 무슨 말을 한지는 몰라도, 자기보다 9살이나 많은 수진을 보고 뭔가 마음에 와닿은 게 있었나 보다.
그나저나 아까 접수대 직원도 그렇고, 이 간호사도 그렇고 좋게 봐주니 안심이네
사모님, 나이사님 덕분에 여자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서 다행이야.
내색은 안 했지만, 양희선부터 시작해 이 병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했는데, 전부 호의적이어서 다행이다.
내가 보지 못한 간호사가 한 명 더 있다고 하지만, 네 명 중 3명이 이러니, 나머지 한 명도 비슷하겠지.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누나, 영애, 수진은 검사를 마쳤다.
아무 문제 없이 순조롭다는 얘기에 역시나 가장 기뻐한 건 수진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신체나이까지 나이에 비해 젊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이를 아예 무시할 순 없다.
노산인 만큼 가장 위험하다는 임신 초기를 무사히 넘긴 것이 많이 기쁜지 수잔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모두의 검사를 마치고 주의 사항과 챙겨 먹어야 할 영양제, 식품 등의 설명을 듣고 이야기가 끝날 갈 때 즈음 누나가 말했다.
“섹스는 언제부터 할 수 있죠?”
임신 4주 후부터 12주까지 아예 섹스가 금지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기에 전부 30살이 넘은 누나와 영애, 수진은 자지를 삽입하는 섹스를 삼가고, 오랄 섹스나 파이즈리를 하거나, 여자들과의 레즈 섹스를 주로 즐겼다.
임산부는 임신 3개월 이전에는 성욕이 감퇴하지만 3~4개월부터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성욕이 회복되거나 더 강해진다.
적절한 섹스는 임산부의 정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권유되는 편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임신 중 섹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부부 모두 거부하거나, 남편이나 부인 한쪽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가능하지만, 좀 더 확실히 안전을 기하기 위해 이번 주까지는 참으시고 다음 주부터 하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하시더라도 너무 격렬하거나 배에 무리가 가는 체위는 절대 하지 마세요, 체위는 측위가 가장 좋아요. 여자 움직임이 많은 여성 상위도 괜찮아요. 여성 상위가 임신 중 섹스 만족도에서 가장 높았다는 연구결과도 있죠. 그 외 후좌위도 괜찮고 후배위도 너무 오래 하지 않는다면 괜찮고요.”
의사는 의사네.
이래서 우리를 연구한다고 했구나.
양희선은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는 기색 없이 산부인과 의사답게 하나하나 주의할 점을 누나에게 알려주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신재윤씨. 임신 초기에는 너무 깊게 하면 안 되고 오래 해도 안되는 등 주의해야 할 게 있지만, 중기부터는 괜찮아요. 그래도 너무 격렬하면 안 되고 부드러운섹스가 중요하다는 걸 명심해주세요. 호르몬 영향으로 여자분들은 자제가 힘드실 테니, 신재윤 씨가 적절히 조절 하셔야 해요.”
내가 주의점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옆에 있는 여자들은 울상이 되었다.
오늘부터 섹스를 할 수 있을 줄 알고 아침부터 잔뜩 기대했는데, 이번 주까지는 참으라는 말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지, 우리 하린이 저녁에 오랜만에 모녀덮밥으로 보지 대준다고 아침부터 기대 많이 했는데 큰일이야.”
“언니, 효정이 도야. 오늘 오랜만에 나랑 모녀덮밥, 쌍둥이 덮밥 컨셉 다 하겠다고 잔뜩 신났단 말이야.”
“나도 남편한테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집에 안 들어올 거라고 하고 짐도 다 챙겨서 왔어.”
정말 하나도 숨김없이 다 말했다고 하더니, 양희선과 유한나가 옆에 있는데도 이 여자들은 하나도 안타까움을 숨기는 기색 없이 모두 내뱉었고, 양희선과 유한나도 모녀 덮밥, 쌍둥이 덮밥, 보지, 남편 운운에도 놀라기는커녕 웃고만 있었다.
여자들이 아쉬워하자, 웃고 있던 양희선이 미안한 표정으로 여자들을 조심스레 위로했다.
“초음파상으로 태반이 안정적이어서 지금도 섹스는 가능하지만, 여러분 모두 30살 이상이라 20대 임산부들보다 더 주의해야 해요.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알겠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 주도 와야 하나요?”
“네. 한주만 더 오시면 되고, 그다음부터는 한 달 단위로 볼 거예요. 물론 그 사이사이 어느 때라도 원하시면 병원에 오셔도 되고요.”
달력 보고 계산할 때는 이번 주로 임신 초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있어야 하나 보다.
이래서 아무 의학적 지식도 없으면서 인터넷에서 좀 본 것 가지고 다 아는 척하면서 미리 알아서 결정하면 안 되는 거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뭐죠?”
이제 할 말 다 했겠거니 하고 일어서려던 찰나, 양희선이 우리에게 말했다.
“연구는 끝이에요. 제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인터뷰 한 번씩 한 거밖에 없잖아요? 저희에 대해 벌써 다 알아내신 거에요?”
“아니요. 아무리 여러분을 관찰하고 조사해도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이 이상은 시간 낭비라고 느꼈어요.”
양희선은 인터뷰를 통해 우리에 대해 알아낸 사실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알려주었고, 여자들의 정신상태, 현재 느끼는 행복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얼마나 우리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지에 설명해주었다.
우리에 대해 제 3자, 그것도 의사의 객관적인 의견을 듣고 보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미묘한 기분과 함께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완전 사이비 종교고 내가 교주잖아!
이 자리에 있는 양희선, 유한나, 접수대의 홍가희 모두 웃으면서 편하게 대하길래, 넓은 이해심으로 우리를 이해해 주는 거로 생각하며 안심하고 고마워했는데, 듣고 보니 우리같이 이상한 사람들한테 도망 안 간 게 신기할 정도다.
어쩌면 있다고만 들었고, 본적은 없는 전설의 간호사 한 명은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는 연구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여러분께 폐도 되고요.”
“폐 전혀 아니에요. 저도 시원하게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고, 다른 애들도 선생님하고 이야기해서 좋았다고 했어요. 그러니 더 하면 안 돼요? 시연이도 오늘 편집회의 외근만 아니었으면 저 따라오고 싶어 할 정도였어요.”
정말 어지간히 남들한테 말하고 싶었구나.
부잣집 외동딸에 수려한 외모, 사교성 많고 밝은 성격으로 평생 아쉬운 거 하나 없이 살아온 영애가 남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영애가 그녀답지 않게 양희선에게 인터뷰를 계속하자며 간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수진은 말만 안할 뿐 눈빛으로 영애를 열심히 응원했고, 누나는 사모님이라는 외부의 수다상대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덜한 것 같았다.
영애와 수진이 저토록 원하는데 모른 척 할 수 없어 나도 거들어 양희선을 설득했다.
“선생님. 연구가 아니더라도, 카운슬러처럼 주기별로 상담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화하다 보면 지금은 몰랐던 것도 새롭게 알게 될 수도 있으시잖아요. 그럼 다시 연구 거리가 생길 수도 있고요.”
”.....“
양희선도 내 말이 억지는 아니라 여기고 조금고민하는 듯 보이자, 나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김에 확실히 들 수 있도록 재빨리 말을 이었다.
“원하신다면 우리 회사, 집으로 오셔도 됩니다. 말로만 듣는 것보다 직접 보시면 또 다르지 않습니까?”
“네? 직접 보라고요?”
양희선뿐만 아니라 유한나까지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여자들은 양희선에게 우리의 성생활에 대해 낱낱이 밝혔다.
나는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과 터전, 실생활에서 어떻게, 얼마나 화목하게 지내는지 보라는 의미로 말했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우리 성생활을 직접 보라고 하는 꼴이 돼버렸다.
“아,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황급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손을 흔들어가며 부정했으나, 양희선과 유한나는 얼굴이 이미 빨개진 채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고, 영애와 누나는 의외라는 듯이 신기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야. 자기 노출증이었어?”
“재윤아. 너 그런 취향이었니?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난 네가 하자는 거 다 했을 텐데.”
“아니야.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나는 한동안 입만으로도 모자라 손, 발까지 동원해 필사적으로 오해를 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