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0화 〉 380화 일이 커졌어 (380/425)

〈 380화 〉 380화 일이 커졌어

* * *

“.......이상으로 회의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장 포함 포커스 엔터의 팀장급 이상 전 직원이 참석하는 주간 정례회의가 끝났다.

오민정 이사는 회의에 참석한 이중 그녀와 함께 유이한 여성인 스타일리스트 팀장 함께 담소를 나누며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그녀들이 나가고, 다음으로 사장과 함께 실질적으로 포커스 엔터를 지탱하고 있는 전무가 나가자 남은 실장, 팀장들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회의가 끝나고 지금부터는 오민정 팬클럽 모임.

“후우. 오 이사님 너무 이뻐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요.”

박 팀장이 길게 숨을 내뱉고는 손부채를 부치며 말하자, 허도권 프로듀서를 비롯한 이 자리에 모든 이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오민정은 일반적인 회사원 같은 헐렁한 정장에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액세서리도 없었다.

기껏해야 밋밋한 작은 귀걸이가 전부였다.

머리도 길게 뜨려 답답할 정도로 이마와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아이돌 메이킹 드래프트 날 신재윤을 만나러 갈 때는 명품으로 도배하고 화려한 다이아몬드 귀걸이에 정성스레 꾸몄으며, 얼굴이 잘 보이도록 올림머리에 은빛 헤어핀으로 장식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른다.

오늘의 오민정은 완전히 달랐다.

평소에는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평범하게 다녔다면, 오늘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 3세 아가씨처럼 명품임이 분명한 섹시하면서 맵시 있는 검은색 원피스가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여기에 색조 화장과 화려한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플랫슈즈에 가까운 굽 높이 4, 5cm 정도의 힐 대신 오늘은 킬힐이라 불러도 굽 높은 하이힐까지.

때문에 먼저 회의실을 나가는 오민정의 늘씬하고 섹시한 뒷모습에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었다.

오민정이 오랜 은거 생활을 접고 포커스 엔터를 인수한 것이 재작년이니, 여기 있는 이들이 오민정을 본 건 길어봤자, 만 2년이다.

이외 작년에 입사한 이들도 올해 입사한 이도 있다.

그 2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오민정의 모습에 팬클럽을 자처하는 3, 40대 팀장, 실장들은 물론, 체면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업무적으로만 오민정을 대하던 사장, 전무도 오민정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오민정을 제외하고 유일한 여성 회의 참가자였던 스타일리스트는 오민정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너무 이쁘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변한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회의 내내 싱긋싱긋 웃어 보이며 뭇 남성들의 심장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오늘부로 팬심에서 연심으로 넘어간 이들도 여럿이었다.

“이쁜 것도 이쁜 건데, 나 오 이사님이 오늘처럼 많이 웃는 거 처음 봤어. 아이돌 메이킹 우승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

“아이돌 메이킹 우승했을 때는 시험 잘 본 자식을 보고 흐뭇해하는 엄마 미소였는데, 오늘은 뭔가 사랑에 빠진 여자 같았어요.”

“너 이 자식 안 닥쳐! 팬 앞에서 사랑을 입에 담는 건 금기야. 팀장까지 단 아이돌 매니저란 자식이 그런 것도 몰라?!”

“앗, 형님들 쏘리.”

오민정이 팬이 가득 모인 자리에서 오민정이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한 이에게 싸늘한 시선이 쏠리자 그가 서둘러 사과했다.

아이돌 팬이 아이돌 연애에 관해서 하는 말이 있다.

연애하는 건 자유인데 제발 걸리지 마라.

아이돌에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연애가 자유인 것처럼, 연애하는 아이돌 팬을 그만두는 것도 팬의 자유다.

팬과 사랑 둘 다 가지고 싶으면 연애해도 타격을 입지 않을 만큼 스타가 되는 수밖에 없다.

오민정이 팬으로 먹고사는 연예인은 아니지만, 팬들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다.

누님을 추종하는 아재 팬들 모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오 이사님이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훨씬 이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섹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거든. 근데 오늘은 왠지 엄청 섹시했어. 나이에 비해 젊고 이쁘다고만 생각했지 색기를 느낀 적은 진짜 없었는데....”

“뭔가 농밀한 색기가 장난 아니었지.”

회의가 끝나고 이들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건 오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함도 있지만, 회의의 긴장감과 더불어 회의 내내 남성들을 자극했던 오민정의 색기 때문에 가랑이 사이가 자극받아 커진 터라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머리를 올려 얼굴을 모두 드러내고 색조 화장한 오민정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진한 색기를 풍겼고, 이는 회의실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자극했다.

분명 회의 내용은 각자 앞에 놓인 수첩, 종이등에 적혀있는데 오민정의 색기에 취해 있던 터라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 참, 그러고보니 이사님 얼굴 확 드러내니까, 주아랑 좀 닮은 것 같더라.”

“어? 김 팀장님도 그랬어요? 나도 그런 기분이 들었는데.”

AR팀장의 말에 너도 나도 자기도 그렇게 느꼈다고 하면서 다시금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왈가왈부하는 와중에 허도권 프로듀서와 밀키로드 실장만이 입을 다물고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이돌 메이킹의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오민정이 송유명과 관련이 있다는 건 여기 있는 이들 중 5명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윤주아가 태명그룹 송유명과 오민정의 딸이란 건 허도권, 밀키로드의 실장 둘만 아는 극비다.

주아의 정체는 아이돌 메이킹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비밀.

지금은 둘이 분위기가 닮았다. 눈이 닮았다, 한 회사에 있다보니 그렇게 보이나 보다 식의 가벼운 대화지만, 깊이 파고들면 골치가 아파질 수가 있다.

허PD와 실장은 주아 얘기가 더 많아지기 전에 끝내야겠다고 눈빛으로 합의하고는 허도권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짝, 짝, 짝

“자자, 놀만큼 놀았으니 이쯤에서 그만하죠. 저 곡 작업 마저 해야 하고 포커스걸즈 애들 보컬도 잡아줘야 해요. 형님들도 촬영팀 맞이할 준비 해야 하고, 애들 데리고 스케쥴 가야 하잖아요.”

나이로만 따지면 허도권은 여기서 거의 막내뻘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오래 포커스엔터에 있던 인물이며, 무엇보다 아이돌 메이킹에서 두 번 연속 우승해 망하기 직전이었던 영세기획사 포커스 엔터를 유명 기획사로 만든 스타 프로듀서다.

사장과 임원들도 허도권의 의견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포커스 엔터에서 발언력이 강하다.

임원들 다음으로 상급자이자 연장자인 AR 팀장도 허도권에게는 한 수 접어준다.

이런 허도권이 마무리를 선언하고, 가장 먼저 밀키로드의 실장이 일어나자 그를 따라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박 팀장은 자기 자리에 앉아 충격적인 변신을 선보인 오민정을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고 어제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떠올렸다.

어제 1시간 넘게 오민정 사무실에서 독대한 신재윤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돌아갔으며, 오민정은 배웅은커녕 사무실에서 나와보지도 않았다.

미팅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이런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될 줄 몰랐던 박 팀장은 중간에 괜히 끼었다가 한 소리 들었던 자기한테도 불똥이 튈까 조마조마했다.

신재윤이 떠나고 10분쯤 후에 아이돌 메이킹의 비리에 대해 아는 이들만 있는 단톡방에 오민정이 올린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오민정이 화낸 이유를 알았다.

[오민정 이사: 토요일에 태명백화점 송윤석이 BICA 신재윤을 불러 입 다물라고 경고했대요]

[오민정 이사: 그래서 그는 이번 일에서 빠지기로 했어요.]

겉에서만 파던 아이돌 메이킹 내부를 팔 수 있는 신재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좋아했던 오민정 이사다.

그것이 열흘도 안 되어 물거품이 되었으니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신재윤의 심정도 이해됐다.

오민정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태명그룹도 잘 알고 있다.

송윤석은 태명그룹 송유명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장차 NTV와 태명 유통 부분의 주인이 될 사람.

연예계 절대갑인 NTV의 주인 아니더라도 재벌 3세가 직접 나섰다.

우리나라 최대, 최고 기획사라는 CS, YH도 몸 사리느라 바쁠 텐데, BICA 정도면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박 팀장이 신재윤이었어도 언제 죽을지도 모를 회장의 숨겨둔 여자보다 장차 NTV의 주인이 될 송윤석 줄을 잡았을 거다.

그리고 송윤석이 나섰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박 팀장도 동요가 생겼다.

이대로 오민정을 믿고 따라도 될지 걱정이 되었다.

‘오 이사님이 실수한 거야. 송윤석 얘기는 뺏어야 했어. 조만간 신재윤처럼 빠지겠다는 사람이 나올 거야. 차라리 몰랐으면 불안하진 않았을 텐데.’

엔터업계는 열악한 대우와 높은 퇴사율로 악명이 자자하다.

반면 승진기회가 많고 이직도 아주 흔하다.

로드 2, 3년 하면 스케쥴 관리를 맡고, 스케쥴 관리 2, 3년 하면 팀장이 된다.

40살 전후로 이사가 될 수 있는 곳이 엔터업계다.

데리고 있는 연예인을 성공시킨 실적이 있다면 오라는 곳이 널렸다.

포커스 엔터는 아이돌 메이킹을 통해 걸그룹 밀키로드, 보이그룹 스핏블릿을 성공시켰다.

재무·총무를 하는 박 팀장은 스카우트 제의 같은 거 받아본 경험이 없지만, 실장, 팀장급 매니저, 신인개발팀장, AR 팀장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오라는 곳이 많을 것이다.

현 포커스 엔터의 핵심인 허도권 프로듀서는 꾸준히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오 이사님도 어제 송윤석 얘기한 게 실수란 걸 알고, 도망 못 가게 붙잡으려고 꾸미고 온 건가?’

문득 어제 그렇게 화를 내고 오늘은 딴 사람처럼 변신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송윤석 이름 세 글자에 박 팀장처럼 겁먹고 동요한 이들을 자신의 미모로 붙잡기 위해서!

억지라고 하면 억지지만, 생각해보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얘기도 아니었다.

오민정도 눈과 귀가 있으니 포커스 엔터의 남자들이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따르고 있는 큰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런데 송윤석이 등장하면서 단단한 결속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합류한 신재윤이 발을 뺀 이상, 다음 이탈자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까지는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오민정과 포커스 엔터의 일방적인 공격과 박병식의 수비전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반대될 가능성이 높다.

송윤석이 나선 이상 오민정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박 팀장은 이내 행복한 상상의 나래에 빠졌다.

‘전부 딴 회사로 튀고, 텅 빈 회사에 나만 남아 오 이사님의 힘이 되어주고, 그렇게 둘만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점점 가까워지다가 연인으로 발전해....’

숫자와 돈을 다루는 사람인 만큼 박 팀장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지금, 이 상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한없이 낮은 망상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고 꿈조차 꾸지 않는다면 너무 비관적이고 삭막할 인생이 될 것 같아 망상만이라도 원 없이 즐기기로 했다.

어제 포커스 엔터 갔던 일은 생각보다 잘 풀렸다.

섹스의 흔적 때문에 도망치듯이 재빨리 나오긴 했어도, 이런 태도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한껏 어필할 수 있었다.

오민정은 송윤석이 나선 것을 계기로 포커스 엔터 내에 의지가 약한 사람은 놓기로 했는지, 애초에 논의했던 것과 달리 내가 송윤석을 만났다는 사실을 전부 알려버렸다.

해고하고 내쫓겠다는 게 아니라, 짐을 덜어주고 본업에만 충실하도록 해주겠다는 의미라고 해서 참견하지 않았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 것 같았지만, 지수가 전해준 한 장의 보고서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예상보다 이번 일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더 이스트와 어둠에 일을 맡긴 지 시간이 좀 됐음에도 이주화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들어온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내가 너무 동각을 과대평가했다고 여기고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지수가 드디어 실체를 밝힌 것 같다며 전해준 보고서를 살피고 어느 정도 실상을 파악할 때까지 보고를 삼가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주화는 아이돌 메이킹으로 NTV에 복귀하기 전 3년 간 후베이 위성 TV에 있었음

나프 뮤직 스폰녀들의 주요 출국지는 홍콩, 대만. 홍콩, 대만에서 그 어떤 스케쥴을 한 내역이 없음. 해당 인원들 SNS상으로는 모두 여행처럼 보임.

이를 바탕으로 후베이성과 홍콩, 대만 유력자들과 관계를 조사했으나 밝혀진 것은 없음

이주화가 3개의 폰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 2개는 이주화 명의, 1개는 이주화 남편 명의.

이주화 남편 명의 폰에서 태명 백화점과 연결고리를 발견. 태명 백화점 해외사업부 소속 부장 부인 명의 폰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연락한 기록 확인. 추가 조사를 통해 이주화 남편과 해당 부인은 불륜, 지인, 친인 등 그 어떤 관계도 아님을 확인.

태명 백화점을 비롯한 태명 계열 유통사업본부는 상하이, 홍콩, 광저우, 난징 등에 지역본부를 두는 타 기업과 다르게 푸젠성 샤먼시에 지역본부를 설치, 4년 전부터 중국 푸젠성을 중심으로 중국 재진출

푸젠성 지역당의 비호 아래 국내 유통 기업 중 태명 계열이 푸젠성에서 가장 활발하게 영업 중.

3년 전 송윤석의 푸젠성 방문을 보도한 지역 신문. (사진)

송윤석과 악수하는 인물은 위치옌 푸젠 지역 정부 상무위원.

위치옌은 푸젠성 당 서기인 장샤오콴 파벌 서열 3위. 2년 후 푸젠성 부서기 유력. 성의 유력자라는 위치와 직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적은 인물. 송윤석 방문을 보도한 지역 신문도 송윤석보다는 위치옌이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나왔음을 중점적으로 보도.

장샤오콴은 푸젠성 최고 실력자. 국가 주석과 같은 파벌, 2년 후 열릴 전국인민대표 회의에서 중앙당 요직을 맡아 베이징에 진출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

내가 무협지는 제법 많이 봤어도 현대 중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푸젠성이라는 이름도 처음 봐서 인터넷 검색해서 복건성이란 걸 알았을 정도다.

복건도 무협지에서 자주 나오는 이름은 아니지만, 몇 번 보긴 했지.

기업, 그것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조직적으로 중국 관리들에게 성상납 한 흔적이 나왔다.

잘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손 못 쓰는 중국은 아예 포기하고 이쪽만 신경 쓴다 해도 일이 너무 커졌다.

있지도 않은 편두통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지수에게 물었다.

“종합하면 박병식 이주화는 공급책이고, 태명이 중간에서 나프뮤직 같은 애들을 푸젠성 높은 사람들에게 성상납 했다는 거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커요.”

“정황만이긴 해도 지수 네 말대로 태명 백화점이 관여했다는 건 확실한 것 같고, 관건은 송윤석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느냐, 아니면 나중에 알았냐겠어.”

“태명 백화점 해외사업본부장이면 단독으로 벌일 수 있긴 해요. NTV 모기업 임원이니까요.”

오민정이 어제 송유명이 송윤석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며 언급했다고 했었다.

주범과 공범의 형량이 다른 것처럼, 알고도 모른 척한 것과 주도한 것은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여기서 머리를 싸맨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서순을 따지자면 확실치도 않고, 알아도 건들 수 없는 송윤석은 일단 놔두는 게 낫다.

이주화가 정기적으로 연락한다는 태명 백화점 부장부터 중점적으로 파보라고 지시하려다가 관뒀다.

내가 시키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다는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알아내면 알려줘.”

“네.”

지수가 나가고, 책상에 엎어져 생각에 잠겼다.

실체를 전부 파악해야 어디부터 손을 대고 어떻게 수를 쓸지 계산이 나올 텐데, 고구마 줄기 딸려 나오듯, 파면 팔수록 계속 뭔가가 튀어나오니 당장은 뭘 할 수가 없네.

시작은 임상욱, 유성, 전현우를 자세히 알아보라는 거였는데, 이제는 이런 조무래기들은 언급하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이 커졌어.

아, 그러고 보니 KM 그룹 일도 해결해야 하는데 태명이 끼고 나서는 KM은 완전히 잊고 살았네.

KM 남씨부자에 대한 복수는 은주, 세라, 예린, 서진, 서하가 임신해야 본격적으로 시작인데, 은주가 사죄한다며 유두에 피어싱하는 바람에 상처가 아무는 내년 초로 임신이 밀렸다.

덩달아 KM도 뒷전으로 밀렸고, 나도 잊고 살았다.

KM과 K2 미디어도 답답한 게 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 포시즌스 프로듀싱을 부탁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아직도 전화 한 통, 메일 한 통 안 왔다.

그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일 처리 하는 거 보면 K2 미디어가 최근 7, 8년간 꾸준히 하락세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장님.”

“응? 무슨 일이야?”

책상에 엎드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나를 부르는 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나갔던 지수가 손을 폰을 들고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KM에서 사장님께 연락이 왔어요.”

안 그래도 지금 막 K2 미디어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얘네도 양반은 아니네.

나는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지수에게 물었다.

“방금 KM이라고 한 건 K2 미디어 말하는 거지?”

“아니요. K2 미디어가 아니라 KM 그룹 본사 비서실이라고 했어요.”

당연히 지수가 은주, 세라 등과 함께 지내다 보니 K2 미디어도 의례 KM이라고 퉁처서 말한 줄 알았는데, K2 미디어가 아니라 KM 그룹 본사 비서실이라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설마 포시즌스 일로 회장 비서실에서 다이렉트로 연락한 거야?”

“포시즌스 얘기는 없었고요, 남강석 회장이 사장님을 만났으면 하니 가능한 시간 알려달래요.”

나 분명 아이돌 기획사 사장, 프로듀서인데, 어째 피디들보다 기업가들만 더 나를 찾는 기분이다.

몇 주 전이였다면 남강석이 직접 불렀단 말에 바싹 긴장했을 거다.

그런데 KM 그룹보다 훨씬 큰 그룹의 영애들이 내 전용보지가 되고 나니 남강석이 불렀단 말에 코웃음부터 나왔다.

“왜 보자는 건지는 말 안 했어?”

“아주 중요한 얘기라고만 했어요.”

“하여튼, 금수저 놈들은 지들이 부르면 다 중요한 일이래. 망할 놈들.”

“어떻게 하실 거에요?”

“보자는데 보지 뭐. 나 언제 시간 비어?”

“아이돌 메이킹 녹화 있는 토요일 빼고 이번 주 저녁 시간은 전부 비어요.”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었어? 나 맨날 바쁘게 산 것 같은데.”

“제가 2주 정도 비서 하면서 느낀 게 사장님은 딱 근무시간에만 바쁘게 돌아다니시고 저녁 시간은 항상 집 아니면 회사였어요.”

내가 근무 시간 외 업무를 극혐하긴 했지.

인간관계도 아주 좁아서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여자였고.

원래 대표나 사장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골프치면서 친목질하고 인맥 넓혀야 하는데 말이지.

아, 또 생각났다.

나 이사님, 윤 실장이랑 같이 골프 배운다고 골프 교습을 무려 3개월 치나 끊어놓고 한 번도 안 갔어.

완전히 까먹고 살았네.

시간 나는 대로 가야겠어.

돈 아까워서가 아니라, 사장 계속하려면 골프가 필수야.

새삼 내가 바쁘게 산 게 아니라 머릿속만 바빴다는 걸 깨달으며, 지수에게 아무 때나 약속 잡으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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